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5444

며느리 죽인 시아버지, 왜 그랬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세 번째 이야기
12.04.26 18:34 l 최종 업데이트 12.05.02 16:10 l 김종성(qqqkim2000)

▲  <옥탑방 왕세자>의 왕세자 이각(박유천 분). ⓒ SBS

SBS 수목드라마 <옥탑방 왕세자>는 세자빈 사망사건을 축으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세자빈 화용(정유미 분)이 어느 날 갑자기 궁궐 연못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고사로 처리됐지만, 남편인 왕세자 이각(박유천 분)은 살인사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각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단독 재수사를 강행했고, 이 과정에서 자객들의 추격을 받다가 절벽에서 추락했다. 그렇게 추락한 그가, 대한민국 서울의 어느 옥탑방에서 환생하게 된 것이다. 세자빈 의문사가 이각의 환생을 초래한 것이다.

구체적 상황은 다르지만, 조선시대에 실제로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세자빈 사망사건이 있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임금의 며느리이자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민회빈 강씨)이 그 주인공이다. 고려 때 귀주대첩에서 거란족 군대를 격파한 강감찬이 그의 조상이다.  

인조는 왜 며느리 강빈에게 사약을 내렸을까?

<옥탑방 왕세자>의 경우 세자빈의 사망 원인이 불명확했지만, 강빈 사건의 경우에는 사망 원인이 명확했다. 시아버지가 내린 사약을 먹고 강빈이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조가 사약을 내린 근거가 불명확했다. 별다른 명분이나 증거도 없이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두고두고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강빈의 불행은 소현세자의 불행으로부터 시작됐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에 패한 뒤 아버지 인조와 함께 삼전도(서울시 송파구 석촌호수)에서 굴욕의 항복의식을 올린 인물이다. 

그 뒤 소현세자는 동생인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때가 1637년이었다. 강빈도 남편과 동행했다. 강빈은 스물일곱, 소현세자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소현세자는 인질답지 않게 청나라 생활에 너무나 잘 적응했다. 그는 새로운 것들을 열심히 배웠을 뿐만 아니라 조선-청나라 외교현안까지 잘 처리하여 청나라 집권층의 신뢰를 얻었다. 청나라 황제의 사냥에도 동행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이 됐다. 

아들의 소식은 아버지에게 위협을 주었다. 인조는 지난날 몽골 황실의 사위가 된 고려 왕세자 왕장(훗날 충선왕)이 몽골의 지지를 바탕으로 아버지 충렬왕을 밀어내고 왕이 된 사례를 떠올렸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는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아들의 동태를 보고하도록 했다. 일종의 불법사찰을 한 셈이다. 

아들의 귀국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던 인조


▲  세자빈 화용(정유미 분). ⓒ SBS

1645년, 강빈과 소현세자는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했다. 강빈은 서른다섯, 소현세자는 서른네 살이었다. 이들의 귀국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인조가 냉랭하게 대했던 것이다. 

인조는 8년 만에 만난 아들 부부가 반갑기보다는 '내가 제2의 충렬왕이 될지 모른다'며 경계했다. 남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전력이 있는지라, 그는 자신도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부자간에 냉기가 도는 가운데, 소현세자는 귀국 2개월 만에 갑작스레 목숨을 잃었다. 어의는 학질에 의한 사망으로 진단했지만, 사실은 약물중독으로 죽은 것 같았다고 인조 23년 6월 27일자(1645년 7월 20일) <인조실록>은 말한다. 소현세자의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피가 철철 흘렀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불행은 처자식의 불행으로 이어졌다. 인조는 가장을 잃은 소현세자 가족에게 동정을 베풀지 않았다. 세자가 죽었으므로 원손(세자의 장남)인 이석철이 후계자가 되는 게 마땅했지만, 인조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차남인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소현세자의 장남이 후계자 자리를 빼앗긴 데 이어, 부인인 강빈 쪽에도 불똥이 튀었다. 시아버지인 인조를 저주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증거는 불충분했지만, 이로 인해 강빈의 친정 형제들이 유배를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빈과 인조의 관계는 한층 더 냉랭해졌다. 강빈이 시아버지에 대한 문안 인사를 거부할 정도였다.  

유배지로 쫓겨난 손자 3명... 그리고 의문의 죽음

이런 상태에서 인조 24년 1월 3일(1646년 2월 18일), 강빈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인조가 받은 수라상에는 전복구이가 올라와 있었다. 전복을 먹던 인조는 갑작스레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그는 음식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조사 결과, 전복구이에서 독이 검출됐다. 인조는 곧바로 강빈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인조실록>의 사관(史官)조차도 터무니없는 사건이라고 비판했다. 강빈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인조는 강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물증도 없이 며느리를 죽였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 후, 인조는 세 명의 손자를 제주도로 쫓아냈다. 그중 둘은 유배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강빈과 소현세자 3부자의 죽음을 발판으로 최대 이익을 본 인물은 봉림대군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뜻하지 않게 세자가 된 봉림대군은, 형수와 조카들의 죽음 덕분에 정치적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인조 사망 후에도 계속 이슈가 된 강빈의 죽음


▲  강빈의 무덤인 영회원.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소재. ⓒ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

세자빈 강빈의 사망사건은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됐다. 사약을 마시고 죽었으므로 사망 원인 자체는 문제가 안 됐지만, 강빈이 죽어야 할 근거가 불명확했기에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이 문제는, 사약을 내린 인조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정치 이슈가 됐다. 이것은 인조의 후계자인 효종의 정치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효종이 형과 형수와 조카들의 죽음을 딛고 왕이 됐기 때문이다.  

소현세자가 죽은 직후에 대신들은 거의 다 이석철을 지지했다. 이석철이 합법적인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다. 효종은 합법적인 왕위계승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효종은 취약한 정통성을 안고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고자 효종은 국방력 증강이라는 국정과제를 내세웠다. 이 사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효종은 과도하리만치 왕권강화에 집착했다. 정통성 콤플렉스가 이런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효종의 군사력 증강사업은 세금 인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기득권층의 반발을 초래했다. 그래서 효종은 집권당인 서인당(총재 송시열)과 마찰을 빚지 않을 수 없었다. 

효종과 마찰을 빚을 때마다 서인당이 내세운 이슈가 바로 강빈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은 툭하면 재수사를 촉구했다. 강빈이 정당한 이유로 죽었는지 재조사하자고 한 것이다. 

두고두고 효종을 괴롭힌 강빈의 죽음

효종은 강빈과 그 가족이 당한 억울한 죽음을 발판으로 왕이 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사망 경위가 자꾸 거론되는 것이 그에게는 두렵고도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효종이 얼마나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황해도 관찰사 김홍욱에 대한 조치에서 잘 나타난다. 김홍욱이 강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상소를 올리자, 효종은 곤장을 쳐서 그를 죽여 버렸다. 누구든지 강빈 문제를 입에 담으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죽은 강빈은 이렇게 두고두고 효종을 괴롭혔다. 

조선왕조 최대의 세자빈 사망사건인 강빈 사망사건. 이 사건의 당사자인 강빈. 인질생활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남편이 시커먼 시체로 변하고 형제들마저 유배지로 떠난 상태에서 그 자신마저 사약을 마셔야 했던 강빈. 

사약 사발이 입술에 닿는 순간, 그는 세 아들이 눈에 밟혀 고통스럽고 서러웠을 것이다. 강빈은 죽어서도 분통을 다 풀지 못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도 옥탑방 왕세자처럼 21세기 대한민국에 환생해서 시아버지의 무덤인 장릉(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소재)에 찾아가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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