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hn_019_0070&fileName=hn_019_0070.pdf
* "발해 城址의 조사와 연구 - 송기호" 중 "Ⅴ.연구 현황과 문제점 - 2.고구려 성지와의 관련"만 가져왔습니다.

발해 성지와 고구려 성지와의 관련
1989년 송기호
 
발해와 고구려의 문화적 연관성을 규명한 대표적인 연구로서는 박시형, 주영헌, 박영해, 미카미 츠키오(三上次男) 등을 들 수 있다.15) 이 중 박시형은 문헌적인 정리를 하고 있고, 주영헌은 유물, 유적 검토를 위주로 하고 있고, 박영해는 기왕의 논의를 정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미카미 츠키오(三上次男)도 유적, 유물을 검토하였다. 이제 여기에서는 발해의 성(城)과 관련된 부분만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제일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를 이루어 상호결합되어 있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하였다. 일찌기 사이토 진베에(齋藤甚兵衛)는 훈춘 지역의 성을 조사하면서 평지성인 고려성(高麗城, 영성자성/營城子城)과 산성인 성장랍자성(城墻磖子城)의 관계를 고구려 동구성(通溝城)과 산성자(山城子)산성의 관계와 동일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 바 있다.16) 그 뒤 돈화 지방의 오동성과 그 주위의 산성을 비롯한 방어시설물들이 발해시기의 것으로 밝혀지고 난뒤 평지성인 오동성과 주변의 산성의 결합이 고구려의 경우와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많이 지적하게 되었다. 주영헌은 발해 중경현덕부를 논하면서 오동성과 주변의 군사시설의 배치가 집안이나 평양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과 동일하며 이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풍습과 전통을 이어받은 계승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였다.17) 그러나 위존성(魏存成)은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현상이 발해 초기에 나타난다고 하면서 이것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발해의 주체민족인 속말말갈(粟末靺鞨)이 고구려와 인접하였고, 또 고구려에 복속되었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중국과 한국 사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중국측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이란 측면을 애써 축소하려 하고 있으며,18) 반면에 북한측에서는 의부로부터의 영향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고구려 문화와의 계승 관계만을 규명하려 함으로써 양자 모두 객관성을 잃고 있는 셈이다.

원래 평지성과 산성의 동반관계를 보여주는 방어체계는 고구려의 독창적 산물로서 현재 환인현(桓因縣)의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과 오녀산성(五女山城), 집안현성(集安縣城,국내성)과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무순성(撫順城)과 고이산성(高爾山城), 안학궁지(安鶴宮址)와 대성산성(大城山城)에서 그 면모를 찾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체제는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어 백제의 몽촌토성(夢村土城)과 남한산성(南漢山城), 익산의 왕궁리(王宮里)토성과 미륵(彌勒)산성 등을 열거할 수 있고, 일본의 다자이후(大宰府)와 오노성(大野城)도 이와 동일하다고 한다.19) 그리고 가야에서도 그러한 결합 형태가 보인다고 한다.120)

그런데 발해가 영주(營州)로부터 만주 동부지역으로 도피하여 불과 몇년 사이에 오동성과 그 주변의 산성을 이와 같이 고구려식으로 축조하였다면 그것은 건국 집단이 고구려계일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때는 고구려가 망한지 30여년이 지난 시기이고, 그동안 영주에서 중국 문화에 접하였을 터인데도 이렇게 고구려식을 따랐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시기 고분인 정혜공주 무덤 양식과 장법(葬法)이 완전히 고구려 식임을 보여주고 있어 이 추측은 더욱 확실해진다.

다음으로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성벽에 치(雉)·옹성(甕城) 등을 설치하였던 것도 고구려 영향임을 알 수 있고, 성 안의 많은 건축물에 사용된 기와가 거의 고구려 양식을 띠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건축 구조나 양식도 고구려식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러나 초기에 고구려 문화 요소를 농후하게 반영하던 발해 문화는 상경으로 천도하면서 자신의 문화 기틀을 다져나가기 시작하자 당의 문화를 상당히 흡수하게 되었고, 성의 체제도 중국식을 따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121)

주석

115) 박시형, 〈발해사연구를 위하여〉《력사과학》1962―1
주영헌,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고고민속》1967―2
주영헌, 〈발해 중경 현덕부에 대하여〉《고고민속》196―2, pp. 147∼171
박영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력사과학》1986―3
三上次男, 〈渤海國에 對하여 ―特히 高句麗와의 文化關係에 대하여―〉《종
합학술회의 논문집―광복 30주년 기념―》학술원, 1975
116) 齋藤甚兵衛·山本守, 앞책 p. 32
117) 주영헌, 앞논문 196 p.3
118) 다음 글을 예로 들 수 있다.
王承禮, 〈敦化六頂山渤海草清理發掘記〉《社會科學戰線》1979―3,  p. 209
劉振華, 〈渤海大氏王室族属新證―從考古材料出發的考察―〉《社會科學戰線》1981―3
119) 全榮來, 〈古代山城の發生と變遷〉 〈東アジアと日本》 고고·미술편, 田村圓澄先生古稀記念會, 吉川弘文館, 1987, pp. 503∼504
120) 井上秀雄, 〈東アジアの中の古代朝鮮の城郭〉윗책 p.530
121) 魏存成, 〈渤海城址的發現與分期〉《東北考古與歷史》1, 1982 참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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