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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만, 신석기부터 고려까지 해남 중심 문화권
백포만, 동북아 해양 시대를 열자
백포만에서 시작된 서남해안 고대해상교역로를 가다 4. 
노영수,박영자 기자  |  5536@hnews.co.kr 승인 2008.11.07  11:47:19

고대사회 백포만 해상세력은 자신들의 해상도시를 송지 군곡리에 세우고 포구와 해상도시를 보호할 산성을 현산 고담 고다산<사진 오른쪽>과 신방리 백방산, 현산 일평산<사진 왼쪽> 정상 등에 각각 성을  구축한다.  
 
종합 학술조사로 해남고대 해양사 정립해야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중국 낙랑과 일본, 가야와 독자적인 해상교류활동을 했고 또 이들 각 나라들이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해남 백포만과 송지 군곡리 해상세력들이 세웠던 송지 군곡리 포구도시는 그 역사적인 가치에 비해 지역사회 관심은 너무도 미미하다. 

이에 반해 백포만에 대한 고고학계의 관심은 매우 크다.  백포만은 1983년 목포대 박물관에서 송지 군곡리 패총지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면서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었다. 농촌의 작은 마을 패총지에서 중국과 일본, 가야와 활발한 교류 활동을 했음을 알리는 유물들이 대거 수습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곡리 패총지 발굴로 백포만이 경상남도 사천과 함께 중국과 일본, 가야가 해상교역 활동을 하는데 있어 중요한 중간 기착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고대사회 서남해안 해상교통로를 정립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목포대 강봉룡교수는 백포만은 마한시대 영산강 유역에 자리한 신미제국의 외항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상교류의 중요한 거점항구였다고 말했다. 

현재 해남에는 송지 군곡리 외에 백포만 포구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현산면 일평리 뒷산의 일평성지와 고담의 고다산 성지, 신방리의 백방산 성지가 바로 그것이다.

강교수는 백포만 해상세력들은 군곡리와 백포만 포구를 에워 싼 산 정상에 산성을 구축해 해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고 설명했다. 일평산과 고다산, 백방산 정상에는 당시 흔적을 알려주는 성벽이 조금씩 남아있다.  

백포만에 대해 조사해 온 그동안 성과물을 도서문화 연구소의 논문집에 곧 발표할 예정인 강교수는 백포만의 역사적 가치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조사와 함께 활용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백포만 해안가에 형성된 마을들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와 함께 백포만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에 대한 연구 등을 통해 백포만의 문화와 역사를 포괄하는 연구가 진행돼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백포만을 중심으로 한 고대 해남사회에 대한 다양한 학술회의를 열어 지역내에서 백포만의 역사적 가치를 공유하는 기회가 필요함도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현재 해남에는 백포만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은 게 사실이다.  백포만에 대한 인식이 낮은 첫 번째 이유는 그곳에서 발굴된 유물이 지역 내에 남아있지 않다는 데 있다.

송지 군곡리 패총지에서 수습된 유물은 모두 목포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지역 내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그 지역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실체마저도 지역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해남에서는 송지 군곡리 외에 철기시대에 해당되는 유적발굴이 활발히 이뤄졌다. 그러나 그곳에서 수습된 유물들도 모두 국립광주박물관과 목포대 박물관, 발굴을 책임진 연구기관으로 분산돼 보관돼 있다.  

그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역사의 현장에 있어야 가치가 있고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지역민들이 그 가치를 공유했을 때만이 살아있는 역사로 되살아난다는 의미를 송지 군곡리 패총지는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해남군과 달리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와 통영시, 거제도, 일본은 유적발굴지에 박물관을 지어 지역민들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삼고 있다.     

김해시는 가야시대 고분군들이 발굴된 대성동 현지에 고분박물관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는 매월 사회교육 일환으로 다양한 체험행사를 열어 일반시민들에게 금관가야의 문화적 정체성을 심어주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금관가야에 대한 특정주제를 선정해 심도 깊은 연구와 학술총서를 발간하며 가야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김해시의 문화재 정책은 현장성에 있다는 점이 해남군과 다르다.

김해시에는 국립김해박물관이 있지만 고분이 발굴된 현지에는 대성동 고분박물관이, 가야시대 대표 포구였던 봉황동에는 당시를 재현한 시설물이, 회현동 패총지는 패총전시관이 각각 위치해 있다.

김해시 문화정책은 대규모 택지개발에서도 읽을 수 있다. 김해시는 대규모 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유적은 복원해 이전하고 대신 그 현장은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장유 율하지역 택지개발 내의 고인돌 유적공원과 북부택지개발 내 유적공원이다.

지역에 박물관을 둬 지역민들에게 역사인식을 높여주는 곳은 김해시 외에 통영시과 거제시도 마찬가지다. 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해 있는 거제시 박물관에는 거제지역에서 수습된 다양한 유물전시와 함께 정기적으로 각종 학술 세미나와 체험 프로그램을 열어 지역민들에게 역사인식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바다가 교통의 중심이었던 고대사회 때 해남은 변두리가 아닌 국제적으로도 교통의 중심지였다. 해양엑스포를 유치한 여수시의 최근 움직임도 해양시대를 열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또한 목포시가 중국을 포함한 항구도시를 지향하는 것도 바다를 중심으로 한 옛 해양시대를 맞고자 하는 것이다. 

해남의 역사는 해양에서 출발한다. 해남에 최초 터를 잡았던 현산면 백포마을 신석기인들도 해양세력이었다. 그야말로 백포만은 신석기를 시작으로 청동기 철기시대를 넘어 고려시대까지 해남의 중심포구로, 중심 도시로 자리했던 해남의 뿌리이다. 

이 역사를 바로 정립하고 종합했을 때 해남의 정체성과 역사성의 정립도 가능해진다. 또한 해남 백포만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과의 해상교역로와 서로 간에 영향을 미쳤던 부분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연구도 필요하다.  <끝>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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