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hn_019_0070&fileName=hn_019_0070.pdf
* "발해 城址의 조사와 연구 - 송기호" 중 "Ⅴ.연구 현황과 문제점 - 1.성지 편년의 문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발해 성지 편년의 문제

발해의 영역이었던 만주 동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성지들을 모두 발해의 것으로만 단정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미 부여 시기부터 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고구려, 발해를 거쳐 명, 청시대에까지 계속 성이 축조되어 왔고, 일부는 여러 시대에 걸쳐 계속 물려받아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발해의 성으로 결론짓기 위해서는 일정한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명확한 기준 제시없이 막연히 발해의 성으로 규정된 것도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대다수의 성들이 발굴되지 않고 단지 지표 채집된 유물들을 바탕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도 있다. 이제 여기에서는 기존의 편년 기준이 무엇인지를 정리하여 보고 거기에는 문제점이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현재 편년 기준이 되는 것은 성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 양식이다. 성의 구조적인 면에서는 치(雉)·옹성(甕城) 등의 유무가 주로 고려되고 있고, 유물 면에서는 기와, 도기 양식이 주로 고려되고 있다. 이 중에서 전자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성벽과 관련된 시설물에는 성문, 옹성, 치, 각루, 암문, 수구문 등이 있는데, 이 지역에서 성의 연대를 고려할 때에는 치와 옹성이 주로 거론되고 있다. 일찌기 토리야마 키이치(鳥山喜一),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은 간도의 유적을 조사하면서 만주의 토성에서 옹성과 치(雉堞)가 발견되는 것은 대체로 요, 금 시대 이후의 것이라고 하여 시대 추정의 기준을 제시한 바 있고,101) 사이토 진베에(齋藤甚兵衛)는 훈춘 지역의 비우성(裴優城)과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 고려성(高麗城, 영성자성/營城子城) 등을 조사하면서 각각의 시기 추정에 옹성과치의 존재를 고려하였고,102) 오동성의 연대에 대해서도 이 성이 극히 소형이고 치(雉)가 있으며 발해 기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발해성이 아니라고 하였다.103)

해방 이후에 단경린(單慶麟)이 오동성을 조사 보고하면서 옹성은 당(唐)시대에 비로소 생긴 것으로 당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치의 존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연변박물관이 왕청현(汪淸縣)의 성을 조사하면서 반성고성(半城古城)이 마면(馬面,치)과 각루 시설이 없고, 문의 구조도 요, 금 시기의 옹성과 같지 않다고 하면서 이 성을 발해의 성으로 규정하고 있다.104) 또 주국천)朱國忱)도 토성자토성(土城子土城)을 거론하면서 옹성과 마면이 없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05)

이상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아직 성 벽의 구조면에서는 편년 기준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듯하다. 또 만주 지역에서 성벽에 치, 옹성이 발생하는 시기가 대체로 요, 금 시대 이후로 보는 견해에는 중국 문화의 변방지역으로의 전파라는 관점에서만 보려는 편견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나 여겨진다. 원래 옹성, 치(마면)는 당(唐)대 이전에는 변경지역에서 적을 방어하는 성장(城障)으로 출현하였다가 뒤에 중원지방에 이들이 설치되면서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도성 방어상 중요 시설로 된 것이며 오대(五代) 이후에 이러한 시설들이 보편화되었다고 한다.106) 그런데 고구려의 도성과 산성에서는 초기부터 이미 옹성, 치가 나타나는 점을 고려해볼 때107) 발해의 성지에서도 옹성, 치가 발견될 수 있으며 그것은 고구려의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발해의 성지로 분류된 것들 중에는 오동성, 흑석고성이나 북청토성의 경우와 같이 옹성, 치 등이 설치된 것들이 있으며,108) 이러한 성들이 발해 이후에 연용되면서 추가로 시설된 것이 아니라면 바로 위와 같이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옹성, 치의 존재가 발해 성지와 요, 금 시대 성지 구분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유물 중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돈화 육정산고분군에서 출토된 도기들과 동경성에서 출도된 기와, 도기들이다. 육정산고분군 출토 유물은 발해 전기의 것을 대표하는 것들이고, 동경성 출토 유물은 상경 천도 이후의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더우기 육정산 고분군이나 동경성은 다른 시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출토되는 것들을 발해 유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러한 유물 중의 하나로서 기와를 예로 들면 연화문 와당과 암키와 무늬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것을 계승 발전시킨 연화문 와당(蓮花紋 瓦當/숫막새)은 6문(枚)의 복판(複瓣)이 기본형이라 한다.109) 이러한 와당이 고구려 성지의 분포 범위 밖인 동경성이나 오동성 지역등에서 발견된다면 발해의 시대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암키와 둘레에 나타나는 육권즐치(문連圏櫛齒紋)10)은 발해 고유의 것으로 이것도 편년의 중요기준이 되고 있고,11) 문자와(文字瓦)도 발해 유적에서 발견되는 특징적 유물로 꼽히고 있다.

이상의 편년 기준도 단순히 편의적인 것이지 아직은 절대적 기준으로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위의 어느 한 요소만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발해시기의 것으로 단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이에 대해 토리야마 키이치(鳥山喜一),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은 미구에 잘록한 부분(くびれ)이 있는 수키와, 연화문 와당, 문자와(文字瓦)가 동시에 반출한다면 발해의 성으로 확정지을 수 있다고 한 바 있다.12)

이렇게 해서 발해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지들을 대상으로 전기와 후기로 시기 구분하여 보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위존성((魏存成)은 발해시기의 성을 두 시기로 나누어 상경 천도 이전의 전기에는 평면이 장방형, 정방형, 반월형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가 천도 이후인 후기에 들어가면 규모가 커지면서 장방형의 일정한 형태로 통일된다고 하였다.13) 또 엄장록(嚴長錄), 양재림(楊再林)은 연변지구에서 발견되는 암키와(板瓦)들을 바탕으로 발해 초기에는 고구려 영향을 받아 문식(紋飾)이 있는 것들을 사용하였으나 나중에는 문양이 없는 것(소면와,素面瓦)을 사용하여 전형적인 발해 고성들에서는 후자만이 나타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어 발해 성지의 편년에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114) 


주석

101) 鳥山喜一·藤田亮策, 《間島省古蹟調査報告》滿洲國 民生部, 1942, p.3
102) 齋藤甚兵衛·山本守, 《琿春·敦化》滿洲事淸案內所, 1943, pp. 19∼30
103) 齋藤甚兵衛(優), 〈間島省海蘭平野の渤海遺蹟〉《考古學雜誌》40―1, 1954, p. 21
104) 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 〈吉林汪清考古調査〉《北方文物》1985―4, pp.6∼7
105) 朱國忱, 〈渤海龍州三縣考〉 《求是學刊》1986―5, p. 90
106) 黄寛重, 〈中國 古代城郭의 구조와 재료의 변천―唐宋城郭의 防禦기능을 중심으로―〉 《百濟研究》19, 198 p. 126
107) 陳大爲, 〈大寧高句麗山城初探〉 《中國考古學會第5次年會論文集(1985)》 文物出版社, 198 pp. 116∼17 사회과학출판사 편, 《고구려 문화사》논장신서9, 논장, 198 p.53∼54, p. 7
108) 齋藤甚兵衛·山本守, 앞책 pp. 78∼80, pp. 87∼8
리준걸, 앞논문 p. 3
109) 齋藤甚兵衛, 《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琿春縣公署, 1942, p.30
110) 圈線紋, 筆管紋, 孔雀紋 등으로도 불리는데 암키와 하단 측면을 두 개의 흠으로 삼등분하여 아래, 윗부분에는 평행 빗금 무늬를 만들고, 가운데 부분에는 連圈무늬를 만든 것이다. 연권무늬 안에는 또 여러 무늬가 들어가 있다.
111) 嚴長錄·楊再林, 延邊地區高句麗渤海時期的紋飾板瓦初探 《博物館研究》 1988―2, p.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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