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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전쟁의 神? ‘장사꾼’ 이순신을 말하다”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21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35호] 승인 2014.03.03  10:46:47

▲ 북한에서 제작한 거북선 모형.
 
어부, 노동자, 나무꾼까지 행세 식량확보

전쟁의 신(神) 이순신은 알아도 장사꾼 이순신에 대해서는 이순신에 관한 책을 읽어 본 사람들도 잘 모르는 부분이다. 또한 장사꾼 이순신이라면 의아하거나, 황당해 하기도 하는 이순신의 삶의 한 부분이다. 이순신은 군인이었지만, 수군 진영을 관리하는 행정가였고, 군사와 관할 지역의 백성들을 먹고 살 수 있게 했던 경영자이기도 했다.

길고 지루한 전쟁 기간 중 땅은 피폐해졌고,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은 굶주렸다. 백성들의 생존과 굶주리는 군사들을 위해 이순신은 식량을 확보하고,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나라의 섬을 이용해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농사만 지은 것이 아니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유교 중심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세계관에서 벗어났다. 군인이었고, 선비였지만 그는 농사를 지었고, 물고기를 잡는 어업을 했고, 오늘날로 치면 제조업이나 다름없는 소금 제조까지 했다. 게다가 섬지역에 있는 나무를 잘라 전선을 건조하기도 했고 남는 나무를 팔기도 했다. 고금도에 주둔했을 때는 섬에 백성들을 안정시키면서 그들에게 집을 지어 팔기도 했다.

조직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

그 중 가장 유용한 재원 확보방안이 고기잡이였다. 바다속의 무궁한 물고기를 이용한 적극적 해법이었다. 《난중일기》에는 부하 장수나 군사들이 고기를 잡았다는 기록이 소금 제조나 나무벌목보다 자주, 또 많이 기록되어있다. 그 고기(주로 청어)으로 육지에서 군량을 사왔고, 어업에 심력을 기울인 사람들에게는 적극 포상했다.

▲송한련이 와서 말하기를 “고기를 잡아 군량을 샀다(貿)”고 했다(1595년 2월 19일).
▲황득중과 오수 등이 청어 7,000여 두름(한 줄에 10마리씩 두 줄로 엮은 것으로 20마리)을 싣고 왔기에 김희방의 무곡선(貿穀船, 곡식을 매매하는 배)에 계산하여 주었다(1595년 12월 4일).
▲이날 저녁에 청어 13,240 두름을 곡식과 바꾸려고 이종호가 받아갔다(1595년 11월 21일).
▲고기를 잡아서 군량을 계속 지원한 사람인 임달영·송한련·송한·송성·이종호·황득중·오수·박춘양·유세충·강소작지·강구지 등에게 모두 포상했다(1596년 10월 11일 일기 이후 메모 글).

일기에 나타난 일일 어획량은 최소 7,200마리에서 최대 56,000마리이다. 이순신의 수군 중에서 어업을 담당했던 군사들의 활동 내용을 보면, 효율적인 업무 분장도 있었던 듯하다.

고기잡이는 주로 송한련 형제와 오수, 박춘양, 황득중 등이 했고, 건조시키는 것은 하천수, 매매는 이종호와 임달영이 담당했다. 사람 마다 장기가 있듯 고기를 잡는 것과 파는 능력은 별개이기 때문에, 이순신은 사람들의 장단점을 파악해 각자의 역할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송한련, 송한 등이 말하기를, “청어 1,000여 두름을 잡아다 널었는데, 통제사께서 행차하신 뒤에 잡은 것이 1,800여 두름이나 됩니다”라고 했다(1596년 1월 4일).
▲오수가 청어 1,310두름을, 박춘양이 787두름을 바쳤는데, 하천수가 받아다가 말리기로 했다. 황득중은 200두름을 바쳤다(1596년 1월 6일).

이순신이 잡은 고기는 대부분 자신의 진영으로 찾아온 장사꾼 배인 무곡선을 제외하면, 고기 수량으로 볼 때 류성룡이 기근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건의해 1593년 압록강 중강진에 개설된 국제무역시장에서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강진 무역시장에서는 명나라의 곡물과 조선의 면포 등이 거래되었다.

고부가가치 산업을 일으켜라!

《난중일기》 1595년 5월의 일기에는 소금을 굽는 쇠가마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3번 등장한다.

▲오늘 쇳물을 부어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만들었다(1595년 5월 17일).

당시에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이 가마솥에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소금은 식생활에서 식품의 부패를 방지하고, 혈액과 위액 등 체액의 주요성분으로 생리기능을 조절하고 노폐물을 배출하는데 필수적인 성분이다. 소금은 쌀, 면화와 함께 인간을 이롭게 하는 3대 흰색으로 불렸다. 지금은 지천에 널린 것이 소금이고, 또 소금을 너무 많이 먹어 적게 먹자는 운동까지 일어날 정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만들기가 어려워 ‘작은 황금’이라고까지 불렸고, 값비싼 곡식인 쌀과 비슷한 가격으로 거래될 정도로 귀하고 귀한 물건이었다.

특히 당시 제조법으로는 소금은 ‘하늘이 짓는 농사’이기 때문에 겨울과 장마철은 제조할 수 없었고, 날씨 때문에 실제로는 한 해의 1/5 정도의 기간 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날씨에 기대야 하고, 생산 수단이 낙후되었기에 소금 생산은 매우 고된 일이었다. 당시 군인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군대생활을 했던 수군들조차 가장 기피하는 직종이었다. 때문에 큰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형벌로 소금을 굽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고된 노동이 필요하더라도,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소금을 생산해 더 많은 군량을 확보하려고 했다. 소금 제조사업은 1595년부터 시작해 전쟁기간 내내 계속된 듯하다. 1595년에는 소금 굽는 가마솥을 만든 짧은 기록이 3번 나오지만, 명량대첩 직후인 1597년 일기를 보면, 소금 제조 사업이 얼마나 활성화되었는지 단적으로 나온다.

소음도 등 13개 섬의 염전에 김종려를 감독관을 정해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김종려를 소음도 등 열세 개 섬의 염전의 감자도감검(監煮都監檢, 감독관)으로 정하여 보냈다(1597년 10월 20일).

14개 섬에 염전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많은 섬에 염전이 있었기에 관리와 감독을 철저하게 할 필요성이 있었기 담당 관리를 정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둔전(屯田)을 개간해 농사를 짓게 하면서도, 끊임없이 염전도 개척했다는 증거이다.

이순신은 또한 군량 확보를 위해 나무를 잘라 팔기도 했다.

▲5월 3일, 곳간을 뒤져 조사하니, 군량이 349섬 14말 4되와 나무를 팔아 들인 쌀(貿木米) 80●●. 모두 432섬 14말 4되에서 지금 남은 것이 65섬 12말 4되이다(1594년 11월 28일 일기 이후 메모 글) .

나무를 팔아 군량을 샀다는 기록이다. 이 날의 메모에는 ‘80●●’이라고 80 뒤의 글자가 판독되지 않지만, 메모 전체 기록으로 계산해 보면, ‘83섬’이다. 이 83섬은 5월 3일의 군량 조사 때의 전체 군량의 20%에 달하는 규모이다. 이순신은 섬에 있는 나무를 잘라 육지에 팔아 막대한 군량을 조달한 것이다.

이순신은 부하들과 함께 때로는 어부가, 때로는 소금 굽는 노동자, 때로는 나무꾼이 되었고, 선비들이 부끄러워하는 장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양반 사대부들의 가장 천시하는 말업인 상업은 물론 공업, 당시 모두가 외면하고 가장 고된 일이었던 소금 제조까지도 앞장서서 하면서 군사들을 굶주림에서 면하게 했고, 백성들의 먹거리를 만들어냈다. 이는 군사와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며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유교 이념에서 벗어난 자발적인 자기 혁신이다. 오늘날의 리더들, 특히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이순신의 자기 혁신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이 칼럼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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