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52N5Ed (문서파일)
* "박물관역사문화교실 ⑧ 구지가(龜旨歌)가 말하는 가야사 - 이영식"에서 "4. 가야사의 전개" 에서 "3) 후기가야後期加耶 - 영역국가로의 발전 -  ④ 가야의 피라미드 - 순장내용만 가져오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가야와 순장과 권력 

순장을 아십니까

가야의 피라미드 고령 지산동44호분에는  중앙에 주인공의 대형석실이 자리하고,  그 둘레에는 순장자를 위한 많은 소형석실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순장(殉葬)이란  생전에 주인공을 모시던 사람들이 따라 죽어 함께 매장되는 것을 말합니다. 중앙 석실에서도 주인공의 발 아래쪽에 함께 묻혔던 순장인골이 확인되었고, 둘러싸고 있는 32기의 석실들은 순장자와 부장품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습니다. 순장자들을 매장하기 위한 석실을 순장곽이라 부릅니다. 순장곽 하나에는 대개 3~5인이 순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32기에 3~5명을 곱하면, 모두 96∼16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주인공을 따라 매장되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여기에 주인공의 석실에 순장된 숫자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수가 되어야 하지만, 발굴조사자들은 60여 명을 약간 넘는 숫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주인공을 따라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이 돌아가셨다”,  “생전에 왕을 모시던 사람들은 은혜에 감사하며 따라 죽어야 한다”, “왕은 저 세상에 가서도 이들의 시중을 받으며 생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가야인들의 상식이었고,  그러한 상식은 대가야 왕의 초월적인 정치권력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44호분은 5세기 중•후반 경의 고분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5세기 중•후반의 대가야 왕은 바로 우륵(于勒)에게 가야금 12곡을 작곡시켰던 가실왕(嘉實王)이었습니다.  가야금 12곡에 얽힌 사연은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만, 가야금 12곡도 서부경남일대를  석권했던 대가야 왕의 정치적 위세를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물론 44호분의 주인공을 결정적으로 밝혀줄 문자기록이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연구자들끼리는 “가실왕이 틀림없을 껄”이라고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석실을 방사선형으로 둘러싼 소형 석실들에는 가실왕을 모시던 여러 신하들이 순장되었던 겁니다.

순장과 권력  

그런데 32기의 순장곽들에 부장된 유물이나 인골들에서는 몇 가지 특징적인 사실들이 발견됩니다.  세 사람이 포개져 있었는가 하면, 남녀 어린이가 머리를 마주 대고 눕혀졌던 방도 있었습니다.  말갖춤새들이 나오는 석실에는 전용차 운전수쯤 되는 말잡이가 순장되었을 것이고, 철제 투구와 무기만 나오는 석실에는 왕의 호위무사쯤이 순장되었을 것이고, 닭 뼈․생선 뼈․바다고둥과 같은 음식물이 주로 있는 방에는 왕의 식사를 책임지던 ‘가야의 대장금’같은 인물이 순장되었을 겁니다. 예쁜 금 귀걸이가 나오는 석실에는 왕을 모시는 아리따운 여인도 있었을 거고, 옷감 같은 많은 섬유질이 확인되는  방에는 왕에게 의복을 제공하던 사람들이 순장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특징들은 사후에도 왕의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내세관(來世觀)과 함께, 왕이 돌아갔다고 6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강제로 잡아 죽였던 대가야 왕권의 무자비한 통치력을 보여줍니다.

한편 '삼국사기' 직관지는 신라 조정에 각각의 업무를 관장하는  전문부서가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임무나 병기의 종류에 따라 편성된 각종 부대(幢), 신발을 만드는 화전(靴典), 기와를 만드는 와전(瓦典), 직물을 염색하는 염궁(染宮),  식사를 담당하던 육전(肉洗) 등이 보이고 있습니다.  대가야가 고대국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5세기 후반경 대가야 왕의 휘하에는 여러 전문  집단이 국가기구처럼 조직되어가고 있었음은 주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의 순장은 사회발전의 후진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람을 순장시키고 엄청난 무덤을 만들어 왕의 권력을 과시하고 왕권의 유지를 보장받으려는 사회는 저급한 단계입니다.  율령(律令)이란 법질서에 의해 통치되고 왕권이 계승될 수 있는 고대국가 사회에는 도달하지 못한 단계입니다.  신라 지증왕 3년(502년)이 되면 순장은 법으로 금지됩니다.  물론 이때 신라사회의 순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라 왕권은 더 이상 거대한 고분이나 생사람 잡는 순장을 통해 통치자의 위엄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에 접어들게 되지만, 대가야는 아직 아닙니다.

대가야에도 연줄이?

고령 지산동 44호분의 주인공을 둘러싼 32기의 순장곽 중에는 인골은 물론 한 점의 유물도 나오지 않은 것이 5기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빌 허虛  자 허장(虛葬)이라  부릅니다.  계획도 하고 시설도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사람도 부장품도 전혀 매장되지 않았던 무덤입니다.  반면에 이러한 허장은 가야시대에도 연줄(?)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의외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왕이 돌아가자 순장자 리스트가 작성되었고,  그에 따라 순장곽도 설치했지만,  순장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44호분의 왕을 계승한 새로운 왕과 가까운 사람들이 연줄을 대어 순장자 리스트,  즉 살생부(殺生賦)에서  빠졌던 결과였을 겁니다. 1,500년 이전의 가야사회에도 국왕의 명령까지 바꿀 수 있었던 연줄이 통했던 모양입니다. 현대의 우리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대가야 사회의 끈적거리는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뒷맛이 씁쓸한 것도 사실입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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