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8-4hag.htm 


4부학당 (四部學堂)

사학(四學)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개경(開京)과 조선시대에는 한성(漢城)의 각 부(部)에 두었는데, 당시 모든 제도는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었으나, 이 제도는 중국에도 없던 것을 고려 말 유학(儒學) 진흥의 현실적 요청에 따라 설치하여 조선에 내려와 발전을 본 관학(官學)으로, 지방의 향교(鄕校)와 달리 문선왕묘(文宣王廟)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처음에는 1261년(원종 2)에 동 ·서부에 학당을 설치하여 별감(別監)을 두고 가르치다가, 뒤에 유교가 불교보다 승하여 사상계를 지배하게 되자 고려말 문익점과 정몽주는 부마다 학당을 두는 5부학당제를 건의했다. 그결과 1390년(공양왕 2) 개경의 각 부에 학당을 설치하여 5부학당을 설립했으며, 다음해에는 사립학교인 12공도를 혁파했다.

조선에 들어와서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두어 서울을 동 ·서 ·중 ·남 ·북의 5부로 나누어 여기에 학교를 각각 하나씩 설치하기로 하여 5부학당[五學]이라고 하였으나, 북부학당은 경복궁 때문에 끝내 설치하지 못하고 1445년(세종 27)에 폐지되어, 동학(東學) ·서학(西學) ·중학(中學) ·남학(南學) 등 4부학당만이 존속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사(學舍)가 없어서 대부분은 사원(寺院)을 이용하였으나, 1410년(태종10) 성명방(誠明坊)에 남부학당이 설치됨을 계기로 이후 나머지 학당도 모두 건물을 갖게 되었다. 즉, 1411년(태종 11)에 남부학당 건물을 완성했다. 중부학당 건물은 1432년(세종 4) 관광방(觀光坊:지금의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서부학당은 1435년 서부 여경방(餘慶坊:지금의 종로구 광화문)에 건립했다. 동부학당 학사는 건립연대를 알 수 없는데, 1438년 동부학당 사옥을 북평관(北平館)으로 바꾸고 학당은 동부 창선방(彰善坊: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의 우유소(牛乳所) 건물을 사용했다.

학당은 재사(齋舍:기숙사)제도를 마련, 그 운영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였다. 국가에서는 학생의 교육을 위해 학전(學田) ·노비(奴婢) ·잡물(雜物) 등을 사급(賜給)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북 연안에 있는 여러 섬들의 어장(漁場)을 주어 그 세(稅)로써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학당의 학제는 1411년 예조참의 허조(許稠)의 건의로 마련했다. 이후 약간의 변동이 있으나 이때의 안이 기본이 되었다. 교원은 학당마다 종6품 교수 2명, 종9품 훈도 2명이며, 정6품직인 성균관의 전적(典籍) 이하 관원이 겸직했으나 뒤에는 각 1명씩을 감하는 대신 겸직을 없앴다. 그리고 예조(禮曹)와 사헌부(司憲府)에서 학당의 수업상태를 항상 감독하였다. 정원은 학당마다 100명이었다. 이곳에 입학한 사람은 서울에 사는 세가양반자제(勢家兩班子弟)로서, 8세가 되면 입학 자격을 주어 소학(小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우고, 15세가 되어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하면 성균관기재(成均館寄齋)에 입학하게 된다. 이것은 커다란 특전으로 기재생은 성균관 상재생(上齋生)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학당에서는 5일마다 시험을 치르고, 예조에서는 달마다 시험을 쳐서 1년의 성적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사학의 유생(儒生)은 15일은 제술(製述), 15일은 경사(經史)를 강독(講讀)하여 우수한 사람 5명을 뽑아 생원(生員) ·진사(進士) 시험[小科]에 직접 응시[直赴]하게 하였으며, 매년 실시되는 유월도회(六月都會)의 우등자도 1, 2명은 생원 ·진사의 회시(會試:覆試)에 직접 응시하게 하였고, 또한 사학 유생에게는 원점(圓點)에 따라 알성시(謁聖試)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성균관 유생과 함께 유교사상을 지키기 위하여 소행(疏行) ·권당(捲堂) 등의 학생운동을 하는 수도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새로 진출한 사림(士林)을 도와 훈구(勳舊) 관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사상적으로 대립되는 불승(佛僧)과 산사(山寺)에서 격투를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때마다 이들에 대한 처벌 논의가 있었지만 그 벌은 가벼웠고, 도리어 이를 가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 학당이 불타서 다시 건물을 지은 뒤에는 학생수가 격감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한말에는 이들 관학이 부진하여 외국인에 의해 사학(私學)이 세워졌을 때 학교 이름에 학당을 붙여 배재학당 등으로 불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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