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홍준표, 애초부터 노랗던 '싹수'
[삐딱한 것 갑수다] '사이비 민주주의' 또는 '잡종 민주주의'
15.04.09 14:45 l 최종 업데이트 15.04.09 14:45 l 김갑수(pop09gk)

선거는 특정 사회가 민주주의 체제임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즉, 민주주의라면 당연히 선거를 통해 권력을 교체해야 하지만 선거를 한다고 다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는 1980년부터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해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짐바브웨를 민주주의 국가로 여기진 않는다. 

정기적이긴 하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짐바브웨가 민주국가가 아닌 가장 큰 이유는 로버트 무가베가 35년째 권좌에 앉아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끊임없는 부정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만약 짐바브웨가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를 행한다면 어떨까? 그럼 그 나라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선거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를 증명하는 최소한의 증거일 뿐이다. 자기든 남이든 권력자 스스로 후임자를 정하는 게 아니라 유권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권력교체가 이루어질 때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시작하기 위한 형식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내용이다.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원칙이 얼마나 잘 지켜지는지, 표현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인 시민권이 얼마나 잘 보장되는지가 핵심이다. 그렇게 형식과 내용 모두 온전할 때 비로소 해당 사회를 민주주의 체제라고 한다.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은 각기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쿠데타는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받았다 한들 그 과정에서 부정을 행한 지도자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들을 소중히 여길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싹수가 노랗다'는 말과 '싸가지가 없다'는 말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 둘은 본래 한 몸이었다. 

공히 앞날에 잘 될 낌새가 거의 없다는 말로 태어났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그 맥락을 조금 달리 해 버르장머리가 없거나 예의가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렇다고 그 둘이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순 없다. 둘 사이에 분명한 함수관계가 있어 전자가 후자를 규정할 개연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말은 틀렸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결과물이 아니라 시작이다. 당연히 선거는 민주주의의 싹 또는 뿌리라고 해야 옳다. 썩은 싹이나 뿌리가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순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거나 선거부정을 행한 자가 법 앞의 평등을 인정할 리 없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할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 

쿠데타를 혁명이라 호도하는 사람들이나 선거부정을 단순한 개인의 일탈로 여기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민주주의 앞엔 별도의 수식어가 필요하다. 온전한 민주주의가 아니기에 그렇다. '사이비 민주주의' (Pseudo democracy) 또는 '잡종 민주주의'(Hybrid democracy) 같은 개념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이런 '싹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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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전 대통령 ⓒ 남소연

세 사람이 있다. 모두 싹수가 노랗던 사람들이다. 한 명은 전직 대통령이다. 그는 약 20년 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선거할 때 심각한 부정이 있었다고 참모 중 한 사람이 양심선언을 했다. 그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며 양심을 걸었다. 둘 다 양심을 말하는데 내용이 달랐다. 그리고 갑자기 그 참모가 사라졌다. 가족과 함께 외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2년 6개월의 법정공방 끝에 대법원은 그의 상고를 기각하고 선거법 위반과 범인도피 혐의로 7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이듬해 그는 사면 복권됐다. 자그마치 '광복절' 특사였다. 그리고 2년 뒤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 당선됐으며 5년 후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됐다. 제발 대화 좀 하자는 주권자들 앞에 차벽으로 된 성을 쌓던 그의 임기 말 이 나라 정보기관과 군이 앞장서 선거부정을 저질렀다. 그의 재임시절부터 세계 유수의 민주주의 평가기관들은 이 나라를 '부분적 자유국가'로 규정하기 시작했으니 그 모든 게 애초부터 노랗던 싹수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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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준표 경상남도지사 ⓒ 윤성효

또 한 사람이 있다. 법을 공부한 현역 도지사다. '전직 대통령'과 같은 해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었다. 수천만 원의 선거 운동 경비를 허위로 처리한 혐의였다. 하지만 그 역시 '전직 대통령'과 함께 사면 복권됐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선거에 출마했다. 다른 곳도 아닌 전임자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해 자리가 빈 곳이었다. 그리고 당선됐다. 이후 집권당 대표까지 지냈고 지금은 한 광역단체의 수장으로 있다. 

그가 얼마나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며 도정에 임하고 있는지 언급하진 않겠다. 이 글의 목적은 '싹수'에 있지 '싸가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전국 광역단체장 가운데 유일하게 과반의 유권자로부터 부정평가를 받은 사람이 하필이면 그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함께 국회의원이 됐다 선거부정으로 함께 의원직을 내놓았던 '전직 대통령'처럼 제발 대화 좀 하자는 주권자들 앞에 차벽으로 성을 쌓아놓곤 바다 건너에서 골프를 쳤다는 보도도 있었다. 역시 애초부터 노랗던 싹수에서 이미 충분히 예견됐던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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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덕수 전 의원 ⓒ 남소연

마지막 한 사람은 전직 국회의원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배지를 달고 있었다. 하지만 회계책임자가 적법하지 않은 선거비용을 지급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한 원심이 확정돼 돼 배지를 뗐다. 그리고 지금 그로 인해 공석이 된 국회의원 선거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 그가 며칠 전 감투를 썼다가 하루만에 벗었다. 다른 곳도 아닌 자기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자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다가 철회한 것. 이런 싹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거는 하되 헌법에 보장된 시민의 기본권, 즉 언론과 표현의 자유 등이 보장되지 않는 체제로서 '자유 없는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란 개념을 주창했던 파리드 자카리아는 어떤 사회가 법과 자유를 지키지 않을 때 민주주의란 그저 작은 위안에 불과하다고 했다. 

우리 모두 언젠가부터 그래도 1987년 이전에 비하면 이게 어디냐는 작은 위안 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밥 잘 먹던 아이들이 밥그릇을 빼앗기고, 학교 잘 다니던 아이들이 수백 명씩 물에 빠져 죽는 세상, 그야말로 싹수가 노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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