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284

가야사 거들떠 보기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  gosilec@lec.co.kr 승인 2014.12.10  11:19:04

1. 머리말 

최근 한국사에서 가장 현저한 진전을 보였던 분야의 하나가 바로 가야사였다.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활용과 가야 유적의 발굴 조사를 통한 고고학적 성과의 축적은 가야사의 기본적 복원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제 더이상 가야사는 미스테리에 쌓여 있는 우리 고대사의 블랙박스가 아니다.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독립된 연구주제로 각광 받고 있으며 바야흐로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어깨를 견줄 수 있는 4국시대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2. 가야사 연구의 경시 

기원 전후에서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었던 가야제국의 역사는 532년 가락국이, 562년에 가라국이 신라에 통합되면서 우리 민족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무려 6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야인 자신이 남긴 기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가야사를 복원하는 데 무척 어려움이 많이 있다. 현재 가야사에 관련된 기록들은 훨씬 후대에 기록되었고 가야사의 서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야제국이 전쟁이나 외교 교섭을 가졌던 상대국이나 다른 제3국에 의해 기술된 것이 대부분이다. 

3. 삼국지에 전하는 가야사 

삼국지는 전기 가야의 역사를 전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다. 3세기 후반경 중국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 한(韓)전 변진(弁辰) 조는 변진 12개국명과 함께 각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각각의 소국이 국읍과 별읍으로 기록되어 있고 소국의 군장들이 중국 군현과 통교하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국출철(國出鐵)이라는 기사는 김해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기류와 함께 철의 왕국의 면모를 복원하는 단서를 제공하였으며 왜인전(倭人傳)에서는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의 왜인들의 나라에 이르는 바닷길을 기술함으로써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출토된 화천(貨泉) 등과 함께 가락국이 해양왕국이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외에도 봄, 가을의 축제와 편두 및 부뚜막에 관한 기록은 관련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전기 가야인의 정신 세계를 복원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4. 광개토대왕릉비에 전하는 가야사 

광개토대왕릉비는 가야사의 단편을 전하는 가장 이른 우리의 문자 기록이다.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다. 임나가라와 안라(安羅)로 나뉘어 표기된 가야는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다가 광개토대왕이 파견한 5만 기보병에 의해 격퇴된 대상으로 서술되어 있다. 4백년의 이 역사적 사건은 가야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눌 때, 남부 해안 지역에서 시작된 가야의 역사와 문화가 북부 내륙으로 전개되었던 전환점으로 이해되고 있다.

5. 남제서에 전하는 가야사 

남제서는 가라왕 하지가 479년에 조공하고 보국장군, 본국왕의 칭호에 제수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대가야의 독자적 사절단 파견으로 해석되는 이 기술은 가야가 고대 동아시아의 책봉외교 무대에 등장했던 사실을 전하는 사료로서 고대 동아시아의 책봉외교 무대에 등장했던 사실을 전하는 사료로서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변동을 연구시각에 포함시켜야 할 필요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아울러 이 사절단의 이동경로에 대한 추론은 대가야식 토기의 확산, 가야금 12곡명에 대한 지명비정,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발굴조사 성과 등과 함께 가락국(대가야)이 서부 경남 일대에서 영역 국가를 추구해 가던 상황을 재구성해 볼 수 있게 한다. 

6. 일본서기에 전하는 가야사 

일본서기는 712년에 야마토 조정이 편찬한 고대 일본의 사서이지만, 백제, 신라, 고구려, 왜에 관련된 기술로서 가야사의 일부를 채록하였다. 여기에서 가야사는 백제와 신라 그리고 왜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였던 역사로 기록하였다.  

일본서기는 현존하는 가야사 관련 기록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의 서술을 보여 주는 자료이지만 고대 일본의 소중화주의적 역사관과 백제 계통의 원자료적 편중성이라는 특징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를 기초로 올바른 가야사를 복원하기는 쉽지 않은데, 비판적 활용을 위한 우선의 전제로 이러한 사서적 특징과 한계에 대한 철저한 사료 비판을 거쳐야 할 것이다. 일본 중심적 역사관과 백제 중심적 원사료의 한계르 어떻게 걸러볼 수 있는가가 비판적 활용의 첫 열쇠가 되어야 할 것이다.

7. 삼국사기에 전하는 가야사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에 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사서로, 신라본기, 악지, 열전 등에 가야사의 단편을 전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본기로 편찬하여 독립된 역사로 다루고 있는 반면, 가야사는 그렇지 않았다.  

신라본기에서 보이듯이 가야관련 기록들은 신라와의 전쟁이나 외교에 관련된 교섭사의 단편으로 서술되었다. 일본서기의 대부분이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근거했던 사료적 계통의 차이에서 기인되었던 점도 적지 않았겠지만, 가야사를 신라의 변경사 정도로 취급하고자 했던 편찬 태도의 문제도 관련되었을 것이다. 

부여사나 발해사와 마찬가지로 가야사는 본래의 의미에 비해 경시되었고, 가야사 연구가 정체될 수 밖에 없었던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채호의 지적과 같이, 삼국사기가 설정했던 우리 고대사의 범주와 비중은 현재까지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