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73983

<뿌리깊은나무> 소이는 빙산의 일각이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일곱 번째 이야기
11.12.22 17:14 l 최종 업데이트 11.12.22 17:14 l 김종성(qqqkim2000)

▲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한 장면. 궁녀 소이(신세경 분)의 모습. ⓒ SBS

최근 SBS 수목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충격적 비밀이 공개됐다. 훈민정음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가 책자 형태가 아니라 궁녀 소이였다는 것이다. 한 번 보면 뭐든지 기억한다는 소이의 머릿속에 훈민정음의 매뉴얼이 입력돼 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해례>가 책자가 아니라 소이라는 것은 드라마 속의 픽션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암기력 혹은 기억력의 측면에서 궁녀 소이와 현대인들의 차이를 음미해볼 수 있다.

옛날에는 소이 같은 기억력의 소유자가 그리 드물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흔한 편도 아니었지만, 수소문해서 찾으면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암기왕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전문적으로 정보를 보관하고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한 사례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서기 712년에 편찬된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의 '서문'에는 암기왕인 히에다노아레(이하 '아레')의 사례가 소개돼 있다. 그의 역할은 왕명을 받아 역사를 암송함으로써 그것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던 내용이 훗날 책으로 발행되었으니, 그 정보의 양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아레(당시 28세)가 일본 역사를 처음 암기한 때는 제40대 덴무 일왕(소위 '천황') 재위기였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673년 이후의 어느 시점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고사기> 편찬을 위한 준비작업이 시작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인 711년, 제43대 겐메이 일왕은 <고사기>의 완성에 앞서서 아레의 머릿속에 입력된 내용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아레에게 암송을 시킨 것이다. 아레는 20대 후반에 암기한 내용을 60세가 넘은 이 당시에도 여전히 암송할 수 있었다. 

한자 수백 개로 쓰인 문서를 쓱 보고 다 외운 '한음'

1780년에 청나라를 여행한 실학자 박지원의 기행문인 <열하일기>에서도 암기왕들을 만날 수 있다. <열하일기> '관내정사' 편에 따르면, 박지원은 북경 근처의 길거리에서 <삼국지>나 <수호지>의 주요 대목을 암송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이 길거리에서 책을 암송한 것은 행인들의 관심을 끌어 장난감을 팔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유동인구가 많은 상점가에서 최신 유행가를 켜놓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비해 책값이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에, 옛날 서민들로서는 그런 방법으로 <삼국지>나 <수호지>를 접할 수밖에 없었다. 


▲  김홍도의 <서당>에 묘사된 조선시대 학생들. 출처는 중학교 <국사>. ⓒ 교육과학기술부

유명한 친구 사이인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오성은 이항복(1556~1618년)이고, 한음은 이덕형(1561~1613)이다. 이 중에서 한음 이덕형도 기억력의 대가였다. 그의 이야기가 어우당 유몽인의 민담집인 <어우야담>에 소개되어 있다. 

이덕형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덕형의 관심은 단순히 접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이 기회를 빌려 명나라의 군사정보를 캐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여송의 측근에게 사전에 뇌물을 제공해두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이덕형이 명나라 사령부를 방문하자, 이여송의 측근은 수백 개의 한자로 된 비밀서류를 잠깐 보여준 뒤에 얼른 빼앗았다. 대강의 분위기만 파악하라고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덕형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명나라 진영에서 돌아온 이덕형은 머릿속에 스캔된 수백 개의 글자를 그대로 써서 선조 임금에게 제출했다. 나중에 조선 측이 또 다른 루트를 통해 그 문서를 확보해보니 이덕형의 보고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어우야담>은 전한다. 

수십 명의 동시 낭독을 듣고 사건을 정리한 김계휘

조선시대 예학(예법)의 대가로서 송시열·최명길 등을 제자로 둔 김장생이란 인물이 있다. 김장생의 아버지인 김계휘는 매우 명석한 청년 관료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 역시 유명한 암기왕이었다.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의 일화가 <어우야담>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도지사와 달리 조선시대 관찰사는 재판사무까지 처리해야 했다. 오늘날의 법관들이 그렇듯이 관찰사들도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소송서류들과 싸워야 했다. 

김계휘가 소송사건을 파악하는 방식은 아주 독특했다. 수십 명의 아전(하급 관료)들에게 수천 장의 서류를 동시에 낭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진행된 수십 명의 낭독이 끝나면, 김계휘는 자신이 들은 것을 서류에 정리했다. 그가 수많은 소송사건들을 짧은 시간 내에 얼마나 잘 요약하는지 사람들이 다들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따금씩 그는 아전들의 낭독이 끝나자마자 "백성 아무개가 이중으로 소송을 제기했으니, 그 자를 처벌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아전들도 찾아내지 못한 이중 소송을 단번에 찾아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컴퓨터 없이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김계휘는 아무 어려움 없이 척척 해내곤 했다.  

김계휘는 떳떳하지 못한 목적을 위해서도 자신의 재주를 활용했다. 어느 날 그는 시장 상인을 불러 "특이한 책들을 읽고 싶다"며 "그런 책들이 있으면 사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러자 상인은 서점가에 가서 특이한 서적들을 대량으로 구한 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여러 대의 수레에 실어 김계휘에게 갖다 주었다. 

다음 날, 김계휘는 상인을 도로 불러 "책이 너무 비싸서 살 수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며 책들을 되돌려주었다. 실은, 밤새 속독으로 다 읽었던 것이다. 그렇게 책들을 읽은 뒤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상세히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그의 점잖지 못한 수법이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암기에 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광주향교. 향교는 조선시대의 중등 교육기관. ⓒ 김종성

여기에 소개된 암기왕들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기억력이나 암기력을 바탕으로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인물들의 사례를 사료 속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옛날 사람들의 평균적인 암기력이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좋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옛날 사람들의 암기력이 탁월했던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책을 베끼거나 암송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정보를 배포하는 쪽에서도, 책자 형태로 알리기보다는 사람에게 암송을 시키는 편이 유리할 때가 많았다. 

둘째, 반복학습과 암송을 통해 문리(文理)를 깨우치도록 하는 학습법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암기보다는 이해나 분석의 중요성이 훨씬 더 강조되지만, 옛날에는 이해나 분석 못지않게 암기의 중요성도 크게 강조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암기를 통해 전체적인 윤곽을 잡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해력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셋째, 개인의 사회생활에 요구되는 정보량이 오늘날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정보가 폭주하는 시대에는,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전화번호 몇 개도 기억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정보를 잘 분류해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정보량이 적은 옛날에는 정보의 전부 혹은 상당부분을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게 가능했다. 

이상의 세 가지 요인은 한·중·일 3국에 공통되는 것들이다. 이 외에, 한국·일본에만 해당하는 요인이 또 있었다. 상당량의 정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해보다는 암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무리 한문을 많이 배우더라도, 중국인보다 한문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대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명한 문장가였던 유몽인도 한글 번역문을 참고하면서 중국 서적을 읽었노라고 <어우야담>에서 회고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한문으로 적힌 정보를 많이 습득하자면, 가급적 많이 읽고 많이 외우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암기해버리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현대인들보다 훨씬 스마트한 궁녀 소이

서당 훈장들이 "뜻을 몰라도, 반복해서 계속 읽어라"라며 "열번 백번 읽다 보면, 자연히 문리가 트일 거야"라고 말한 것은 그런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다 보니, 옛날 사람들의 암기력이나 기억력이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궁녀 소이를 비롯한 옛날 사람들과 비교할 때, 현대인들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머리가 더 좋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머리가 아닌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정보를 저장해두기 때문이다. 

주기억장치는 머리여야 하고,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어디까지나 보조기억장치여야 한다. 그러나 주기억장치와 보조기억장치가 서로 뒤바뀐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대인들은 신체 외부의 인공적인 장치들에 자신들의 기억을 의존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1시간만 정전이 되거나 네트워크가 마비돼도 정보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그러니,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모르는 궁녀 소이가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스마트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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