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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단절의 시대, 이순신式 소통 ‘절실’”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⑯>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29호] 승인 2014.01.21  09:32:18

“동료·부하 명나라 장수들까지 감복시켜”
위협보다 마음을 얻는 것은 간절한 설득

▲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동상>

이순신은 자신의 동료와 부하들을 감동시킬 정도로 설득을 잘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지원군으로 파병되어 온 상국(上國) 명나라 장수들까지도 감복시켰다. 명나라 진린의 수군이 합류하기 전에 조선 수군의 상황을 살펴보러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의 진영을 찾아왔다. 
 
그 때, 이순신은 명나라 군대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면서 조선의 수군과 명나라 군대가 힘을 합해 적을 모두 무찌르자고 간절히 말했다.

▲ 아침에 통역관이 와서 전하기를 “명나라 장수가 남원 총병 유정이 있는 곳에 가지 않고 곧장 돌아간다”고 했다. 내가 명나라 장수에게 간절히 말하기를, … 파총이 듣고는, “과연 그 말이 옳습니다.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가서 서로 만나 본 뒤에 곧장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아침을 먹은 뒤 파총이 내 배로 내려와서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이별주 일곱 잔을 마신 뒤 닻줄을 풀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 재삼 간절한 뜻을 표하며 전송하는데 마음이 아쉬웠다. 1594년 7월 20일.

도움을 얻고자 하면, 자존심은 잠시 버려라 

일기 기록처럼 이순신의 열망이 담긴 설득으로 명나라 장수는 자신이 계획했던 진로도 변경했다. 얼마 후 명나라에서는 진린을 대장으로 한 수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진린은 특히 오만하고 거칠었다. 류성룡은 진린으로 인해 이순신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해 “진 제독(진린)이 또 그곳에서 조선 수군과 진을 합치려고 하니 모든 책응(策應, 계략을 써서 서로 도움)과 조도(調度, 사물을 정도에 맞게 처리함)의 일은 오로지 영감만 믿습니다. 바라건대 모름지기 협심 동력하여서 큰 공훈을 이루십시오”라는 편지를 써 보낼 정도였다. 이순신이 진린을 설득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류성룡의 《징비록》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진린은 성격이 사나워 다른 사람들과 대부분 뜻이 맞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진린의 군사는 수령을 때리고 함부로 욕하고, 심지어 찰방 이상규의 목에 새끼줄을 매어 끌고 다녀 이상규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내가 역관을 시켜 말렸어도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앉아 있던 재신(宰臣, 3품 이상의 관원)들을 보고, “아깝게도 이순신의 군대도 곧 패전할 것이다. 진린과 함께 있으면 움직임을 저지당할 것이고, 의견도 서로 어긋날 날 것이고, 장수 권한도 빼앗길 것이다. 우리 군사들도 함부로 학대당할 것이다. 이를 막으면 진린은 화를 더 낼 것이고, 놓아두면 끝이 없을 테니 이순신의 군대가 패전하지 않을 까닭이 있겠소?”라고 했다. 여러 사람들도 “맞는 말씀입니다”라며 탄식만 할 뿐이었다.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군사들을 시켜 사냥과 고기잡이를 대대적으로 하게 했다. 사슴과 멧돼지, 물고기 등을 많이 잡아 아주 푸짐하게 잔치를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이순신은 멀리 나가서 진린의 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영접했다. 진린과 그의 수군이 진영에 도착하자 풍성하게 준비한 잔치 음식과 술로 그들이 아주 흡족하게 대접했다.

류성룡의 이 기록은 모두가 두려워하고 불편해 했던 진린, 류성룡 자신도 어쩌지 못했던 진린을 이순신이 어떻게 설득했는지 보여준다. 이순신이 명나라 군사들에게 베푼 잔치는 요즘 언론을 장식하는 뇌물과 같은 성격과는 차원이 다르다. 쇠잔한 조선 수군을 이끄는 이순신의 절박한 입장이 만든 고육지책이다.

진린이 도착했을 때 때마침 녹도를 침범한 일본 전선을 조선수군이 격퇴하자, 이순신은 그 전리품들을 진린에게 주면서 조선 수군의 공로가 아닌 진린의 공로로 삼게 했다. 이순신은 진린에게 “장군은 명나라 대장으로 해적들을 무찌르기 위해 온 것이니 진중의 모든 승첩이 바로 장군의 승첩입니다. 우리가 베어 온 적의 머리를 전부 장군에게 드립니다. 장군이 여기 온 지 몇 날도 안 되어 황제에게 공을 아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하면서 녹도만호가 잡아 온 일본 전선 6척과 일본군의 머리 69개를 진린에게 모두 내주었다.

시의적절한 위협도 설득의 한 방법

그럼에도 지원군이었던 명나라 수군들의 횡포가 빈번하자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고자 의도적으로 조선 수군과 백성들을 명나라 진영에서 철수시키도록 명령해놓고 진린에게 말했다.
 
“귀국 군사들이 행패 부리고 약탈하는 것을 일삼기 때문에 우리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모두 피해 도망가려고 합니다. 대장인 나 혼자 여기에 남아 있은들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과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야겠습니다.”

이순신은 진린에게 한편으로는 문제점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협했다. 이에 깜짝 놀란 진린은 이순신에게 명나라 수군까지 통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 내주었다. 그러나 이순신과 진린의 우호적인 관계는 일본군의 철수가 시작되면서 다시 한번 갈등에 휩싸였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명나라군을 뇌물로 유혹해 전투 없이 철수하려고 시도했다. 도망가는 군대가 뇌물로 퇴로를 얻는 방법은 중국 고대 병법서인 《육도》에서 제시한 방법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나가는데 불필요한 전투로 자신이나 자신의 군사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진린은 고니시의 뇌물에 넘어가 일본군의 철수를 방관하려고 했고, 이순신에게도 강요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린에게 “대장으로는 화친을 말할 수 없고, 원수를 놓아 보낼 수 없다. 조각배 하나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며 진린의 방관책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순신은 침략자를 응징해 두 번 다시 침략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수차례의 격렬한 논쟁 속에서도 이순신은 진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거꾸로 진린을 설득했다. 그 결과 1597년 11월 노량에서 후퇴하는 일본군과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일본군과 최후의 대결전을 치룰 수 있었다.

마음으로 존경할 수 있게 설득하라

이순신이 진린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만날 때부터 간절한 말과 태도, 진심을 담아 정성을 보여 주었고, 이순신 자신부터 철저하게 원칙을 지키고, 설득력 있는 말, 열정과 역사의식으로 진린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자세와 행동이 바탕이 되었기에 이순신은 일본군은 물론 명나라 군대로 부터 조선의 백성과 군사들을 보호할 수 있었고, 남의 나라 전쟁이라 전투를 기피했던 명나라 군대까지도 목숨을 던져가며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한 뒤 진린은 선조에게 “통제사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經天緯地, 경천위지)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補天浴日, 보천욕일) 공이 있다”라고 말했다. 진린의 그 말은 진린이 마음으로 얼마나 이순신을 존경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계층과 계급, 이념으로 나뉘어 상대의 말은 들어볼 생각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강요만 하는 단절의 시대에 이순신의 설득방법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다.

※ 이 칼럼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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