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lyuen.egloos.com/4899005

그 많던 고구려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3>
- 고구려의 인구는 69만명인가, 315만명인가

      그 많던 고구려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1> - lyuen  http://tadream.tistory.com/152
      그 많던 고구려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2> - lyuen  http://tadream.tistory.com/151

고구려 멸망후 그 유민들의 궤적을 추적해 보려면 원래 고구려의 인구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구당서 권199 고려전에는 멸망시의 고구려 인구가 69만7000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 지리지나 당회요도 같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신당서와 삼국사기도 69만호로 비슷한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1호는 보통 2~10명 정도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는 4~6명 사이일 경우가 많다. 고구려 멸망과 같은 시기인 중국 당나라대의 1호당 인구는 2.7~8.79명 정도의 편차를 보이며 대부분의 경우 5~6명 사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고구려의 일부 호구 관련 기록도 비슷한 수치를 보여준다. 삼국사기 권6 문무왕 6년조에는 신라에 투항한 고구려인 집단 763호가 모두 354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고구려 1호당 평균 구수는 4.525명이 된다. 

이를 고려해 1호당 4.525명이라는 수치를 적용할 경우 고구려 멸망 당시의 인구는 69.7만호X4.525명=315만3925명이 된다. 계산의 편의를 위해 1호당 5명이라는 좀 더 가정적 수치를 적용할 경우 348여만 명이 된다. 좀 더 보수적인 수치인 1호당 4명이라는 가정적 수치를 적용할 경우 278만8000명이 된다. 결국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를 신뢰할 경우 고구려 멸망당시의 인구는 278~348여만 명 사이, 범위를 좀 더 좁힌다면 1호당 4.525명을 토대로 한 315여만 명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숫자에 대해선 이를 그대로 믿는 학자(중국 학자 다수, 한국의 신형식)들과 이를 과장된 숫자로 보고 믿지 않는 학자(이옥, 윤종주 등)들이 대립해 왔다. 이 숫자를 믿지 않는 학자들의 논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이옥 전 파리 제7대학 교수의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 고구려 호구 69여만호를 자연호로 보지 않고 일종의 법정호로 보고 실제 호구를 2배 이상으로 간주해서 고구려의 인구를 750~1000만명이라고 보는 북한 학계의 견해(손영종, 북한사회과학원)도 있으나 일단 이 견해는 논외로 간주하겠다. 


* 고구려 호구 69만7000호가 실제로는 인구 숫자라는 견해 

서기 1세기 중엽 고구려가 한 국가로서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연변에 세워졌을 때 (위지 고구려전에 따르면) 이 나라에는 약 3만호가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구당서에 따르면) 7세기 중엽 고구려 멸망시에는 만주 남쪽과 한반도 북부에 69만7000호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왕국이 7세기 동안 영토를 상당히 확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영토는 5세기 말경에는 북으로는 농안, 남으로는 충청도, 서로는 요하, 동으로는 동해까지 뻗쳤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토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총 인구수가 구당서에 전해지는 만큼 많았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한 호가 보통 5인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위의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의 인구는 15만에서 300만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 된다. 어떤 사가는 백제에는 76만호, 즉 380만명, 신라에는 수도인 경주에만 17만8936호 즉 약 90만명이 살았다고들 한다. 

이 숫자들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며, 여기서 호는 명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한 문헌(삼국유사)에는 고구려에는 21만508호, 다시 말해서 약 100만 가량의 주민이, 그리고 백제에는 15만2300호, 약 76만1500명 정도가 살았다고 씌어있는데 바로 이 주민들의 수가 구당서에 나타난 호의 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믿는 또하나의 이유는 11세기 중엽에 한반도에는 총 210만명이 살고 있었으며 17세기에도 500만명이 약간 넘는 인구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삼국시대에 총 800만이 넘었던 인구수가 7세기에서 11세기에 약 500만이 되었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때 고구려 말기에는 69만7000호가 살았던 것이 아니라 69만 7000명이 살았음이 명백해 진다. 


<고구려 민족형성과 사회, 이옥, 1984>

위 글에서 이옥 교수는 크게 두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영토의 확장을 감안해도 15만명에서 300만명으로 증가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라는 논리이며 둘째는 삼국시대 인구가 오히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를 능가하므로 300만명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상식 밖의 수치라는 것이다. 이교수의 이같은 주장은 69만7000호 설을 비판하는 전형적인 의견 중 하나로 상당기간 학계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같은 주장을 신뢰하는 전제 위에서 논리를 전개하는 학자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 고구려 정복 전쟁 시작 이전 만주와 북한지역 인구 규모 

우선 첫번째 주장을 검토해 보자.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 완성되기 이전 요동반도, 만주, 한반도 북부 일대의 인구를 기록한 자료는 거의 대부분 중국 사료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지다. 삼국지는 당시 만주와 북한 지역의 일대의 인구에 대해 부여 8만호, 고구려는 3만호, 동예 2만호, 옥저 5000호로 기록하고 있다. 합치면 13만5000호가 되며 호당 5명이라는 가정적 수치를 동일하게 적용할 경우 67만5000명이 된다. 

우연하게도 이 숫자는 멸망당시 고구려 호구수 69만7000명과 유사한 수치지만 이 숫치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멸망 당시 고구려 영토 내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은 평양을 중심으로한 평안도, 황해도 지역 그리고 요동반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낙랑군과 요동군을 점령한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이 100% 고구려의 지배를 벗어나 중국 영내로 탈출했다고 보는 것은 그리 합리적인 가정이 아니다. 당장 중국 내지로 교치된 낙랑군의 인구 규모만을 봐도 수천명 수준에 불과해서 낙랑군에서 탈출해 중국 내지로 이주한 주민의 수는 극소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토확장 과정을 통해 낙랑군과 요동군 주민의 상당수가 고구려인으로 편입됐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당연히 고구려 영토 확장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인구 증가가 나타날수 있는지 따져보기 위해서는 정복 당하기 이전 낙랑군과 요동군의 인구도 살펴 보아야 한다. 삼국지에서는 낙랑군이나 요동군의 인구 규모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으므로 그 이전 한이나 후한대의 기록을 살펴 볼 수 밖에 없다. 한서와 후한서에 나타나는 요동군, 낙랑군, 현도군의 인구 규모는 다음과 같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7만2654호

 27만2539명

 현도군

 5만5972호

 22만1845명

 낙랑군

 4만5006호

 40만6749명

  후한서 군국지

 요동군

 6만4128호

 28만1714명*

 현도군

 7594호*

 4만3163명

 낙랑군

 6만1492호

 25만7050명

* 표시는 교감 수치 적용 
<교감 수치는 조상현, 고구려의 인구에 대한 시론, 역사학연구 28집, 2006 참조>

후한서 군국지에는 요동군의 인구에 대해 8만174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6만호에서 8만명의 인구라면 1호당 1.3명이라는 극히 비정상적인 호당 인구 수치가 나온다. 당연히 제일 앞에 2라는 숫자가 빠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후한대 요동의 인구를 28만1714명으로 가정할 때 호당 인구수는 4.39명으로 상식선에 근접하게 되므로 이같은 가정의 합리성을 뒷받침한다. 

현도군의 호수도 원본에는 1594호로 적혀 있으나 1594호에서 후한서에 기록된 4만여명의 인구가 나오려면 호당 인구수가 27명에 육박한다는 비상식적 결과가 된다. 이 경우 가장 합리적 해석은 1을 7의 오자로 보아 7594호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때는 호당 인구수가 5.68명이 된다. 

이 표에서 우선적으로 눈여겨 볼 점은 현도군 인구의 급격한 감소 현상이다. 이는 후한대에 접어들면서 현도군 주민 중에 상당수가 군현 지배 밖으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전한대에 비해 후한대에 들어와서 감소된 현도군 인구는 일단 고구려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반대로 전한 시기의 현도군 인구 계산에는 고구려 인구가 합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결국 후한대에 들어와서 현도군 지역에서 실제와 부합하지 않은 명분론적 군현 지배 체제마저 완전히 붕괴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게 본다면 위나라 이후 고구려 영토의 확장 과정에서 추가될 수 있는 인구 규모는 후한대 기록을 토대로 요동군에서 28만1714명, 현도군에서 4만3163명을 합산한 인구를 기준으로 약간의 가감이 가해진 수치가 될 것이다. 

낙랑군 인구는 계산법이 조금 복잡하다. 낙랑군의 경우도 전한대에 비해 후한대에 들어가서 인구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중국 사료들은 낙랑군 동부와 남부 등 낙랑군 외곽지역 주민 중 상당수가 점차 군현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인구 감소 현상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낙랑군 동부지역(특히 낙랑군 동부도위)의 경우 동예와 옥저 호구 2만5000호가 군현 지배에서 이탈하게 되므로 이미 중국 삼국시대에 들어가면 이들 집단의 인구는 별도로 계산된다. 그러므로 고구려 영토 확장과정에서 합류하는 낙랑 인구를 계산할 때는 중복 계산의 위험이 있는 전한대의 인구보다는 동부도위가 폐지된 이후 후한대의 인구를 토대로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이후 낙랑군 남부지역은 대방군 설치 과정 등을 거치면서 다시 군현 지배가 강화됐으므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합친 인구 규모는 전한대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후한서 군국지의 낙랑군 인구 규모보다는 컸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본다면 고구려 정복한 낙랑군과 대방군의 인구는 후한서 군국지의 낙랑군 인규 규모다 더 클 수도 있다. 이를 토대로 보면 25만7050명보다는 조금 증가한 수치가 고구려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있는 인구가 될 것이다.

고구려 인적 자원의 기초가 되는 후한~위진대의 만주와 북한 지역 인구 분포


정리하자면 고구려의 정복과정을 통해 고구려 인구 풀로 합류한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의 인구 규모는 후한대의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인구를 기초로 이보다 조금 더 증가한 수치를 대입하면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58만1927+명이라는 수치를 얻을 수 있다. 중국 삼국시대 고구려, 부여, 동예, 옥저의 인구는 67만5000명이고 이후 고구려에 정복된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의 인구는 후한대를 기준으로 58만1927+명이므로 영토 확장을 거친 고구려의 인구는 기본적으로 125만6927+명에서 출발하게 된다. 이 숫자는 이옥 교수가 1984년에 주장했던 고구려 인구 69만7000명의 2배에 달하는 수치다. 다시 말해 구당서 등 각종 사료에 나오는 고구려 호구 69만7000이 호구가 아니라 인구라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좀 더 정확한 인구 규모 산출을 위해서는 중국 내지로 탈출한 낙랑, 요동군 주민의 수치나 백제 지역으로 합류한 인구까지 고려해야하나 정확한 수치를 확정하는 것은 현재의 사료로선 불가능하다. 다만 당에 내투한 고구려인 묘지명을 보면 5호16국의 대혼란기에 오히려 고구려로 이주해 가는 한인들의 사례도 다수 발견되므로 이런 증가분 숫자도 고려해야할 것으로 보인다.이 점을 생각하면 고구려가 4세기대에 요동군, 낙랑군을 확보하면서 획득한 인구 수는 후한대 요동군, 낙랑군의 인구보다 적지는 않을 것 같다.

또한 여기에는 시대 경과에 따른 자연 증가분이나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되는 말갈 일부 집단의 인구수, 북연 멸망과정에서 고구려 영토 내로의 강제 이주된 집단 등 고구려 영토 확장 과정에서 수반되는 각종 증가요인을 고려하지 않았으므로 정복 이후 고구려 인구는 125만 6927+명 보다 더 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더더욱 멸망 당시 고구려 인구가 69만7000명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이옥 교수가 90년대 이후 고구려 인구가 69만7000명이라는 주장을 포기하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구려 전성기 인구 21만508호를 토대로 고구려 인구가 100만(21만508X5=105만2540명)이 넘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것은 이같은 중국 군현 인구의 합산 문제를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조선시대 인구 기록의 문제점

이상의 검토를 통해 볼 때 각종 사료에 기록된 고구려 인구 69만7000호가 호구가 아니라 인구수라는 주장은 무리하다는 것이 분명해 졌다. 이제 또 다른 비판, 조선시대 인구 기록을 토대로 고구려 인구가 300만명이나 될리 없다는 주장에 대해 검토를 해보자. 

이미 이 블로그에서 쌍령전투 당시 경상도 인구 규모 추정을 할 때 밝힌 바와 같이 조선시대 호구나 인구 기록은 현대의 인구 계산방법과 큰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각종 기록상에 등장하는 호구나 인구는 실제 호구나 인구가 아니라 세금이나 병역자원 계산시 지역별로 할당할 규모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같은 호 기록을 자연호가 아닌 법정호라고 부른다. 실제 호구의 규모가 아니라 어떠한 법적 기준을 의미하는 수치일 뿐이라는 뜻이다. 혹은 일정한 재산이 있어 각종 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인구만 계산했다고 생각하는 학설도 있는데 어느 것이든 조선시대 호구 관련 기록은 실제 인구와 일치하지는 않다는 점에선 비슷한 견해를 보여준다. 당연히 위 이옥 교수의 주장처럼 조선시대 인구가 얼마인데 고구려의 인구가 300만명을 넘을 수 있느냐는 의문은 그 전제-조선시대의 인구-자체가 불투명하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도별 호구 총합은 22만6310호이고 구수는 70만2870명이다. 군별 호구 총합은 20만6653호에 구수는 74만34220명이다. 하지만 이같은 조사 수치에 대해 이미 조선 당대에 불만과 의문이 제기된다.

本朝人口之法, 不明錄于籍者, 僅十之一二。 國家每欲正之, 重失民心, 因循至今, 故各道各官人口之數止此, 他道皆然。

조선조는 인구의 법이 밝지 못해 각종 장부에 적힌 것이 경우 10에 1~2일 뿐이므로 나라에서 매번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만 너무 심하게 하면 민심을 읽게 되므로 미적거리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그 탓에 각 도와 각 지방관의 인구 수가 이렇게 되었으며 다른 도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세종실록지리지, 경기도조>


결국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인구는 실제 인구의 1/10~2/10에 불과하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실제 세종대의 인구는 350~800만명에 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옥 교수가 언급한 17세기, 다시 말해 조선 후기에 들어가서도 인구 추계의 불확실성은 계속된다. 조선시대 인구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본 자료인 호구 총수에 따르면 인조대의 조선 인구는 152만명에서 179만명으로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인구 수치는 실제 인구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1639년의 조선 공식 인구는 152만여 명이다. 하지만 인조실록을 보면 1626년 호패청에서 일종의 신분증에 해당하는 호패를 발급하면서 집계한 성인 남자 숫자만 226만명이다. 여기에 여자를 고려하면 500만명에 육박하게 되고, 호패를 발급 받지 않은 미성년자까지 감안할 경우 인구 총계는 순식간에 800만명에 육박할 수 있다. 이 같은 추정 실제 인구 규모는 호구총수의 인구 규모 152여만 명의 5배에 달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블로그, 
"경상도 지역 병력자원과 인구로 본 쌍령전투 참전 병력 검증"을 통해 이미 상론한 바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옥 교수와 달리 조선 건국 당시 인구 규모를 1000만명으로 보는 견해(김철, 韓國の人口と經濟,1965)나 조선 세종대를 기준으로 이미 800만명에 도달했다는 견해(이영구 외, 조선시대 인구 규모 추계, 경영사학)도 존재한다. 조선시대 인구 규모의 정확한 수치에 대해선 아직까지 논쟁이 진행 중이나 최소한 조선시대 인구 규모를 토대로 삼국시대 인구 규모를 역산하려는 시도는 의미가 없음을 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인구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 조선시대 인구이므로 이를 토대로 삼국시대 인구 규모에 대해 특정한 학설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이라는 이야기다.

역시 송사를 기초로 고려 인구가 210만명이었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으나 조선시대 구수 기록과 마찬가지로 고려대의 호구/인구 기록의 완정성에도 의문을 제기해 봄직하다.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삼국시대의 호구기록이나 고려, 조선시대의 호구, 인구은 모두 그 자체로는 완정성에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으므로 그 수치 자체에 대한 충분한 내재적 검토 없이 다른 시대와의 획일적 비교를 통해 특정한 시대의 호구 자료를 무시하는 것은 매우 모험적인 시도가 될 것 같다.


◆ 고구려 말기 전쟁에서 추정할 수 있는 인구수 

이밖에 고구려 인구가 69만7000명에 불과했을 것이란 견해를 비판할 수 있는 또다른 간접적 정황 자료들도 있다. 구당서 권 199 북적발해말갈전에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발해 왕자 대문예가 당에 대한 적대 정책에 반대하면서 "고구려 전성기에는 강병 30만으로 당에 대항했다"는 내용이다. 

대문예의 발언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가지고 있을까. 실제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과정을 보면 고구려가 30만 내외의 병력을 동원했을 개연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당장 주필산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군만 말갈을 제외하고도 10만이고 요동성, 백암성, 가시성의 고구려군도 2만4100명에 달한다. 여기에 장손무기는 안시성 공략 직전 건안성과 신성에도 적들이 10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요동 일대에서 대략 20만을 넘나드는 고구려이 작전 중임을 알 수 있다. 고당 전쟁에 대한 제 사료의 수치를 신뢰한다는 전제 하에 후방 평양과 대신라전선에 포진했던 수비군을 감안한다면 30만으로 당에 대항했다는 대문예의 발언이 신빙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당시 여군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이므로 강병 30만은 순수한 남자인 것이 당연하다. 여기에 미성년자가 동원되었을 확률도 없을 뿐더러 동원에 제외되는 노약자도 있었을 것이므로 남자 동원율 100%라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실제 고구려 남자 인구수는 30만을 훌쩍 넘을 수 밖에 없다.

고구려의 병력 동원율을 정확하게 산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으나 일단 70만에 가까운 호구 기록을 인구 숫자로 보는 견해에 따라 70만의 인구에서 30만명의 군대를 동원할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이때 고구려의 총인구 수는 (30+@)x2=70가 되므로 @가 5만명, 다시 말해 고구려인 남자의 병력 동원율은 85%(30/35)가 된다. 전체 남자 인구의 85%를 전쟁에 동원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전쟁 역사에서 볼 때 불가능한 수치다. 결국 고당 전쟁 당시 출전한 고구려 병력이 30만명이었다는 대문예의 발언을 신뢰하는 한 고구려 멸망시 인구가 69여만명이란 주장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고구려의 총인구를 125여만명으로 가정하고 30만명의 출전 병력을 얻으려면 남자 병력동원율은 50%에 육박하게 된다. 더 낮추어서 총인구를 300만으로 가정하고 출전 병력을 30만을 얻으려면 남자 병력동원율 20%가 된다. 병력동원율 20%도 전근대 전쟁에서 볼 수 있는 병력동원율 수치 중에서는 매우 높은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실제 고구려의 인구는 정복지역의 과거 인구수 125여만명보다는 호구수를 토대로 계산한 315여만명이 더 현실적 수치로 보인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고구려가 부여, 동예, 옥저, 낙랑군, 요동군, 현도군에 대한 정복과정을 거치면서 대략 125여만명 내외의 인구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 수치에서 자연 증가율과 기타 증가분을 적용한 수치와 호구 기록을 토대로 환산한 315여만명 사이의 숫자가 멸망 당시 고구려의 인구가 될 것이다. 사료가 부족한 현재 상태에서 어떤 단정적인 숫자를 제시하기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고당전쟁 관련 사료에 제시된 고구려군의 동원 규모를 신뢰한다면 고구려 멸망시 인구수는 125여만명 보다는 315여만명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 두 줄 요약
1) 고구려 인구가 69만이라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2) 고구려 인구는 125~315만 사이로 보이지만 고당전쟁시 고구려군 동원 규모를 고려한다면 315만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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