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9580

주인 애첩 건드리고도 승승장구...이 노비 '대박'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무신>, 첫 번째 이야기
12.02.20 12:24 l 최종 업데이트 12.02.20 12:24 l 김종성(qqqkim2000)

▲  MBC 드라마 <무신>. ⓒ MBC

진시황의 진나라가 무너지고 유방의 한나라가 세워지던 시절. 이 과도기에 진승이란 영웅이 있었다. 그의 민란이 선풍을 일으키면서 유방과 항우 같은 군웅들이 일어났으니, 역사변혁의 시동이 그 발끝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209년에 군중을 선동할 때 그가 외친 한마디가 <사기> '진승 세가' 편에 기록되어 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제왕과 제후와 장군과 재상의 혈통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이런 자리에 얼마든지 오를 수 있다는 메시지다. 중국 역사에서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보다 더 유명한 이 연설은 군중의 가슴에 불을 질러버렸고, 심장이 박동한 군중은 무기를 들고 진나라를 부수러 나아갔다.  

진승이 세운 장초(張楚)란 나라는 금방 사라졌지만 그에게 영향을 받은 서민 출신의 유방이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그의 왕후장상 연설은 결과적으로 보면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말이 결국 씨가 된 것이다.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만적의 연설

진승의 연설이 있은 뒤로부터 1406년 뒤인 서기 1198년. 최충헌이 무사정권의 다섯 번째 지도자가 된 지 2년 뒤였다. 고려 개경 북산에서 나무를 하던 노비들 틈에서 한 남자가 불쑥 튀어나와 진승이 했던 것과 비슷한 연설을 했다. 이 남자는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 그의 연설이 <고려사> '최충헌 열전'에 인용되어 있다. 

"나라에서는 경인년 이래로 고관대작이 천민 노예 중에서 많이 일어났다. 장상(將相)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뭐 때문에 몸을 힘들게 하고 채찍 아래서 고난스러워야 하는가!"

경인년 즉 1170년 무신정변 이후의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노비들이 고위직에 진출하였으니,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장군과 재상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메시지였다. 이 연설 역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만적의 말을 듣고 가슴이 울컥하여 거사에 참여한 노비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  <무신>의 김준(김주혁 분). ⓒ MBC

만적의 민란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백여 명의 노비들과 함께 강물에 던져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진승의 민란이 유방에게 영향을 주었듯이, 만적의 민란은 또 다른 영웅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 다른 영웅'이란 지난 11일부터 방송되고 있는 MBC 드라마 <무신>의 김준(김주혁 분)이다. 

자기 집 선배노비인 만적의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을 김준. 왕후장상의 두 번째인 '후'까지 올랐지만 실질적으로는 '왕'까지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인 김준. 그 인생 궤적을 추적해보면, 그가 신분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노비 같은 하층민도 신분상승을 꿈꿀수 있었던 시절

<고려사> '김준 열전'에 따르면, 본명이 김인준인 김준은 노비 김윤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드라마 <무신>에서는 김윤성이 만적의 민란에 연루되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김준 열전'에서는 김윤성이 원래의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에게 의탁했다고 했다. 최충헌 쪽으로 권력이 집중되던 시기에 스스로 최충헌의 가노가 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에 만적이 최충헌을 배반한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또 <무신>에서는 민란에 실패한 김윤성이 아들 김준을 사찰에 맡겼으며 김준이 이 사찰에서 성장했다고 했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김준 열전'에서는 김윤성이 최충헌의 노비가 된 후에 김준이 태어났다고 했다. 

김준은 체격이 늠름하고 활쏘기도 잘하는 데다 성격까지 좋아서 사람들의 인심을 크게 얻었다. 술판이 벌어지면 거의 매번 술값을 내곤 했다. 그래서 재산이 바닥날 정도였다. 노비한테 무슨 재산이 있었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노비 역시 가옥·토지·동산 등을 소유했다. 

안정적인 시대였다면 김준은 결코 출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출세를 꿈조차 꿀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 분위기가 그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무신정변을 계기로 하극상이 일상화된 시절이었기에, 노비 같은 하층민도 신분상승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이다. 

무예·친화력을 바탕으로 권력 핵심부에서 입지 굳혀

또 무사들이 지배하던 시절인지라, 활쏘기 같은 무예가 출세의 발판이 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주인집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최충헌 가문이었으니, 무예의 달인인 김준으로서는 한 번쯤 큰 꿈을 꿀 만 했다. 

김준의 명성은 최충헌의 아들이자 무사정권의 여섯 번째 지도자인 최우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주인의 신임을 얻었고 주인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체격·무예·친화력을 바탕으로 권력 핵심부에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그런데 친화력이 너무 좋아서인지, 김준은 대형사고도 한 번 쳤다. 최우의 신임을 과신한 나머지, 최우의 애첩인 안심이와 친해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수년간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  <무신>의 최충헌(주현 분). ⓒ MBC

프로이드는 <정신분석 입문>에서 결혼식 시각을 깜빡 하고 교회 대신 실험실로 직행한 어느 유명한 화학자의 사례를 소개했다. 이 때문에 결혼식은 엉망이 되었고, 결국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 

프로이드는 결혼식을 망각한 사건이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될 운명의 전조(前兆)였다고 해석했다. 독신(A)을 희망하는 내면 심리가 '결혼식 깜빡'(B)이란 사건으로 나타났으니, B를 통해 A의 조짐을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주인의 애첩을 건드린 김준의 행동을 또 다른 일의 전조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잠시 후 소개될 것이다. 

생의 의지와 능력이 출중한 인물은 웬만해서는 죽지도 않는다. 그런 인물을 꼭 죽여야 하는 데도, 자기 옆에 두고 싶은 욕심에, 죽일 때를 놓치는 사람들이 많다. 최우도 그런 실수를 범했다. 최우는 김준을 도로 불러들였다. 기회를 다시 잡은 김준은 프로이드가 말한 '전조'의 완성을 위해 더욱 더 치열한 삶을 살았다. 

김준의 영향력은 최우의 아들이자 무사정권의 일곱 번째 지도자인 최항 때에 한층 더 막강해졌다. 최항이 권력을 잡는 데 그가 킹메이커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항의 아들이자 여덟 번째 지도자인 최의는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준과 최의의 관계는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왕후장상의 두 번째인 '후'까지 오른 김준

1258년, 위기의식을 느낀 김준은 주인에 대한 반역을 단행했다. 최의를 죽이고 직접 실권을 잡은 것이다. 최씨 정권이 근 30년간 몽골제국과 투쟁하는 혼란기를 틈타 최씨 정권을 붕괴시키고 무사정권의 아홉 번째 지도자가 된 것이다. 

이로써, 주인의 애첩을 건드린 김준의 행위 저변에 어떤 심리가 작용하고 있었는지 명확히 드러났다. 그는 처음부터 주인의 것을 탐냈고, 그것을 갖고 싶어 했던 것이다. 김준의 능력을 활용하고 싶은 욕심에 그의 과오를 묵인한 최씨 집안은 결국 자기 집 사냥개에 물려죽는 꼴이 되고 말았다.  

쿠데타 당시 김준이 왕정복고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쿠데타 이후로도 실권은 여전히 무사들의 손에 있었다. 무사정권의 지도자가 최씨에서 김준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후 김준은 형식적으로는 왕후장상의 두 번째인 '후'까지 올라갔지만, 실질적으로는 '왕'까지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실질적인 정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막부 쇼군 즉 무사정권 지도자와 일왕(소위 '천황')이 공존했던 1185~1868년의 일본처럼, 무사정권 시절의 고려는 사실상 2개의 정부가 공존하는 나라였다. 무사정권의 최고기구인 중방·교정도감·정방 등이 기존의 정부와 공존했던 것이다. 박정희 쿠데타 이후 대한민국정부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공존했던 사례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준을 비롯한 무사정권 지도자들은 단순한 실권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형식적인 왕을 떠받드는 실질적인 왕이었다. 노비 김준이 이만한 지위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실로 경이적인 일이다. 

김준을 통해 어느 정도 이뤄진 진승과 만적의 꿈

한국 역사에서 노비 출신이 형식적 의미의 왕이 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무사정권 시절의 김준·이의민처럼 노비 출신이 실질적 의미의 왕이 된 사례만 있을 뿐이다. 그만큼 과거의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신분상승이 매우 힘든 나라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니, 진승과 만적의 꿈이 김준을 통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준은 진승과 만적의 꿈을 절반만 성취한 셈이 되고 말았다. 진승과 만적은 서민들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지만, 김준은 그런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기존의 왕조와 왕실을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럴지라도, 김준의 삶은 대단한 성공 스토리의 소재가 될 만하다. 노비로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실력을 바탕으로 출세를 이룩하고 결국 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았으니, 한국 역사에서 이만한 개인적 성취를 이룬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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