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yQTUnl 

니하

신라의 동북부에 위치했던 하천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조에서는 신라 제6대 지마왕 때 말갈병이 북경(北境)에 쳐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지마이사금 14년(125)조에도 “가을 7월에 또 (말갈이) 대령책(大嶺柵)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지났으므로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백제가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도우니 적병이 듣고서 물러갔다.(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五將軍助之 賊聞而退)”라고 하여 비슷하게 보인다. 

니하의 위치를 비정할 때, 위의 기사와 함께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1년(468)조의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서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니천(泥川)이라고도 한다](春 高句麗與靺鞨 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一名泥川])”는 기록과 『신당서(新唐書)』 권219 북적열전(北狄列傳)144 발해조의 “(발해의) 땅은 영주(營州)에서 동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와 맞닿아, 니하로 경계를 삼았다.(地直營州東二千里 南比新羅 以泥河爲境)”라는 기사가 중시되었다. 

먼저 일찍이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니하와 『신당서』에서 발해의 경계로 언급되는 니하가 같다고 파악하였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1년조에서 하슬라인이 니하에 성을 쌓았다고 하였으므로 니하가 하슬라와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보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부 건치연혁조에서는 하슬라가 지금의 강릉이라 하였기 때문에 니하를 강릉 북쪽에 있는 니천수(泥川水)라고 비정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으로, 『신당서』에 보이는 발해의 강역은 9세기 중엽 대인수(大仁秀)의 신라침공 이후에 기록된 것이므로 『삼국사기』와 『신당서』의 니하가 같음을 강조하여 강릉일대로 유추한 견해가 있다. 곧 『삼국사기』의 니하는 그 위치가 발해의 강역으로 언급된 것보다 한반도 남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던 기존견해를 비판하며 『신당서』에서 언급된 니하도 9세기 대인수의 남진정책이후 기록된 것이므로 양자의 위치가 결국은 같다는 것이다.(조이옥, 2001)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재된 니하와 『신당서』에 기재된 니하를 구분하여 보는 견해도 있다. 두 기록의 니하는 그 시기차가 크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봐야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1년조에 기록된 니하는 지금 강릉 근방의 하천으로 보이지만 어떻게 불리는지 알 수 없기에 한강의 지류인 소양강으로 비정하였다. 『신당서』에서 발해의 경계로 언급된 니하는 고구려가 망한 뒤 신라가 고구려의 땅을 잠식하여 그 영역을 북쪽으로 넓혔기 때문에 『삼국사기』 니하와 다르다고 보아, 함경남도 덕원지방의 용흥강(龍興江)으로 비정하였다. 곧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조에서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를 인용하여 신라와 발해의 경계는 신라의 천정군(泉井郡), 즉 지금의 덕원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신당서』에서 발해의 경계로 언급된 니하를 이 부근으로 볼 수 있으며, 덕원 부근에 흐르는 하천 중 북방에 위치하고 가장 큰 하천인 용흥강을 니하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松井等, 1935) 

또한 지명의 이동의 예로 보아 신라의 니하와 발해의 남쪽 경계로서의 니하를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삼국사기』에 기재된 말갈의 침략 기사를 검토하고 『삼국사기』의 니하를 남한강의 중・상류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이강래, 1985)


참고문헌

松井等, 1935,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 南滿洲鐵道株式會社.
이강래, 1985, 「『三國史記』에 보이는 靺鞨의 軍事活動」『領土問題硏究』2.
조이옥, 2001, 『統一新羅의 北方進出 硏究 -8世紀를 中心으로-』, 서경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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