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30&fileName=kn_074_0030.pdf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Ⅳ.고구려의 성장과 교통로 -  1.만주 지역 내륙 교통로의 개척"을 가져왔습니다.

고구려 만주 지역 내륙 교통로의 개척
이도학 1997년
 
고구려의 발상지인 동가강 유역과 압록강 중류 지역은 높은 산과 계곡이 많고, 평야는 계곡을 따라 흐르는 하천(河川)가에 좁게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지리적으로 볼 때 고구려는 요동에서 신의주를 지나 평양에서 함흥 방면으로 이어지는 고대 교통로의 중간지대에 자리잡았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는 압록강 하류쪽으로 해서 서해안에 이르며, 청천강 상류 방면으로 해서는 평양 방면으로 나갈 수 있고, 북으로는 압록강을 거슬러 송화강 유역과 통할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지리적 조건은 정복활동과 팽창에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46)

고구려의 첫 왕성인 홀승골성은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에 소재한 해발 820m의 오녀산에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을 축(軸)으로 하여 서남쪽으로 환인 및 그 남쪽 지역과 연결하는 교통로와 동남쪽으로 오늘의 집안과 연결하는 교통로가, 서쪽으로는 오늘날 심양 및 그 서쪽의 요서 지역과 연결하는 교통로가, 북쪽으로는 부여로 통하는 교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47) 이러한 교통로는 우선 고구려를 구성하는 5부(部) 가운데 왕실의 소속부(所屬部)인 계루부를 중심으로 나머지 4개부(個部)로 뻗어나가고 있는 도로를 근간(根幹)으로 하여 사방으로 확대되어 나간 것이라고 하겠다. 고구려는 A.D.3년에 지금의 집안인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에는 정복사업이 크게 활기를 띠면서, 이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는 교통로 또한 간단없이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강력한 연맹왕국 체제를 확립한 태조왕대를48) 거쳐 고국천왕대까지 확립된 고구려의 교통로는 다음과 같이 짐작된다. 즉, 지금의 집안에 소재한 국내성을 기준으로 할 때, 북쪽은 통화에서 매하구(梅河口)를 지나 북상하는 북부여와의 교통로가 확보되어 있었다. 고구려 초기 기사에 등장하는 북부여로는, 북부여와의 전투와 관련한 군사 이동로로서 눈에 띄고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는 압록강을 건너 강계에서 낭림산맥에 소재한 아득령을 넘어 장진강과 부전강의 계곡을 지나 황초령을 넘어 함흥평야로 이어지는49) 동옥저로를 확보하였다. 아득령은 '후한서' 예조(濊條)에 기재된 단단대령(單單大嶺)이자 조선조 문헌에 설한령(薛罕嶺)으로 전하는 강계에서 함흥을 연결하는 웅관(雄關)이었다.50) 동쪽으로는 지금의 혼강시를 지나 무송과 고동하(古洞河) 연변을 따라 안도․연길과 훈춘으로 이어지는 북옥저로가 있었다. 서쪽으로는 현도군이 소재한 무순과, 요동군 치소인 요양을 잇는 교통로와 지금의 북경 근방인 어양․상곡․우북평까지 이어지는 군사로가 개척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이러한 교통로 가운데 우선 북옥저 방면으로의 개척에 주력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즉, 태백산 동남 방향에 소재한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고 있다.51) 태백산이 지금의 백두산이므로 그 위치의 대략을 짐작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한 선상에서 북옥저 멸망 기사를 접할 수 있다.52) 이는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고구려가 영토확장 과정에서 북옥저 방면으로의 진출에 무게를 두었음을 시사해 준다. 북옥저는 지금의 훈춘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 하류 일대에 소재하고 있었다. 이곳은 3세기 후반 이후 동부여가 자리잡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53)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출신지를 동부여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고구려 조정과 북옥저 방면과의 어떤 친연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다만, 고구려가 북옥저 방면을 개척하였던 실제 이유는 소금과 해산물의 공급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주몽왕대의 고구려가 현실적으로 훈춘 지역을 정복한다는 것은 거의 가망이 없는 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북옥저로를 통하여 앞서와 같은 물품을 공급받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보겠다. 고구려가 해산물을 얻기 위해서는 동옥저 방면으로의 진출을 설정해 볼 수 있지만, 낙랑군의 강한 통제하에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염두에 두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가 217년에 한(漢)의 평주인(平州人)들을 지금의 훈춘시에 소재한 책성(柵城)으로 거주시킨54) 사실은 그보다 무려 1세기 전(前)인 102년에 태조왕이 책성(柵城)을 안무(安撫)한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5) 북옥저로에 대한 개척이 완비되었음을 의미해 준다.

고구려는 집안에서 통화를 지나 유하와 매하구를 지나 동북편의 길림시로 이어지는 북부여로를 통해서는 북부여를 압박해 가면서 북으로의 영토확장을 시도하였다. 대무신왕대 고구려와 북부여의 전투가 그것을 말한다. 고구려 군대는 비류수(沸流水)와 이물림(利勿林)을 거쳐 부여 남쪽의 진흙뻘 지대에 도착했다고 하는데56) 비류수는 혼강(渾江)에, 이물림은 용강산맨(龍崗山脈)으로 비정되고 있다.57)

고구려는 동옥저로를 이용하여 동해를 끼고 있는 함흥평야 방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맥포(貊布)․어염(魚鹽)과 해중식물(海中植物)을 비롯한 해산물을 공급받는 게 가능해졌다.58) “동해인 고주리가 경어목(鯨魚目)을 헌상하였는데, 밤에도 광채가 났다”59)는 것이나 “동해곡수(東海谷守)가 주표(朱豹)를 헌상하였는데, 꼬리 길이가 9자였다”60)라는 기사가 그것을 말하여준다. 또, 동옥저로부터 미인(美人)을 징발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을 정도로61) 그들에 대한 지배가 심화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동해인(東海人)이 미녀(美女)를 바치니 왕이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62)라고 한데서 확인되는데, 지금까지 언급된 ‘동해(東海)’는 다름 아닌 동옥저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63)

그러면 같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동해(南海)’는 어디일까? 이에 관하여 “왕이 남해(南海)로 순수(巡狩)하였다”64)라고 하여 보인다. 같은 왕 본기에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토지를 취하여 성읍을 삼았다. 영토를 개척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에 남으로는 보수(薩水)에 이르렀다”65) 라는 기사를 볼 때, 동해(東海)가 동옥저 방면의 바다를 가리킴이 재삼 확인된다. 동시에 ‘남해(南海)’라고 가리킬 수 있는 곳은 살수인 청천강이 흘러들어 가는 서한만 일대라고 보겠다. 이는 장수왕대의 영역을 기록하고 있는 '위서(魏書)'에서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남지소해(南至小海)”6)라고 하였는데, 소해(小海)는 한반도 남해(南端)가 아니라 지금의 경기만 혹은 아산만에 접한 바다를 가리키는 데서 방증되어진다.

북옥저로는 중간에 도문에서 지금의 목단강시 방면으로 나가는 읍루로로 갈려지게 된다. 고구려는 이 통로를 이용하여 읍루에 압박을 가하여 “숙신 사신이 와서 자색(紫色) 여우 갖옷과 흰매와 흰말을 바치니 왕이 잔치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여 보냈다”67)라고 하는 기사를 남기게 하였을 뿐 아니라, 군대를 출동시켜 격파하기도 하였다.68) 459년에 고구려 사신이 통역(通譯)을 함으로써 숙신 사신이 유송(劉宋)에 호시(楉矢)와 석노(石砮)를 바쳤던69) 데서 알 수 있듯이, 읍루로는 5세기대 이후까지도 고구려의 장악하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서쪽인 요동 방면으로의 교통로 개척이 되겠다. 고구려는 북옥저로를 장악한 후에 서쪽 교통로의 개척에 진력한 것으로 보이는데,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치는 한편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고 있다.70) 양맥은 태자하 상류의 맥족이나71) 부이강 유역의 맥족을 가리키는72)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분명한 것은 이 고구려현은 제2현도군에 예속된 지역인 만큼, 소자하 유역인 흥경․노성 방면에 소재하였고, 그 전방에 양맥이 자리 잡았다고 보겠다. 그러면 고구려가 양맥을 격파하고 고구려현을 점령하면서 장악한 교통로는 어떠한 것인가?

고구려에는 요동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가 2개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다음의 기사가 그것이다.

겨울 10월에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용성(龍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立威將軍) 한(翰)이 황(皝)에게 청하기를 먼저 고구려를 취(取)한 연후에 우문(宇文)을 멸해야만 중원(中原)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고구려에로는 두 길이 있었는데 그 북도(北道)는 평탄하고 넓었으며 남도(南道)는 험하고 좁았기 때문에 군사들이 북도(北道)로 가려고 하였다. 

한(翰)이 말하기를 “적(敵)들이 상식으로 헤아린다면 반드시 대군이 북도(北道)로 오리라고 하여 마땅히 북쪽에 치중하고 남쪽을 가볍게 여길 것이니 왕은 마땅히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로 나가서 그들을 치면 뜻하지 않은 때에 나가게 되는지라 북도(北道)는 족히 취(取)할 것도 못된다. 별도로 소부대를 북도(北道)로 나아가게 하면 설령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사지(四肢)는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하니 황(皝)이 그 말을 좇았다.

1월에 황(皝)이 친히 강병(强兵) 4만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로 나와서 모용한(慕容翰)과 모용패(慕容覇)로 선봉을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을 보내어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 침입하였다. 왕이 아우 무(武)를 시켜 정예 부대 5만을 거느려 북도(北道)를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방비하고 있었다. 이때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황(皝)이 대군으로써 이어오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베니 제군(諸軍)이 이긴 것을 타서 드디어 환도성으로 들어 왔다. 왕이 단기(單騎)로 단웅곡(斷熊谷)으로 달아나 들어가니 (연/燕 나라) 장군 모여니(慕輿埿)가 뒤미쳐 쫓아오면서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붙잡아 돌아갔다. 이때 왕우(王寓) 등은 북도(北道)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몰(敗沒)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황(皝)은 더 추격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이 나가지 않았다…73)

즉, 남북도(南北道)가 있었다는 것인데, 남도는 험하고 좁은데 비해 북도는 평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도의 노정(路程)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74), 양 도로(兩 道路)의 종착점이 집안인 만큼, 집안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통해서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그것을 구명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 곧 집안으로 들어오는 요충지인 관마장과 망파령에는 차단성(遮斷城)이 설치되어 있다. 관마장 차단성은 집안에서 서북쪽으로 65㎞ 떨어진 산골짜기에 소재한 목선두산과 약황정자산 사이에 생긴 좁고 험한 골짜기에는 집안과 그 남쪽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가 나 있다. 관마장 차단성은 이 골짜기에서 가장 좁은 남쪽과 북쪽 길목 목선두 골짜기 어귀에 각각 하나씩 쌓았다. 망파령 차단성은 집안 쌍차에서 서북쪽으로 10㎞ 떨어진 곳에 소재하였는데, 신개하 연안에서 가장 험준한 망파령 마루에 축조되어 있다.75) 요컨대 관마장과 망파령의 차단성은 수도의 입구를 방비하는 중요한 관방시설인데, 이들 고개를 따라 교통로가 나 있는데, 혼하→소자하→부이강→혼강→신개하(新開河)로 이어지는 남도(南道)와, 혼하 상류→유하(柳河)→휘발하(輝發河)→혼강(渾江)→위사하(葦沙河)로 이어지는 북도(北道) 통로(通路)를 설정한 퉁달(佟達)의 견해가76) 현재로서는 가장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한편 광개토왕릉비문 영락(永樂) 5년조(年條)에 의하면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인과양평도 동래△성 역성 북풍)”77)라고 하였는데, 광개토왕은 대흥안령산맥 부근 혹은 시라무렌강 유역에 거주하는 비려(稗麗)를 정벌한 후 회군(回軍)할 때 지금의 요양(遼陽)으로 이어지는 양평도(襄平道)를 이용하여 남하(南下)하다가, 평탄(平坦)하므로 노획한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몰고 가기에 편리한 북도(北道)로 방향을 잡았다고 판단되므로, 지금의 심양에서 동쪽으로 꺾어져 이동(移動)․회군(回軍)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대원(太原) 등지를 습격하고 있는데78) 이들 지역은 지금의 북경 근방이 되겠는데, 그 출발 지점을 현도군이 소재한 무순의 동북쪽으로 잡는다고 하더라도 왕복 6~7천리에 해당하는 대원정이 된다.79)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고구려 군대는 이곳까지 진출할 수 있었을까? 기동력을 수반하는 기병 부대가 아니고서는 어렵다고 판단되는 만큼, 이들이 이용한 교통로는 험로(險路)는 아니었다고 보이지만, 현재로서는 그 진출로를 구명하는 게 용이하지 않다. 이는 그로부터 5년 후 요서(遼西)에 10개 성을 축조하여 중원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던80) 문제와 상호 연계된 사안으로서, 요동과 요서에 이르는 기병부대의 통과가 가능할 정도의 넓은 교통로가 개척되었음을 의미해 준다.

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관련하여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서안평(西安平) 공격이 되겠다. 서안평은 신의주와 요동반도를 연결짓는 통로인 지금의 요녕성 단동(丹東)이다.81) 이곳은 낙랑군의 치소인 평양 지역에서 청천강을 지나 중국대륙과 연결되는 유일한 육상통로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서안평을 장악하여 낙랑군과 중국대륙과의 육상교섭을 차단시켜 고립시키려고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 태조왕 때의 남쪽 경계가 지금의 청천강을 가리키는 살수였던 만큼82) 육로는 이미 청천강 하류까지 장악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낙랑군은 선박을 이용하여 대동강에서 압록강 하구의 단동에 이르는 코스를 이용하여 요동․현도군과 교섭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곳은 낙랑군과 요양의 요동군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이곳을 차단할 목적으로 서안평을 공격한 것으로 보겠다. 게다가 고구려가 서안평을 점령하게 된다면 압록강을 온전하게 이용하여 집안에서 출발한 고구려 선박이 황해를 누빌 수 있게 되어 낙랑군을 직접 위협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고구려는 242년에 서안평을 공격하였고, 311년에는 이곳을 점령하였다. 서안평을 점령한지 2~3년 후에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각각 점령하여 이들 군(郡)을 한반도에서 축출할 수 있었다.

427년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에 고구려는, 요동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확대시키는 한편 그와 관련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7세기에 접어들어 고구려와 수(隋)․당(唐)과의 전쟁 과정을 통해 새로운 교통로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현도성→백암성→봉황성→압록강 하구 통로, 신성→남소성→목저성→창암성으로 나왔다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통로, 비사성→건안성(혹은 요동성→안시성)→오골성→봉황성→압록강 하류로 통하는 3개의 교통로를 제시할 수 있다. 압록강 하류로부터 평양성 사이에는 2개의 통로가 연결되어 있다. 즉, 의주→선천→곽산을 연결하는 통로와, 구련성→창성→구성→태천을 연결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평양성 중심의 고구려 종심 방어체계는 압록강 이북에서는 여러 갈래로, 압록강 이남에서는 대체로 두 갈래로 형성되었다.83)
 

주석

46) 盧泰敦, 고구려의 성립과 변천 (韓國古代史論, 1988) p.32.
47) 장국종, 고구려에서의 도로 발전 (력사과학 1985-2), p.1.
48) 盧泰敦, 고구려의 성립과 변천 (韓國古代史論, 1988) p.32, pp.35~36.
49) 南相駿, 古代韓國의 人口移動에 관한 硏究 (地理學 32, 1985) p.42.
50) 이에 관해서는 金侖禹, 蓋馬大山과 單單大嶺에 관한 고찰 (民族文化 18, 1995, p.150~197)
참조 바람.
51) 三國史記 권13, 朱蒙王 6年條.
52) 三國史記 권13, 朱蒙王 10年條.
53) 李道學, 方位名 夫餘國의 成立에 관한 檢討 (白山學報 38, 1991) pp.9~1.
54) 三國史記 권16, 山上王 21年條.
55) 三國史記 권15, 太祖王 50年條.
56) 三國史記 권14, 大武神王 5年條.
57) 余昊奎, 앞의 논문, p.17.
58)  三國志 권30, 東沃沮 條.
59) 三國史記 권14, 閔中王 4年條.
60) 三國史記 권15, 太祖王 5年條.
61) 三國志 권30, 東沃沮 條.
62) 三國史記 권17, 東川王 19年條.
63) 북옥저니 동옥저니 하는 호칭은 낙랑군을 기준으로 한 方位라고 보여진다. 한편 余昊奎는 三國史記에 보이는 ‘東海’는 북옥저 방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南海’는 동옥저 방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하였다(余昊奎,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 (韓國史硏究 91, 1995), pp.27~28).
64) 三國史記 권15, 太祖王 62年條.
65) 三國史記 권15, 太祖王 4年條.
66) 魏書 권10, 高句麗 條.
67) 三國史記 권15, 太祖王 69年條.
68) 三國史記 권17, 西川王 1年條.
69) 宋書 권29, 志 第19, 符瑞下.
70) 三國史記 권13, 琉璃王 3年條.
71) 余昊奎,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 (韓國史硏究 91, 1995), p.13.
72) 李丙燾, 國譯 三國史記(1976) p.27
73) 三國史記 권18, 故國原王 12年條.
74) 余昊奎,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 (韓國史硏究 91, 1995), p.5를 參照하기 바란다.
75) 고구려문화(1975) pp.3~34.
76)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 (博物館硏究 3집, 1993) pp.34~38.
이 견해는 余昊奎에 의해 치밀하게 보완․발전되어 설득력을 더 해준다.
77) 韓國古代社會硏究所,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p.9.
78) 三國史記 권14, 慕本王 2年條.
79) 손영종, 고구려사 (1990) p.95.
80) 三國史記 권15, 慕本王 3年條.
81) 曹迅, 靉河尖古城和漢安平瓦當 (考古 1980-6) pp.56~567.
82) 고구려의 남쪽 경계인 살수를 집안과 만포로 해서 남하하는 통로인 희천 방면, 즉 살수 상류방면까지로 설정해 볼 수도 있다.
83) 박창수, 고구려의 성 분포와 서북 방어체계 (력사과학론문집 15, 1990) pp.253~25.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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