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52N5Ed (문서파일)
* "박물관역사문화교실 ⑧ 구지가(龜旨歌)가 말하는 가야사 - 이영식"에서 "5.가야제국의 쇠퇴"와 "6.가야인들 일본과 신라로 진출"내용을 가져왔습니다. 

가야의 쇠퇴와 일본,신라 진출

가야제국의 쇠퇴

6세기 전반부터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휘말리게 됩니다. '삼국사기'․ 창녕진흥왕순수비․'일본서기'에는  당시의 사정이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진출에 대해 독립유지를 위해 전쟁과 외교를 전개하는 가야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가야는 친백제노선과  친신라 노선을 반복하기도  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이 시기입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일본의 왜왕권이 가야에 파견했던 외교사절입니다만, 이들은 가야의 왕들과 보조를 맞춰가며 백제나 신라에 대한 외교활동을 벌였습니다. 아라국(安羅國) 왕은 함안에 이들을 머물게 하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왜를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532년에 가락국(김해), 560경에 아라국(함안),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차례로 신라의 회유와 무력 앞에 통합되었고, 가야의 역사는 한국고대사의 울타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가야인들 일본과 신라로 진출

 
<카라쿠니辛[韓]國신사(일본 오사카 남부)>
 
이후 가야인들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일본열도에서 고대국가가 탄생되는 인적․물적  기초를 제공 하였습니다.  일본의 큐슈호쿠부(九州北部), 오카야마(岡山),  오사카(大阪),  나라(奈良), 시가(滋賀) 등에는 이러한 흔적들이 부지기수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흔적들로는 가야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신을 모시면서 생활하던 ‘카라, 아라, 아야, 가야’ 등의 이름이 남아있는 여러 신사들과 고분유적과 거기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유물들이 있습니다. 가야의 부뚜막신앙도 일본으로 전해졌고 그 흔적은 부뚜막형 토기와 부뚜막신사로 일본열도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가야인 들은 신라의 지방 사람으로 편제되기도 하였지만, 김유신(金庾信) 일족과 같이 정복국인 신라의 중심에서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김유신 일족의 3대에 걸친 신분상승의 노력은 참 눈물겹습니다. 할아버지 무력(武力)은 이름 그대로 한강 유역을 비롯한 삼국 간의 격렬한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  아버지 서현(舒鉉)은 성골의 만명공주와 혼인하여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을 이루었고,  김유신은 전공과 혼인에 신라와 같은 조상을 가진 김씨로 주장하는 조상전승을 더하였습니다.


<김유신 묘(경주)>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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