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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하류 고대 교통로에 대한 검토 - 박종서"에서 
Ⅱ.백제의 한강하류 교통로와 그 변화 - 1.계양산성 방면" 내용을 가져왔습니다.

백제의 계양산성 방면 교통로와 그 변화
박정서 2013

Ⅱ. 백제의 한강하류 교통로와 그 변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백제는 고대 국가 형성기에 있어서 소국간의 관계, 중국과 교역이라는 큰 틀에서 소금과 철 같은 중요한 교역품을 생산하고 확보하기 위해서 왕성에서 가장 가까운 서해안 일대를 개척하였다. 또한 소금 생산의 증가와 원활한 수송을 위한 통로를 개척하는데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4)
 
따라서 이와 관련된 교통로를 확인하기 위해서 인천지역의 고대 산성을 살펴 본 결과, 인천지역에서 고대 산성으로 인식되어 온 산성은 계양산성(桂陽山城)과 문학산성(文鶴山城)이 있다. 본장에서는 계양산성과 문학산성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대한 대강의 윤곽을 확인하고자 한다.

1. 계양산성 방면

인천 계양산성은 2009년까지 4차 발굴조사가 실시된 바 있다.5) 계양산성은 한강하류지역과 김포, 인천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산성으로 중국으로 통하는 나루인 나진(羅津)-공촌동,검안동-허암산성-계양산성-까치고개-신정동토성-수로, 육로-한성(풍납토성)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상에 위치하고있다.

계양산 너머에 있는 공촌동, 검안동 지역은 고려 때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지역으로 고대의 소금산지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채취된 소금은 한성으로 운반되는 과정에 계양산 서쪽과 북구 계산동을 이어주는 통로인‘장명이고개(景明峴)’를 넘어야 한다. 이 장명이고개를 넘어 신정동토성에 이르게 된다.

신정동토성은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의 신트리 마을 야산에 토성으로 축조되어 있다. 신정동토성은 북쪽으로 한강과 연결될 뿐만아니라 동쪽으로 안양천과도 근접하고 있다. 따라서 신정동토성에 이르면 안양천과 한강을 따라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한성으로 통하기도 하며, 육로(陸路)로 한성까지 이르기도한다.6)

다음은 인천 계양산성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계양산성은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 2동 산10-1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0호이다. 계양산성은 계양산(395m) 정상에서 동쪽으로 뻗은 중봉(202m)에서 남동쪽방향으로능선을따라 산성이 형성되어있다. 

계양산성은 문학산성의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고대부터 인근의 소금산지와 한성을 연결하는 교역로상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한강 하류가 한눈에 조망되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인천의 북부지역은 물론이며, 한강 하류지역과 서울방면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따라서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한강유역의 경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나말여초를 비롯하여 고려시대까지 그 중요성이확인되고있는 지역이다.

최근에 계양산성에 대한 학술발굴조사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며, 학술적 자료를 축척하였으며, 특히 3차 발굴조사에서 제1집수정 Ⅶ층 바닥에서 연질의 원저단경호와 목간이 출토되어 학계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특히 발굴조사단은 AMS 측정 결과를 이용하여 계양산성의 축조시기를 A.D.400년 전후시기로비정하고있다.7)

2009년에는 북문 추정지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게 됨으로써 계양산성에 대한 4차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다. 4차 발굴조사 결과 계양산성에서는 처음으로 문지(북문지)가 확인되었고, 문지주변에서 각종 유구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주변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에서도 많은 유물과 유구가 출토되었다.

도면 1 한강하류지역 주요산성 위치도

고대의 산성은 일반적인 유적과 달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곳으로 단순히 공격과 방어를 위한 성곽 역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서 치소(治所)의 역할을하는매우중요한유적이다.

다음은 발굴조사에 대한 성과이다. 계양산성 4차 발굴조사에서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많은 고고학적 자료가 출토되었다. 북문지를 포함하는 유구 뿐만아니라 기와, 토기, 석제유물, 금속유물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먼저 기와에 대한 설명이다. 기와는 크게 명문기와(銘文)와 평기와, 막새로 나눌 수 있다.

명문기와는 100점 가까이 출토되었는데, 시굴갱의 적갈색 점토층에서 출토된 적색기와에 직접 새긴 
 등의 음각 기호 명문이 확인되었다. 기타 일부 기와에서도 
 
명문이 확인되고 있다. 명문의 내용이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명문기와의 등문양은 종선문, 격자문, 사격자문 등으로 세분될 수 있으나 주로 선문계통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명문기와의 측면은 와도로 한번에 분할한 것, 2~3회 정면한 것 등이며, 내면에는모골(통쪽)흔이 나타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속성들을 바탕으로 적갈색 점토층에서 출토된 명문기와들은 계양산성에서 출토된 기와 중승문기와와 함께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시기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한 후 통일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다른 명문기와들은‘主夫吐’와 관련된 것들로 수십여 점에 달한다. 이들은‘主’, ‘主夫’, ‘主夫十夫口大(?)’, ‘口十夫口’, ‘主夫十夫(?)’등이다. 그 외에‘月’, ‘官’, ‘草’‘凡草’, ‘天(?)’등의 명문이 출토되었다. 이들 명문기와들은 주로 어골문과 집선문, 복합문 기와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主夫吐’관련 기와의 측면 분할 흔적은 한쪽이 내면에서 외면으로, 다른 한쪽은 외면에서 내면으로 교차분할 하였다. 이는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특징으로 파악되어8) 명문기와의 편년 설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후술하겠지만, 계양산성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6세기 중엽 신라의 진출이후에도 계속적으로 활용된 거점성이다. 앞으로 학술조사가 이루어져 계양산성에 대한 학문적인 성과가 달성되기를 기대해본다.

도면 2 한강하류지역 중요유적 위치도 
 


주석

4) 필자는 이도학의 견해를 수용하였다. 이런견해는 다음 문헌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도학, 1992, 「伯濟國의 성장과 소금 交易網의 확보」, 『백제연구』23; 이도학, 1997,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사; 이도학, 1997,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國史館論叢』제74집.
 
또한 필자는 2009년에 [인천 계양산성]에 대한 4차 발굴조사를 실시한 조사자로서 계양산성의 고고학적 성과를 활용하여 보다 진전된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본문에서 언급하겠지만, 계양산성과 문학산성의 지리적, 역할적인 위치는 분명차이가 있다. 
 
그 차이로 인해서 계양산성 방면인 북로(北路)는 소금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인 교통로로 사용되었으며, 문학산성의 남로(南路)는 계양산성의 남쪽에 위치하므로 고구려의 공격에서 보다 안전함을 보장받기 때문에 대중국교섭로로 사용되었다. 6세기 이후 신라의 진출과정에서 계양산성은 거점성으로 역할하였으나, 문학산성은 활용 가치가 적어지게 되는 것으로사료된다.

5)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 2001, 『계양산성일대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鮮文大學校 考古硏究所, 2008, 『桂陽山城』.
겨레문화유산연구원, 2011, 『계양산성Ⅱ』.

6) 이도학, 1992, 앞 논문, 11~14쪽; 이도학, 앞 책, 1997, 153~164쪽; 이도학, 앞 논문, 1997, 165~168쪽.

7)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 2008, 앞 책, 262~280쪽.

8) 최맹식, 2002, 「統一新羅 평기와연구」, 『호서고고학회 6₩7합집』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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