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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리더는 위기에 몸을 던져야”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㉚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44호] 승인 2014.05.02  10:22:20

 
▲ 명랑해전도

신학자 레인홀드 니버(Reinhold Neibuhr)는 “책임이란 말을 빼버리면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했다. 니버의 말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물론 특히 리더의 경우에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말이다. 세월호의 침몰과 이 이후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니버의 말이 무겁게 다가온다. 선장과 선원들은 도망쳤고, 사고 이후 구조를 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어른들의 모습도 책임전가에 바빴다. 게다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비극을 조롱하며, 이념을 팔아대기 바쁘다. 비극의 시작은 무책임과 방종이었고, 그 과정도 그렇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일기만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메모한 기록도 있다. 어떤 구절은 특정한 어떤 책을 메모한 것이기도 하다. 그 중에는 오늘의 비극 앞에서 주목할 만한 메모가 있다.

위급한 일에 쓰였다

1593년 9월 15일 일기 이후에 쓰인 메모에는 자기 자신의 책임을 이렇게 표현했다. “正爲緩急之用(정위완급지용, 한창 위급한 일에 쓰였다).” 전대미문의 대전란 앞에서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각오를 다진 글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위기 때 쓰여지는 사람'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난중일기》에는 단 두 글자로 된 특이한 메모도 나온다. 1594년 11월 28일 일기 이후에 쓰인 메모이다. “難逃(난도)”이다. 뜻은 “도망갈 수 없다”이다. 후퇴하는 일본군에 대해 쓴 표현인지, 아니면 죽음의 위험 앞에서 당당해지려는 자신의 각오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메모를 보면,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책임을 다 하겠다는 각오가 분명하다.

▲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다(外無匡扶之柱石, 內無決策之棟樑. 외무광부지주석, 내무결책지동량). 그러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해야겠다(增蓋舟船, 繕治器械, 令彼不得安, 我取其逸. 증개주선, 선치기계, 영피부득안, 아취기일).

이미 일어난 전쟁인데도, 그 전쟁을 앞장서서 승리로 이끌어야 할 조정에 인물이 없다는 한탄을 하면서 홀로 자신만이라도 열심히 대비하겠다는 각오이다. 특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해야겠다(增蓋舟船, 繕治器械, 令彼不得安, 我取其逸”는 이 메모는 진수(陳壽)가 쓴 역사책,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문장이다. 《삼국지(三國志)》 <원소전(袁紹傳)>에서는 “益作舟船,繕治器械,分遣精騎,其邊鄙,令彼不得安,我取其逸”로 이순신의 메모 중 “增蓋”이 “益作”으로 나오는 것만 다르다. 이순신은 전쟁중에도 독서를 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할 방법을 고민했다.

죽을 각오로 싸워라

이순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대처했다. 때문에 1597년 9월, 명량 해전이 일어났을 때 13척의 이순신 수군은 수백 척의 일본 전선을 맞서 싸워 승리했다. 그 때의 일기를 보면, 불패의 장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도 죽음의 공포가 가득했다. 백전노장들이었던 부하 장수들 조차 겁을 먹고 모두 피해서 달아나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대장 이순신은 피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싸웠다. 대장이 홀로 외롭게 싸워도 부하들은 여전히 구경을 하고, 틈을 타 도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그 때 부하 장수를 불러 말했다. 거제 현령 안위(安衛)에게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安衛敢死於軍法乎! 退生去得生乎! 안위감사어군법호! 퇴생거득생호!)”라고 호통을 쳤다. 이순신의 말을 들은 안위는 전투에 적극 참여했고, 눈치를 보던 다른 장수들도 뛰어들었다. 이순신이나 안위나 다른 장수들이나 모두 비겁한 도망자가 되어 죽는 것보다, 오히려 용감하게 싸우다 죽기를 결심했다. 그 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대승을 했고, 죽을 각오로 싸웠기에 오히려 살아났다.

이순신의 삶을 보면, 이순신은 최악의 조건에서도 한번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가 젊었 녹둔도의 둔전관이었을 때는 침입해온 여진족과 싸우다 화살을 맞은 상태에서도 여진족과 싸우며 거꾸로 그들을 추격해 잡혀가던 백성들을 구출했다. 1592년 거북선이 처음 출동했던 사천해전에서는 가장 앞장서서 싸우다 총탄에 맞아 전사할 뻔하기도 했었다.

도망이란 단어를 지우자

나폴레옹은 자신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했다고 하지만, 이순신에게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물론 “도망”이란 단어도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 시대나 최근세나, 지금이나 도망치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1592년 4월 13일 일어난 임진왜란 때의 도망자들은 셀 수도 없다.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최일선에서 막아야 할 경상 좌수사 박홍은 가장 먼저 도망쳤고, 경상 병마사 김수 역시 도망쳤다. 연이은 패전 소식이 들리자, 왕인 선조도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선조는 백성의 눈을 피해 새벽에 쏟아지는 빗발을 뚫고, 또 백성들이 던지는 돌맹이를 맞아가며 자신의 귀한 목숨을 살리고자 도망쳤다. 도망을 치면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면서, 결국에는 자신이 다스리던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도 도망치려고까지 했다. 그의 마음에는 조선과 백성들의 안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1597년 7월 남해 칠천량에서는 수백척의 조선 전선과 일본 전선이 맞붙어 격전이 벌어졌다. 2월말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새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원균은 이순신처럼 부산포로 진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거부하다가 결국 도원수 권률에게 곤장까지 맞고 억지로 출전했다. 변변한 전투한 번 못하고 계속 밀렸고, 게다가 경계에 실패해 기습을 당해 조선 수군은 궤멸당했다.

그 과정에서 경상 우수사 배설은 가장 먼저 자신이 관할하는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도망쳤다. 원균도 밀리다가 도망쳐 섬에 상륙했다가 추격해 온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불패의 신화를 만들었던 조선 수군을 절단냈다. 무능한 리더, 우왕좌왕하는 리더, 도망치는 리더가 만든 비극이었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을 통해서는 침략해온 북한군을 격퇴하고, 북진을 하고 있다고 말하게 해 놓고, 대통령은 가장 먼저 도망쳤다. 그냥 도망친 것도 아니다. 북한군이 자신들을 추격할까 걱정해 한강 다리까지 끊고 도망쳤다. 착한 이 땅의 국민들은 리더의 거짓말에 속아 생지옥에서 살아야 했다. 2014년 4월. 세월호의 선장도 과거의 대통령처럼 거짓 방송을 하고 가장 먼저 도망쳤다. 수 백명의 학생들과 무고한 어른들이 거짓말에 속아 수장되었다. 세월호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가 각자의 삶의 리더로서 그 책임을 다했는지 이순신 리더십을 보면서 곰곰이 다시 생각해본다.

※ 이 칼럼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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