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1953

박정희 압도한 군사정권 100년의 비결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무신>, 세 번째 이야기
12.04.17 10:02 l 최종 업데이트 12.04.17 11:50 l 김종성(qqqkim2000)

한국 역사에서 1170~1270년은 매우 특이한 기간이었다. 고려시대(918~1392) 중반에 해당하는 동시에, MBC 드라마 <무신>의 시대적 배경인 이 시기는 무신정권 혹은 군사정권이 집권한 기간이었다. 

'군부정권' 하면 흔히 박정희의 열여덟 해 통치를 연상하지만, 형식적 측면만 놓고 보면 박정희 군부정권은 정확히 2년 7개월만 존속했다. 1961년 5월 16일 출범한 군사혁명위원회(군사정부)는 5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약칭 최고회의)로 개칭된 뒤 1963년 12월 16일까지 유지됐다. 

1961년 5월 16일부터 1963년 12월 16일까지 대한민국에서는 사실상 두 개의 정부가 공존했다. 박정희 의장이 이끄는 최고회의와 윤보선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정부가 그것이다. 

그 같은 공존상태는, 최고회의 주역들이 대한민국정부를 장악하고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부터 소멸됐다. 그러므로 박정희 군부정권은 실질적으로는 열여덟 해 동안 집권했지만, 형식적으로는 2년 7개월만 존속한 셈이 된다.  

이에 비해 고려 무신정권은 무려 100년간이나 존속했다. 그 기간은 실질적으로도 100년, 형식적으로도 100년이었다. 이 시기에는 군사정부가 고려 조정에 대해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통치권을 행사했다. 처음에는 중방이, 나중에는 교정도감이, 뒤에는 교정도감과 정방이 함께 군사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흥미롭게도, 고려에서 무신정권이 성립한 때로부터 15년 뒤인 1185년경에 일본에서도 무신정권인 가마쿠라막부가 성립했다. 일본에서는 이때 생겨난 무신정권의 전통이 1868년 메이지유신 때 가서야 붕괴되었다. 

고려 무인들이 무신정변(1170년)이란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건설한 배경을 두고, "무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라거나 "고려 전기 귀족사회의 자체 모순 때문"이라는 등등의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해석은 부분적으로만 정답일 뿐이다. 

무인들에 대한 차별 때문에 무신정변이 생긴 것이라면, 고려 무인들 못지않게 차별을 당한 조선 무인들이 그런 정변을 일으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또 고려 귀족사회의 모순 때문에 무신정권이 생긴 것이라면, 조선 양반사회의 모순이 무신정권으로 연결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신정권이 성립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인들에 대한 차별이나 귀족사회의 모순 이외에 또 다른 측면은 없었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상국의 요청을 세 번이나 거절한 '신하의 나라' 고려 

▲  고려 무신정권 시기를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무신>. 사진은 주인공 김준(김주혁 분).ⓒ MBC

무신정권의 성립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무신정권 성립 이전 200년간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다. 지역 국가들 간의 외교적 연대가 유난히 취약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상당히 독특했다. 

이 시기는 성격상 두 기간으로 세분된다. 제1기에는 거란족 요나라가 상대적 우위를 점한 가운데 요나라·북송·고려·일본이 세력균형을 유지했고, 제2기에는 여진족 금나라가 상대적 우위를 점한 가운데 금나라·남송·고려·일본이 세력균형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지역 국가들 간의 연대가 매우 약했다는 점을 입증할 만한 사례는 상당히 많다.  

제1기에 요나라는 상국이었고 고려는 신하국이었다. 하지만 요나라는 고려를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요나라가 세 차례나 고려를 침공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때 활약한 인물들이 서희와 강감찬 등이다. 

전쟁에서는 고려가 승리했지만 경제력이나 영토 크기에서는 요나라가 앞섰기 때문에, 요나라가 상국이 되고 고려가 신하국이 된 것이다. 이런 일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자주 발견되기 때문에,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상국인 요나라는 "여진족이 발흥하지 못하도록 견제하자"며 고려에게 세 차례나 파병을 요청했지만, 신하국인 고려는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상국과 신하국 간의 연대가 매우 취약했던 것이다. 요나라의 패권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2기에는 남송이 "여진족 금나라를 견제하자"며 고려에게 파병을 요청했지만, 고려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2기 최강인 금나라가 고려와 동맹을 체결한 상태에서 남송이 그런 제의를 한 것은, 금나라와 고려의 동맹관계가 그리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신정권 이전 200년간은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외교적 연대가 유난히 취약했다. 동맹관계의 당사국들이 동맹을 중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3국도 그런 동맹을 우습게 여기곤 했다. 지역 국가들을 통합할 만한 절대 강자가 없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고려 조정 즉 고려 문신정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무신정권을 잉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의 '동업자 관계', 무신정권 해석할 열쇠


▲  최충헌에 이어 무신정권을 인수한 최우(정보석 분). ⓒ MBC

외교관계는 정부의 권력기반을 안정시켜 준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한미동맹에 힘입어 각각 18년·7년간이나 유지된 사례가 그 점을 증명한다. 그래서 외교관계가 강화되면 될수록, 한 국가에서 두 개의 정부가 출현할 가능성은 낮아진다. 

A·B·C 삼국 간에 외교관계가 체결되어 있을 경우, 삼국 정부 간에는 일종의 동업자 관계가 존재한다. A국·B국 정부는 C국 정부만을 자신들의 카운트파트로 인정할 뿐, 웬만해서는 C국 반란단체를 카운트파트로 인정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A국·B국 정부는 군대를 보내 C국 정부를 구원하기도 한다. 

어느 나라에서 혁명이나 쿠데타가 성공을 거두면 이웃나라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발생하기 쉬운 것은 이 같은 동업자 관계의 속성 때문이다. C국 정부가 무너지면 A·B·C의 동업자 관계가 약해지기 때문에, A국·B국으로도 혁명이나 쿠데타가 전염되기 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부들은 자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의 현 정부를 지원하기 마련이다.  

이 점은 조선시대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한 것은 조선정부의 위기가 곧 자국 정부의 위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882년에 조선에서 군인들이 반란(임오군란)을 일으켰을 때, 1894년에 동학농민군이 혁명을 일으켰을 때, 청나라·일본이 신속히 군대를 파견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동학농민전쟁은 조선 정부가 단독으로 진압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동학군과 정부군의 양자 대결에서는 동학군이 완승을 거두었다. '동업자'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조선왕조는 1910년이 아니라 1894년에 망했을 것이다. 이처럼 외교관계는 각국 정부 간의 동업자 관계를 강화하고, 한 국가에서 두 개의 정부가 출현할 가능성을 억제해준다. 

그런데 무신정권 성립 이전의 200년간,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동업자 의식이 매우 취약했다. 절대 강자가 있었다면 그 강자를 중심으로 외교적 연대가 강해졌겠지만, 그런 강자가 없는 상태에서 상호 평등에 가까운 세력균형이 유지됐기에 외교적 연대가 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동아시아 정부들 간의 동업자 의식이 견고했다면, 국제사회는 고려 무신정권이 조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 조정을 구원할 만한 외교적 연대가 취약했기에, 무신정권이 100년간이나 독자적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무신정권이 수립된 이유 중 하나도 이런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두 개의 정부'가 공존할 수 있었던 까닭 


▲  무신정권 시절의 고려 왕궁 중 하나인 강화도 고려궁터(고려궁지). 인천시 강화군 관청리 소재. ⓒ 김종성

그럼 무신정권이 고려에서는 100년 만에 붕괴하고 일본에서는 근 700년간이나 유지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역시 동일한 배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고려 무신정권이 붕괴하기 10년 전인 1260년에 고려는 몽골제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최대 수혜자는 고려 조정이었다. 무신정권을 견제할 몽골제국을 후원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과 몽골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무신정권은 10년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고려 조정이 몽골제국과의 동업자 관계를 강화하면서 무신정권이 존립기반을 상실했던 것이다. 

반면 몽골의 힘은 일본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몽골제국의 출현을 계기로 일본은 장기간의 외교적 고립상태에 들어갔다. 1404~1551년에 명나라와 미약하게마나 외교관계를 가진 것을 제외하면,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은 중국대륙과는 외교관계를 갖지 않았다. 통상관계를 가졌을 뿐이다. 

몽골제국 출현 이후로 일본이 지속적으로 외교관계를 유지한 나라는 한국과 오키나와뿐이었다. 일본 국내정세에 영향을 줄 만한 국가들과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에 존재하는 두 개의 정부에 대해 딴지를 걸 만한 나라들과는 관계를 갖지 않은 것이다.  

일본 무신정권이 일왕 정부(소위 '천황 정부')와 700년간이나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일본이 오랫동안 외부의 영향을 적게 받았기 때문이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계기로 서양과의 외교관계에 노출된 뒤 14년 만인 1868년에 일본 무신정권(에도막부)은 붕괴하고 말았다. 외부의 영향이 강해지자, '두 정부의 공존'이 소멸된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외교관계에 덜 노출되거나 외국과의 동맹관계가 약한 나라에서 두 개의 정부가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무신정권이 고려 조정과 더불어 100년간이나 공존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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