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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리더가 먼저 노블레스오블리주 다하라!”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⑫>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25호] 승인 2013.12.23  11:04:24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라"
리더의 진심이 백성 자발적 헌신을 이끈다


이순신은 군인이었지만, 싸움만 하지 않았다. 자신의 군대와 관할 고을을 다스렸던 행정가였다. 게다가 그는 경영자로 전쟁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을 먹여살렸던 탁월한 경영자이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임금과 조정에서 요구하는, 또 의무적으로 올려보내야 하는 종이 등 각종 진상품을 생산해 공급했다. 《난중일기》에는 장수 이순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소한 기록이 나온다. 또한 최고사령관인 이순신이 몸소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모습도 나온다.

▲ 1594년 3월 23일. 견내량에서 미역 530 묶음을 케어 왔다.
▲ 1594년 6월 7일. 오늘 무씨 2되 5홉을 심었다.
▲ 1596년 1월 20일. 미시에 메주 만드는 것을 끝내고 부뚜막에 들여놓았다.
▲ 1595년 9월21일. 저녁에 이종호가 들어왔다. 다만, 목화만 가져왔기로 모두 나누어 주었다. 
▲ 1596년 8월 9일. 아침에 수인에게서 생마 330근을 받았다. 하동에서 가공한 도련지 20권, 주지 32권, 장지 31권을 김응겸과 곽언수 등에게 주어 보냈다.

무밭을 갈고 무씨를 심는 농민 이순신, 미역을 따는 어부 이순신, 음식에 필수불가결한 장을 만들기 위해 메주를 쑤는 부엌데기 이순신의 모습이다. 때때로 장사꾼의 모습도 나온다. 군사들을 입힐 옷감을 마련하기 위해 목화를 사오게 했고, 고기잡이 그물과 전선의 돛, 밧줄과 옷감을 만들기 위해 생마(生麻)를 사오게도 했다.

솔선수범도 진심을 담아라

그 과정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나라의 빈 창고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보급품까지도 제작했다. 그 때마다 그는 군사들과 함께 일하며 전투와 고된 노동으로 힘겨워 하는 군사들을 위로했다. 때로는 그들의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술과 떡과 고기로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고, 놀이마당도 만들었다. 설날과 추석, 동짓날 같은 명절에는 오늘날 군대에서도 나오는 특식과 같은 의미의 팥죽을 쑤어 주었다.

▲ 1594년 1월 21일. 아침에 본영의 격군 742명에게 술을 먹였다.
▲ 1594년 11월 11일. 동짓날이라 11월 중임에도 새벽에 망궐례를 드린 뒤에 군사들에게 팥죽을 먹였다.
▲ 1595년 3월 1일. 삼도의 겨울을 지낸 군사들을 모아 임금님께서 하사하신 무명을 나누어 주었다.
▲ 1595년 9월 9일.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여서 진영의 군사들에게 떡 한 섬을 나누어 주고 초경에 헤어져 돌아왔다.
▲ 1596년 1월 23일.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 더 주었다.
▲ 1596년 4월 23일. 늦게 군사들 중에서 힘센 사람에게 씨름을 시켰더니, 성복이란 자가 가장 뛰어나므로 상으로 쌀 한 말을 주었다.

이순신은 스스로 그의 그런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놀게 한 것은 고생하는 군사들의 노고를 풀어주기 위한 계획이었다(1596년 5월 5일).” 그는 진심을 다해 군사들을 먼저 이끌고 또 성원했지만, 그 자체도 승리를 위한 전략을 바탕으로 기획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군사들은 밤새 술에 취하고, 노래를 하며 즐거워했지만, 이순신 그 자신은 리더로서 홀로 번뇌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거렸다.

심지어 자신은 어머니의 상중이기에 먹어서도 안되고, 먹을 수도 없는 고기, 특히 험한 뱃길을 뚫고 제주에서 실어온 귀하디 귀한 소 5마리를 군사들이 먹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1597년 9월 9일).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진영을 감독하기 위해 방문한 임금의 대리인이며, 중앙정부의 고관들인 체찰사와 어사의 체면을 살리고, 군사들의 충성심을 높이기 위해 자신이 비축한 군량과 음식을 체찰사와 어사의 이름으로 잔치를 벌이게 했다.

▲ 1595년 8월 27일. (체찰사 방문후 체찰사가 주는 것으로 해서) 군사 5,480명에게 음식을 먹였다.
▲ 1596년 4월 12일. 어사가 밥을 지어 군사들에게 먹였다.

1597년 9월 9일의 소고기 잔치는 바로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전한 뒤 이순신이 수군을 수습할 때였고,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이 있기 열흘이 채 안될 시점이었다. 이순신은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 결전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그런 잔치를 열었다. 군사들도 그 소고기 잔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 앞에 피할 수 없는 대격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순신의 의도를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군사들은 이순신의 진심을 믿고, 이순신의 기대에 따라 움직였고, 마침내 며칠 후부터 기습해 오는 일본군을 무찌르고, 결국 명량에서 대승을 하게 만들었다.

이순신의 진심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보다도 그가 먼저 백성들과 함께, 군사들과 함께 된장을 쑤고, 씨앗을 뿌리며 땀을 흘렸고, 틈틈이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기 때문이다. 구궁궁궐에 홀로 우아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엄한 얼굴로 말 몇 마디만 던지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과 백성들과 늘 함께 땀을 흘렸기 때문이다. 군사들에게 늘 충성하려고 했던 진심이 전달되었기에, 군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통했기에 이순신과 이순신의 군사들은 다이아몬드 보다 더 단단한 신뢰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백성의 호주머니 스스로 열게 하라

백성을 먼저 돕고 백성에게 믿음을 얻었기에 이순신의 수군에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후원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군량을 후원하는 책임자들을 계원유사(繼援有司)라고 하는데 양반들은 솔선해서 이순신의 계원유사가 되었다. 일기에는 그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유기룡, 하응문, 신홍헌, 송상문, 조응복 등이 그들이다.

▲ 1595년 10월 17일. 진주의 하응구, 유기룡 등이 계원미 20섬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1595년 6월 19일. 신홍헌 등이 들어와서 보리 76섬을 바쳤다.
▲ 1597년 11월 7일. 늦게 전 홍산 현감 윤영현, 생원 최집이 와서 만났는데, 군량으로 벼 40섬과 쌀 8섬을 가져와서 바쳤다. 며칠 동안의 양식으로 도움이 될 만하다.
▲ 1597년 11월 28일. 무안에 사는 진사 김덕수가 군량으로 벼 15섬을 가져와 바쳤다.

그들 중 진주 유생 유기룡과 하응문은 처음에는 오히려 이순신에게 식량 부족을 호소했던 인물이다. 그 때 이순신은 그들을 위해 군량미의 일부인 쌀 5섬을 지원했다. 그들이 굶주림을 면한 뒤 그들은 이순신과 수군에 대한 보답으로 열성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이순신은 당장 굶어죽을 백성들을 위해 수군을 먹여 살리기도 힘든 형편에도 불구하고 군량미를 나눠주어 그들을 살려냈다.

그 결과가 다시 돌고 돌아 그들의 잠자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깨웠고, 이순신에게 거꾸로 10배 20배로 돌아왔다. 이순신이 늘 백성을 먼저 고려했고,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들을 도왔기 때문에 백성들은 이순신의 군사가 되었고, 군사들도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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