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3068

조선왕실 '조기교육', 이런 비밀 있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옥탑방 왕세자>, 두 번째 이야기
12.04.20 11:48 l 최종 업데이트 12.04.20 14:14 l 김종성(qqqkim2000)

▲  SBS <옥탑방 왕세자>의 이각(박유천 분). ⓒ SBS

조선시대에 태어나 대한민국에 환생한 왕세자 이각(박유천 분)과 수행원 3인방. 이들의 '대한민국 표류기'를 다루고 있는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이각과 3인방 간에는 엄청난 신분 차이가 존재한다. 조선시대에 생긴 이 차이는, 이들이 21세기에 환생한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다 똑같은 신세가 되었는데도, 또 나이로 보면 세자가 어린 편에 속하는데도 3인방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여전히 충성을 다하고 있다. 

어린 주인에게 절대 충성을 다하는 하인들의 모습은 모든 사극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옛날에는 저런 게 당연했으니까' 하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그런 상하관계는 쉽게 생긴 것이 아니었다. 우리 시대에는 없는 그런 상하관계를 만들기 위해 조선시대 지배층은 갖가지로 머리를 짜냈다. 그런 상하관계가 생겨난 구체적 방법 중 하나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대한민국 지배층이 가진 핵심 무기는 경제력이다. 이것은 인격과는 거리가 멀다. 서민들은 지배층이 자신들보다 경제적으로 풍요하다는 것은 인정해도, 자신들보다 인격적으로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지배층이 서민들을 다루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조선시대 지배층이 가진 무기도 본질적으로는 경제력이었다. 하지만 당시 지배층은 오늘날의 지배층처럼 노골적으로 경제력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신들이 경제력으로 사회를 지배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조심한 것이다.  

조선시대 지배층은 자신들이 지적·인격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반 서민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두 살에 글 배우고 세 살에 천자문을... 조선 왕실의 영재교육

▲  조선 왕세자의 모습. 사진은 종묘의 세자재실(세자 대기실)에 있는 모형.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 소재. ⓒ 김종성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조선시대 지배층은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자기 아이가 어려서부터 지적·인격적으로 일반인들을 능가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래야만 자기 아이가 훗날 성인이 되어 노비·소작인·부하들을 쉽게 통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지배층의 교육열은 오늘날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점은 왕실과 특권층 가문이 만 1세 정도의 갓난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이란 회고록을 남겼다. 이 책에서 홍씨는 사도세자가 받은 조기교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두 살 때 글자를 배워 60개 정도의 글자를 쓰셨고, 세 살 때는 다과를 받으시자 목숨 수(壽) 자나 복 복(福) 자 찍은 것만 잡수시고 (줄임) 또 천자문을 배우시다가 사치 치(侈)자와 넉넉할 부(富)자가 나오자, 치(侈)자를 손으로 짚고 당신이 입으신 옷을 가리키시며 '이것이 사치다'라고 하셨다.

이 글을 보면, 사도세자가 두 살, 즉 만 1세 때부터 글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꽤 일찍부터 조기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가 대단하게 여긴 것은 만 1세 때부터 글을 배웠다는 점이 아니라, 만 1세 때부터 60개 정도의 글자를 썼다는 점이다. 사도세자는 역대 왕자들보다 빨리 조기교육에 적응했던 것이다. 

또 세 살 된 사도세자가 사치와 검소에 대한 가치판단까지 한 것을 보면, 왕실에서 갓난아이들에게 글자만 가르친 게 아니라 인격적 소양까지 훈련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조기교육이 사도세자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은 조선 12대 주상인 인종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인종실록>에서는 인종이 세 살, 즉 만 2세 때 글을 깨우쳤다고 했다. 사도세자보다는 1년 늦게 글을 깨우친 것이다. 

왕실의 영재교육은 상당히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었다. <한중록>에서는 어린 왕세자의 교육과정을 일일이 기록한 문서들이 궁중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했다. 교육 과정과 학습 성과를 기록해뒀다는 것은 영재교육의 체계화·과학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조기교육 통해 '인격과 지식에 의한 지배' 이미지 만들어 

▲  사대부 가문의 자녀. 사진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유적지(정약용 유적지)의 유리관 속 모형. ⓒ 김종성

조기교육은 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라 불린 특권층 가문에서도 실시되었다. 왕실보다는 못했겠지만, 특권층 가문의 조기교육도 오늘날의 조기교육을 뺨치는 수준이었다. 

조선시대 민담집인 <금계필담>에는 철학자 김시습이 다섯 살 때 삼각산에 관한 시를 지어 세종을 감탄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19세기 중후반의 선각자인 박규수의 문집 <환재집>에 따르면, 박규수는 일곱 살 때 공자의 <논어>를 읽고 그것을 모방한 문장을 지었다고 한다. 유사한 사례들을 조선시대 기록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다섯 살짜리가 시를 지었다는 사실과 일곱 살짜리가 <논어>를 읽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람들은 다섯 살짜리가 '훌륭한' 시를 지었다는 사실과 일곱 살짜리가 <논어>를 흉내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다섯 살짜리가 시를 짓는 것과 일곱 살짜리가 유교경전을 읽는 것 자체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웬만한 사대부 가문에서는 다들 그렇게 자녀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술자리나 모임에서 노래를 잘하는 사람도 근사하게 보이지만, 멋진 시를 술술 낭송하는 사람도 꽤 근사하게 보인다. 유명한 시나 시조를 낭송하면 사람 자체가 달라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왕족이나 사대부들은 어려서부터 시를 짓고 암송하는 훈련을 받았다. 이랬으니, 이들이 서민들과 얼마나 다르게 보였을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조선시대 지배층은 어려서부터 시뿐만 아니라 경전까지 줄줄 외우고 거기에다가 도덕교육까지 철저히 받았다. 이런 조기교육을 통해 그들은 아랫사람들의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로 성장해 나갔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조선시대 지배층은 자신들의 지배가 '경제력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인격과 지식에 의한 지배'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지배층의 권위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거기에 있다. 

<옥탑방 왕세자>에 나오는 이각과 3인방의 상하관계는, 지배층의 지배를 당연시하도록 만드는 시스템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시대 지배층은 상당히 세련된, 아니 매우 '교활한' 집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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