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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0>제25대 평원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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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의 고려는 어째서 이렇듯 점차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 걸까.

《아방강역고》의 저자로 유명한 다산 정약용 선생께선,

'고구려론'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글을 쓰신 적이 있다.

 

고구려는 졸본에 도읍을 정한 지 40년 만에 불이성으로 옮겼고 여기서 425년 동안 나라를 누렸다. 이때는 군사력이 매우 강성하여 국토를 널리 개척하였다. 한(漢)과 위(魏) 때 중국이 여러 번 군사를 내어 쳐들어왔지만 이길 수 없었다. 장수왕 15년(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고 여기서 나라를 누린 지 239년 만에 멸망하였다. 백성과 물자가 풍부하고 성곽이 견고했지만 결국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이는 어째서였을까?

 

압록강 북쪽은 기후가 일찍 추워지고 땅이 몽골과 맞닿아 있어,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용감하다. 또 강한 오랑캐와 섞여 살기 때문에 사면으로 적국의 침입을 받게 되므로 방비가 매우 튼튼했었다. 이것이 나라를 장구히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이다. 평양은 압록강과 청천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산천은 수려하고 풍속이 유연하다. 그리고 밖으로 견고한 성과 큰 진(鎭)이 겹겹으로 방호하고 있는데, 백암성(白巖城)ㆍ개모성(蓋牟城)ㆍ황성(黃城)ㆍ은성(銀城) ㆍ안시성(安市城) 등의 성이 앞뒤로 잇달아 바라보이고 있다. 이러니 평양 사람들이 어찌 두려움을 가졌겠는가. 고연수와 고혜진이 적에게 성을 내주고 항복했으나 이를 문죄하지 않았고, 개소문이 군사를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건만 이를 금하지 않았고, 안시성의 성주가 탄환만한 작은 성으로 당(唐)의 백만 대군을 막았지만 이를 상주지 않았다.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평양을 믿은 때문이다.


아아, 평양은 믿을 수 있는 곳인가? 요동성이 함락되면 백암성이 위태롭고, 백암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이 위태하고, 안시성이 함락되면 애주(愛州)가 위태롭고, 애주가 함락되면 살수(薩水)가 위태롭다. 살수는 평양의 울타리라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가죽이 벗겨지면 뼈가 드러나게 된다. 이런데도 평양을 믿을 수 있겠는가. 진(晉)과 송(宋)은 남쪽으로 양자강(揚子江)을 건넌 뒤 천하를 잃었으니 이는 거울삼아 경계해야 될 중국의 전례이고, 고구려는 남쪽으로 압록강을, 백제는 남쪽으로 한강을 건넌 뒤 나라를 잃었으니 이는 귀감으로 삼아야 할 우리 나라의 전례다. 경전(經傳)에는,
"적국(敵國)으로 인한 외환(外患)이 없는 나라는 망한다."

했고, 병법(兵法)에는 이렇게 말했다.

"죽을 곳에 처해야만 살게 된다."

 

고려의 멸망이 평양 천도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 다산 선생의 주장을 보면,

국내성에 비해 따뜻한 기후가 사람들의 긴장을 느슨하게 만들었고

고려의 기풍이 점차 나약해졌다는 것이 그 골자다. 평양의 지세만 믿고,

제대로 된 방어 전략을 세우고 있지 않다가 망했다고 하는ㅡ것으로

어찌 보면 중국 한족 왕조가 북방민족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지 않고

만리장성 하나 쌓아놓고 그 안에서 편안하게 안주하려고만 했던 것이

결국 패망의 원인이었다는 오늘날의 분석과도 묘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다.

 

사람은 편안해지면 나태해지는 것일까? 그건 어쩔수 없는 것일까?

동북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던 고려가 결국 그 기상을 떨치지 못한 것이

나약하게 변해버린 천성 탓이라고 하는 다산의 말을 계속 듣게 되면,

사람은 결국 이리저리 긴장하면서 마음에 짐을 지고 살아야만 한다는 것 같아서

조금, 서글퍼진다.

 

[平原王<或云平崗上好王>, 諱陽成<隋唐書作湯> 陽原王長子. 有膽力善騎射. 陽原王在位十三年, 立爲太子, 十五年, 王薨, 太子卽位.]

평원왕(平原王)<혹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양성(陽成)<수서(隋書)와 당서(唐書)에서는 탕(湯)이라고 하였다.>이고 양원왕의 맏아들이시다.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셨다. 양원왕이 재위 13년에 태자로 세우셨고, 15년에 왕께서 돌아가시자 태자가 즉위하셨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제25대 평원왕. 휘는 양성(陽城)이며, 《수서》와 《당서》에 나온 이름을 따라 탕(湯)이라고도 하고,

혹은 《남사(南史)》의 기록을 따라 고양(高陽)이라고도 하는데, 글자들이 전부 온도가 무지하게 높다.

(아마도 '온천'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 유명한 왕은 아니지만,

그 딸 덕분에 유명세 좀 탔던 왕이다. 희대의 로맨스 아닌가. '내 남편 내가 고른다'는 그 철없는 딸,

바보를 용장으로 만들어와서는 나라 기둥 하나 거하게 세워놓은 '내조의 여왕'으로 거듭났으니....

 

[二年, 春二月, 北齊廢帝封王爲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

2년(560) 봄 2월에 북제의 폐제(廢帝)가 왕을 사지절(使持節) 영동이교위(領東夷校尉) 요동군공(遼東郡公) 고려왕으로 봉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문자명왕 말기부터 시작해, 안장왕과 안원왕, 양원왕에 이르기까지,

무력을 지닌 귀척들간의 대립과 그 무력을 업고 벌어진 왕권다툼으로

어수선하던 혼란의 시기가 이때는 다소 진정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왕 자신부터가 이미, 담력도 있고 활도 잘 쏘고, 말도 잘 타는 무인(武人)이었으니,

기회만 잘 따라준다면 왕권을 다시 회복할만한 역량은 충분한 것.

 

[王幸卒本, 祀始祖廟. 三月, 王至自卒本, 所經州郡獄囚, 除二死, 皆原之.]

왕께선 졸본으로 행차하시어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냈다. 3월에 왕께서 졸본으로부터 돌아오시면서 지나는 주, 군의 옥에 갇힌 죄수 중에서 두 가지 사형죄[二死]를 빼고는 모두 풀어주셨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2년(560) 2월

 

졸본에 행차한 이 해가 태왕의 실질적인 '원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왕은 홀승골성 졸본의 시조묘 사행(祀行)을 통해

그러한 의지를 귀척들에게 내비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수왕 이후 선대 양원왕 때까지 죽, 경황 탓으로든 무엇으로든

자주 찾아가 뵙지 못했던 시조묘에, 양성왕은 다시 행차한다.

그리고 두 가지 사형죄를 제외한 나머지 가벼운 죄수들에 대한 대사면령을 내리는 등,

왕으로서의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는 이벤트를 펼친다.

 

그리고 이 무렵 왜왕 흠명(欽明, 긴메이) 때에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처음 '우유'라는 것이 전해졌다고 그래서 잠깐 얘기하는데, 사실 '우유' 하면

서양을 좀, 많이 떠올리실 분이 많겠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이미 상(商)의 갑골문에서 '우유'를 가리키는 글자가 나오고 있는데,

주로 만리장성 북쪽 유목민들이 마시던 것이 중국에는 '약'으로서 그게 전래가 됐다네.

그러다가 불교가 전래되면서는 본격적으로 우유가 퍼지게 됐는데,

불교에서 고기는 먹으면 안 되지만 우유는 먹어도 된다고. 왜 그 석가모니 부처님이

거의 미라같은 몰골로 고행하실 때 수자타(善生女)라는 소녀가 공양한 '우유'를 잡수시고

기운을 차리셨다잖나.

 

고려 역시 북방 유목민족들과 지내다 보니까 우유를 좀 많이 마셨을 것 같은데,

<뜻밖의 한국사>라든지 우리나라 낙농우유협회 같은 데 보니까

왜왕에게 '우유'를 바친 사람으로 '복상(福常)'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일본서기》에도 안 나오는 사람이라, 이리저리 찾아보니

《신찬성씨록》에 이름이 있다고 해서 봤는데 '복상'이라는 이름은 없고

그냥 '선라사주(善那使主, 센나노오미)'라는 이름만 나온다.

이 사람의 아버지 이름이 지총(智總). 고려 사람은 아니고 백제 사람이다.

(책이 틀린 건가. 아니면 내가 내용을 잘못 찾은 건가?)

 

일본에서는 우유를 우주(牛酒), 술의 일종으로 분류했다.

지총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서 '우유' 검색하고 일본 쪽으로 가니까,

왜왕 흠명(긴메이) 21년(560년, 양성왕 2년)에 왜장 대반좌례비고(大伴佐弖比古오오토모노 사데히코)를

따라서 왜에 왔는데(대반좌례비고는 551년에 백제가 고려를 칠 때 참전한 그 대반련협수언이다),

왜로 가면서 그는 내외의 법전, 의학서적, 명당 그림 같은 서화 합쳐 164권, 불상 한 구,

기악 도구 한 구씩을 갖고 왔다.(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디 갈 때 꼭 뭐든 바리바리 싸갖고 간다)

이때 그가 갖고온 의학 서적에 마침 우유 짜는 법에 대한 기술이 있었고,

이로써 우유가 일본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

(지네들은 이미 야요이 시대부터 우유를 마시고 있었을 거라 해놨다만....)

그리고 그 지총의 아들이 선라사주(센나노오미). 왜왕 효덕(孝德고토쿠)에게

처음 '우유'를 바친 공로로, 왜왕으로부터 '화약사주(和藥使主야마토노쿠스시노오미)'라는

성씨를 하사받고 그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 라고 《신찬성씨록》은 전하고 있다.

 

백제와 고려의 풍속은 서로 닮은 곳이 많았으니까, 백제에서도 우유 마시는데

고려에서 마시지 말라는 법도 없지. 더구나 백제는 고려에서 갈라져나온 분파니까

고려로부터 백제가 우유를 전수받았을 가능성도 있고. 고려는 일찍부터 유목민족과

교류가 있었던 나라니까 유목민족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우유를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

 

<이미 고려 때부터 우리는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고려조에는 천자에게 진상된 유제품으로 '낙수'라든지 '낙죽' 얘기가 나온다.

《해동역사》는 송의 도곡(陶穀)이란 사람이 지은《청이록(淸異錄)》라는 책을 인용해,

고려에서“수(酥)를 대도규(大刀圭)라 부르고, 제호(醍醐)를 소도규(小刀圭),

낙(酪)을 수도규(水刀圭), 유부(乳腐)는 초창도규(草創刀圭)라 했다.”고 기록해놨다.

모두 우유로 만든 유제품인데, 소나 양의 젖을 끓여 만든 음료가 '대도규'이고,

그걸 다시 죽처럼 졸인 것(우유죽?)은 '수도규', 그 중에서도 소젖에서 얻는

우락 위에 엉기는 기름덩이 모양의 액체(혹시 치즈?)를 '소도규',

중국식 취두부 같은 부유(腐乳, 발효시킨 우유?)인 '유부'를 '초창도규'라고 부르며

고려에서는 모두 먹었다. 실상 몽골족이 우유를 가져온 게 아니라

이전부터 우리 풍속에 우유가 있었던 것.

 

조선조에도 우유를 많이 마셨는데, 세종이 "청주 국고에 보관된 묵은 쌀과 콩으로

젖소를 사서 그걸로 우유를 양녕대군에게 매일 마시게 해라"고 충청감사한테 명을 내렸단다.

《세종실록》에. 물과 쌀가루 끓인 것에 우유를 넣고 소금물로 간을 맞춘 우유죽이나,

우유와 무리(물에 불린 쌀을 물에 섞어 맷돌에 갈아 체로 쳐서 가라앉힌 앙금)을 섞어

끓여 만드는 타락죽 같은 것이 모두 이 시대의 유제품. 다만 이 무렵에는 상류층에서만,

그것도 영양제나 약용으로만 쓰였지 지금처럼 대중적인 음료로 쓰이진 않았다네.

우리 나라 토종소가 우유를 잘 못 짜는 것도 있고, 또 유학자들이 그걸 안 좋아했다.

소젖은 송아지 주라고 나오는 건데 그걸 인간이 다 마셔버리면 송아지는 뭘 먹고 사느냐고.

어찌 보면 참으로 귀여운(?) 생각이 아닐수 없겠다.

 

조선조 유학자들은 송아지를 생각해서 우유를 좀 적게 마시자는 환경론적인 말을 하며 우유를 멀리했는데,

나는 참... 우유 먹고 뇌에 구멍뚫려 죽을까봐 겁나서 우유 마시자는 말을 못하겠으니...

시류가 그렇다면 그렇고 운명이라면 어쩔수 없지만 한때 우유를 그렇게나 많이 마시고 살았던 나로서는

참 슬픈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유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三年, 夏四月, 異鳥集宮庭. 六月, 大水. 冬十一月, 遣使入陳朝貢.]

3년(561) 여름 4월에 이상한 새들이 궁정 뜰에 모여들었다. 6월에 홍수가 났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진(陳)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궁정에 이상한 새가 모여들면 항상 좋은 일, 이국에 대한 정벌의 기사가 따랐었는데....

난데없이 홍수라니. 쓰잘데기 없는 조공까지 하고 있는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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