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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 위치
2011.1  김기섭 

위례성의 위치 및 구조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의견을 내놓았다. 주로 하북위례성이 실재했는가 하는 문제와 위례성·한성·한산이 지금의 어디이며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해서였다.

백제의 도읍이 오랫동안 한강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한산의 위치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신라의 한주(漢州)는 본래 고구려의 한산군(漢山郡)으로서 신라가 차지한 뒤 경덕왕(景德王)때 한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고려시대의 광주(廣州에 해당한다.68) 이로써 삼국시대의 한산은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남한산을 가리키며, 온조왕이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겼다는 기사69)는 지금의 남한산 아래로 백제가 도읍을 옮겼다는 뜻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산 아래로 도읍을 옮기기 전의 위례성은 어디였을까? 고려·조선시대의 학자들은 대개 稷山(충남 천안시)의 위례산성에 주목하였다. 그러니까 온조가 지금의 위례산성에서 나라를 세우고 13년 만에 한산 아래로 자리를 옮겼는데, 한산 아래의 새 도읍이 바로 하남위례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근초고왕 무렵에는 한강 북쪽의 한산으로 도읍을 다시 옮기고 한성이라 불렀노라고 풀이하였다.70) 백제의 위례성이 직산에 있었다는 막연한 믿음에 본격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정약용(丁若鏞)이다. 그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기사71)를 예로 들며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가 낙랑, 말갈의 침입 때문이므로 원래 도읍은 낙랑·말갈과 가까운 곳이었을 터이며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 남쪽을 보니”라고 했으므로 한강 남쪽으로 옮기기 전의 위례성은 한강 북쪽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한강 남쪽의 위례성을 하남위례성이라 했으니 한강 북쪽의 위례성은 하북위례성이라고 지적하였다.72) 백제의 도읍이 위례성→하남위례성→한성 순서이며 하남위례성은 광주, 한성은 한양에 있었다는 생각은 이전의 학자들과 같지만 하북위례성을 상정하고 그 위치를 한양에 비정한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큰 진전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진전이 비단 정약용 개인에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김정호(金正浩)와 같은 역사지리학자들도 온조가 나라를 세운 위례성을 한강유역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73)

그러나 한국의 근대 역사학을 선도한 일본인 연구자들은 하북위례성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츠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위례성과 한산을 모두 남한산성에 비정하였는데, 이는 위례성이 곧 하남위례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74)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하남위례성을 광주, 한산을 남한산에 비정하고 하남위례성에서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추정하였다.75)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백제의 천도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진 않았으나 고고학적 관점에서 지금의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간주하였다.76) 이들이 백제의 천도과정을 소상히 밝히지 않은 것은 그만큼 관심이 적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사를 믿지 않고 부정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학계는 일본인 연구자들의 방법론을 따랐다. 그러나 내용은 많이 달라졌다. 이병도(李丙燾)는 일본인 연구들과 같은 방식으로 정약용의 추론을 지지하였다. 다만, 하남위례성이 곧 한성이라고 보는 등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르다. 그는 하북위례성을 세검동 계곡 부근에 비정하고 하남위례성과 한성은 광주 춘궁리(春宮里)일대라고 단언하였다.77) 이로써 춘궁리라는 지명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고려시대 이래 많은 사람들이 하남위례성을 광주(廣州) 내지 광주고읍(廣州古邑) 혹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비정하였다. 땅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광주≧광주고읍≧남한산성’이기에 기본적으로 발상과 근거는 같다. 백제의 하남위례성은 한산 아래에 있었다 하므로 남한산이 기준이었다. 마침 남한산 북쪽 기슭이 조선시대 광주의 읍치(邑治)였다는 사실이 주목받았다. 고구려·신라를 거쳐 고려왕조의 광주(廣州)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는 동안에도 줄곧 백제 때의 기간시설이 유지·이용되었을 터이니 광주 읍치야말로 가장 유력한 하남위례성의 터전일 것이라는 발상 때문이다. 인조(仁祖) 때에는 그 읍치가 남한산성 안으로 옮겨졌으므로 조선 후기에는 산성 내부의 주민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자 온조왕이 남한산성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더욱 공공연해졌다. 이처럼 지금의 하남시 교산동, 춘궁동일대에 있던 광주 읍치가 남한산성 안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광주고읍이나 남한산성에 비정하는 견해는 기본적으로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발상의 전환이랄까 새로운 추론은 김영수(金映遂)의 몫이었다. 그는 (하북)위례성이 적성강(積城江) 남쪽 고양(高陽) 부근에 있었을 것이며, 하남위례성과 한성은 광장진(廣壯津) 대안의 한남토성지(漢南土城址)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78) 적성강(積城江)이란 파주 적성면 일대를 지나는 임진강을 가리키며, 한남토성지(漢南土城址)란 지금의 풍납토성을 가리킨다. 추론 과정과 방법이 조금 거칠고 이른바 하북위례성을 논하면서 임진강을 언급한 것이 당시로선 다소 엉뚱해서인지 별다른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영수(金映遂)의 견해는 독창적이면서도 백제도성제 연구의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백제의 초기 중심지를 한강유역이 아닌 임진강유역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수십 년이 지나 각종 고고자료를 보탠 뒤에야 새삼 동조자를 만났으며,79)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과 한성의 유지로 꼽은 것도 역시 수십 년 뒤에야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80) 물론, 백제의 초기 중심지를 임진강유역과 연관짓는 견해는 아직 매우 불안정하며, 풍납토성에 주목한 사람도 김영수가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김영수는 단순한 상식선의 지명(地名) 비정에 그치던 위례성 문제를 북방세력의 남하․이주라는 역사적 배경과 유적 중심의 고고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함으로써 백제사 연구 수준을 한층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김영수의 제안 이후에도 학계의 추론은 지극히 평이한 방향으로 흘렀다. 李弘稙은 하남위례성을 춘궁리일대, 한성과 한산을 남한산성에 비정하였다.81) 이는 하남위례성을 한성과 같은 곳으로 보던 이병도의 견해를 조금 수정한 것인데, 이로써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春宮洞)일대에 주목하는 견해가 한동안 대세를 이루었다.82)

1970년대부터 서울시를 중심으로 지역 개발이 활기를 띠자 고고학의 역할과 기여도가 더욱 높아졌다. 자연히 유적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며 논증하려는 노력도 늘었다. 당시 이성산성에 주목하거나83)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과 연관지은 견해84)는 모두 단순 추론이지만 고고학의 위력이 발휘될 조짐이었다.

고고학의 위력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되었다. 몇 차례의 조사를 통해 석촌동고분군이 백제의 왕실 묘역으로 입지를 굳히자85) 인근의 백제 유적들이 새삼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김정학(金廷鶴)은 하남위례성을 풍납토성, 한산을 남한산성에 각각 비정하며 부근 유적에 주목하라고 제안하였다.86) 차용걸(車勇杰)은 몽촌토성이 석촌동고분군으로부터 불과 2km정도 떨어져있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면서 하남위례성과 한성이 모두 몽촌토성과 이성산성 사이에 해당하리라고 추정하였다.87) 그는 특히 역사지리적 관점에서 중랑천(中浪川) 유역의 지형조건에 주목하고 하남위례성으로부터 한나절 거리에 위치했을 하북위례성의 터전이라 손꼽았는데, 역사학과 고고학을 유연하게 혼용한 결과인지라 큰 반향을 일으켰다.

88서울올림픽 유치 여파로 1983년부터 몽촌토성을 발굴조사하게 되자 많은 자료가 쏟아졌다.88) 그리고 몽촌토성은 일약 가장 유력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유지(遺址)로 평가받았다. 성주탁(成周鐸)은 그간의 발굴조사 성과를 적극 활용하며 몽촌토성-공산성-부소산성으로 이어지는 도성체계를 구성하고 주변 나라 도성과의 비교를 통해 검증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 춘궁리일대를 한성에 각각 비정하였으며, 한산은 남한산성 혹은 이성산성이 유력하다고 추정하였다.89) 같은 시기에 발표된 최몽룡(崔夢龍)․권오영(權五榮)의 생각도 거의 같았다.90) 다만, 한산을 이성산성으로 확정하고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의 천도과정을 추론한 점이 다소 다를 뿐이다.

김기섭(金起燮)은 기본적으로 성주탁(成周鐸)의 연구방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하북위례성을 중랑천 일대에서 찾고 하남위례성은 몽촌토성에 비정하였다. 다만, 한성에 대해서는 해석이 달라서 하남위례성을 기준으로 근초고왕 때 도성 범위를 확대한 것이 한성이라고 풀이하였다. 중국 춘추전국기)春秋·戰國期)의 도성들처럼 한성도 왕성(王城: 남성/南城)과 거민성(居民城: 북성/北城)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축인 거민성에는 관청을 비롯한 주요시설과 별도의 왕궁까지 있었으리라 추정하였다.91) 그러나 얼마안가 김기섭은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였다. 백제가 처음부터 하남위례성에서 시작했다는 견해92)에 동의하고, 한성을 구성한 남성(몽촌토성)과 북성(풍납토성) 가운데 북성이 하남위례성이었으며 나중에 남성을 쌓았다고 분석하였다.93) 이러한 해석은 몽촌토성을 늦어도 3세기 후반에 쌓았다는 발굴조사단의 편년을 부정하고 4세기 무렵으로 축조시기를 조정하려는 시도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이도학(李道學)도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에 비정하고 한성을 하남위례성이 확대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몽촌토성을 왕성(王城), 풍납토성을 이궁성(離宮城)이라 부르고, 한산(漢山)을 북한산성에 비정하였다. 즉, 근초고왕 때 고구려를 압박하기 위해 하남위례성에서 한강 북쪽의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나중에 다시 한성으로 확대된 하남위례성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94) 

강인구(姜仁求)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를 기준으로 삼아 하북위례성은 애초부터 없었노라고 풀이하였다. 그리고 고고학적 견지에서 하남위례성은 풍납토성, 한산은 뚝섬지구, 한성은 몽촌토성에 각각 비정하였다.95) 풍납토성의 입지조건과 규모 및 구조, 뚝섬에서 발견된 금동불상, 몽촌토성의 입지조건과 발굴성과 등을 참작한 결과였다. 처음에 하남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우고 나중에 왕의 거처를 한성으로 옮겼으며, 근초고왕 때 한강 북쪽의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곧 한성으로 되돌아왔다는 해석이다.

이형구(李亨求)는 하남위례성이 곧 한성이라는 관점에서 백제의 왕성은 오직 풍납토성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문헌자료는 물론 유적의 입지·규모․구조 등을 감안할 때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성이며, 몽촌토성은 유사시를 대비한 산성으로서 군성(軍城)이기에 왕성일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96) 이형구의 주장은 풍납토성 발굴97)과 보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김태식(金台植)의 적극적인 지지98)를 얻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풍납토성은 일약 백제 도성제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성벽 절개조사를 통해 판축(版築)한 성벽의 높이가 대략 10m안팎, 하부 폭은 최소 43m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토성 안에서 대형건물지와 최고급의 유물들이 속속 발견․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논란의 여지는 없을 듯했다. 어느덧 풍납토성이 백제의 도읍으로서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학계의 대세에도 불구하고 박순발(朴淳發)은 여전히 몽촌토성을 백제의 초기 왕성으로 손꼽았다. 그는 몽촌토성 발굴조사를 주도한 경험에 기초하여 몽촌토성의 축성시기를 늦어도 3세기 중엽 이전으로 조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풍납토성의 축성 시기를 3세기 중엽 이후로 판단하였다.99) 풍납토성보다 몽촌토성을 먼저 쌓았다는 것이다. 풍납토성을 발굴조사한 문화재연구소의 편년안과 비교하면 무려 3세기 가량이나 차이가 나므로 당연히 학계에 논란이 일었다.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지만, 한성시기 백제 유적과 유물의 편년이 아직 안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지적한 셈이다.

김호규(余昊奎)는 하남위례성을 풍납토성, 한산과 한성을 몽촌토성에 각각 비정하였다. 위례성을 달리 부른 이름이 하남위례성이고, 한산과 한성은 같은 곳이며, 천도과정도 위례성→한산→위례성 순이었다고 주장하였다.100) 풍납토성 발굴조사를 주도한 신희권(申熙權)은 하남위례성을 풍납토성에 비정하고, 한성을 남성과 북성의 합칭으로 이해하였다. 북성을 풍납토성, 남성을 몽촌토성으로 인식한 점은 김기섭․이도학․박순발 등과 같지만, 남성(몽촌토성)의 기능을 유사시에 대비한 군성(軍城)으로 한정하고 풍납토성이 줄곧 백제 도성의 주축이었음을 강조하였다.101)

이처럼 위례성에 대한 연구자의 의견이 제각기 달라 한데 묶어내기 어렵지만 일종의 흐름이랄까 대체적인 경향은 찾을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체로 백제가 한강 북쪽에서 건국한 다음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이해하였지만, 1990년대부터는 하남위례성이 백제의 출발지라고 풀이하는 연구자가 다수이다. 그리고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1970년대까지 춘궁리일대가 가장 유력했으나, 1980년대에 몽촌토성이 자주 거론되었고, 1990년대부터는 풍납토성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무엇보다 고고학의 성장과 유적 발굴성과에 힘입은 것으로서, 문헌사학의 한계와 앞으로의 지향점을 암시해준다.


주석

69) 秋七月 就 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70) 柳馨遠, 東國輿地志 漢城府 ․ 廣州牧 ․ 稷山縣 ; 申景濬, 旅菴全書 疆界考 國都 ; 安鼎福, 東史綱目 地理考 百濟疆域考.
71)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72) 丁若鏞, 與猶堂全書 疆域考 慰禮考․漢城考.
73) 金正浩, 大東地志 廣州府
74) 津田左右吉, 1913, 百濟慰禮城考 , 朝鮮歷史地理上, 南滿洲鐵道株式會社.
75) 今西龍, 1934, 百濟國都漢山考 ,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76) 鮎貝房之進, 1934, 百濟古都案內記 , 朝鮮234호.
77) 李丙燾, 1976, 慰禮考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78) 金映遂, 1957, 百濟國都의 變遷에 對하여 , 全北大 論文集1, 전북대학교.
79) 文安植, 1995, 百濟 聯盟王國 形成期의 對中國 郡縣關係 硏究 ,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李賢惠, 1997, 3세기 馬韓과 伯濟國 ,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林永珍, 2003, 積石塚으로 본 百濟 建國集團의 南下過程 , 先史와 古代19.
80) 金廷鶴, 1981, 서울近郊의 百濟遺蹟 , 鄕土서울39 ; 金起燮, 1990, 百濟前期 都城에 관한 一考察 , 淸溪史學7 ; 李道學, 1992, 百濟 漢城時期의 都城制에 관한 檢討 , 韓國上古史學報9 ; 姜仁求, 1993, 百濟 初期 都城 問題 新考 , 韓國史硏究81 ; 李亨求, 1997,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 申熙權, 2003, 百濟 漢城期 都城制에 대한 考古學的 考察 , 백제 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서경문화사.
81) 李弘稙, 1960, 백제건국에 관한 제문제(1) , 국사상의 제문제6, 국사편찬위원회.
82)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 韓國學報3, 一志社 ; 方東仁, 1977, 三國時代의 서울 , 서울六百年史Ⅰ, 서울시사편찬위원회 ; 金龍國, 1983, 河南慰禮城考 , 鄕土서울41 ; 成周鐸, 1985, 百濟城址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崔夢龍․權五榮, 1985, 앞의 논문 ; 金侖禹, 1993, 河北慰禮城과 河南慰禮城 , 史學志26 ; 吳舜濟, 2000, 百濟 漢城時期 都城體制의 硏究,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83) 尹武炳, 1984, 漢江流域에 있어서의 百濟文化硏究 , 百濟硏究15.
84) 李基白외, 1975, 百濟文化學術會議錄 , 百濟文化7․8 ; 鄭永鎬, 1979, 서울地域의 百濟文化 , 馬韓․百濟文化3 ; 1984, 百濟初期遺蹟硏究에 대하여 , 馬韓․百濟文化7. 
85) 서울대학교박물관․고고학과, 1975, 石村洞 積石塚 發掘調査報告 ; 蠶室地區遺蹟發掘調査團, 1978, 蠶室地區遺蹟發掘調査報告 , 韓國考古學報4 ; 金元龍․裵基洞, 1983, 石村洞3號墳(積石塚) 發掘調査報告書, 서울대학교박물관 ; 石村洞發掘調査團, 1987, 石村洞古墳群發掘調査報告, 서울특별시; 金元龍․任孝宰․林永珍, 1989, 石村洞 1․2號墳, 서울대학교박물관.
86) 金廷鶴, 1981, 앞의 논문.
87) 車勇杰, 1981, 慰禮城과 漢城에 대하여(Ⅰ) , 鄕土서울39.
88) 夢村土城發掘調査團, 1984, 整備․復元을 위한 夢村土城發掘調査報告書, 서울특별시 ; 夢村土城發掘調査團, 1985, 夢村土城發掘調査報告, 서울특별시 ; 서울大學校博物館, 1987, 夢村土城 東北地區發掘調査, 서울특별시, 1988, 夢村土城 東南地區發掘調査, 1989, 夢村土城 西南地區發掘調査, 서울특별시.
89) 成周鐸, 1985, 앞의 박사학위논문.
90) 崔夢龍․權五榮, 1985, 앞의 논문.
91) 金起燮, 1990, 앞의 논문.
92) 姜仁求, 1993, 앞의 논문.
93) 金起燮, 1995, 百濟 前期의 漢城에 대한 再檢討 , 鄕土서울55, 서울시사편찬위원회 ; 김기섭, 2008, 백제 한성시기의 도성제 성립과 몽촌토성 , 百濟文化38,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94) 李道學, 1992, 앞의 논문.
95) 姜仁求, 1993, 앞의 논문.
96) 李亨求, 1997, 앞의 책.
97)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風納土城Ⅰ, 2002, 風納土城Ⅱ-동벽 발굴조사보고서- ; 한신대학교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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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마을) 시굴 및 발굴조사보고서1-.
98) 김태식, 2001,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영사.
99) 朴淳發, 2001, 앞의 책.
100) 余昊奎, 2002, 漢城時期 百濟의 都城制와 防禦體系 , 百濟硏究36.
101) 申熙權, 2002, 風納土城 발굴조사를 통한 河南慰禮城 고찰 , 鄕土서울62, 2003, 百濟 漢城期 都
城制에 대한 考古學的 考察 , 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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