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x7arVT (사라진 듯)

*"발해 거란 전쟁의 재검토 - 강성봉" 중 "2.요동을 둘러싼 양국의 충돌"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요동을 둘러싼 발해,거란 양국의 충돌
강성봉 성북문화원 2014

1) 동아시아 정세와 거란의 발흥

9세기 후반부터 발해를 둘러싼 동아시아 각국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당과 신라는 지방세력의 할거로 인해 각각 5대 10국과 후삼국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특히 당은 8세기 중반 안사의 난으로 인해 중앙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를 틈타 지방에서는 진번 세력들이 난립하였다. 당의 내부적 사회적 모순은 점차 가속되었고, 만주 지역 및 한반도 지역 등에 대한 간섭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있었다. 한편 한반도에서도 신라에 대한 고려, 후백제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후삼국시대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1) 이때 새로운 강자 거란이 발흥하였고, 그 중심은 단연 요 태조인 아율아보기였다.

거란은 동호계통으로 퉁구스와 몽골의 혼혈족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예부터 요하 상류에 흘러들어가는 시라무렌강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2) 혜성처럼 등장한 아율아보기는 916년 거란의 각 부족을 통일하였다. 황제에 등극한 아율아보기는 수도를 임황(臨潢)지역으로 옮기고, 한인(漢人) 지식인을 적극 임용하여 제도와 관직을 제정하였다. 또한 거란 문자를 만들며 새로운 대제국의 건설을 시도하였다. 거란은 국가적 체제를 정비하면서 한편으로 주변 국가들에 대한 대규모 정복 활동을 펼쳤다.3) 거란의 궁극적인 목적은 경제 문화적 중심지인 중원지방으로의 진출이었다. 초창기에 중원을 침범한 것은 말에게 먹일 목초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국가적 기틀이 만들어진 상황에서는 제국 유지에 필요한 물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4)

아율아보기는 먼저 901년 중원 지방을 침공한 데 이어, 911년 봄 정월에는 친히 서부해와 동부해를 정벌하였다. 이에 해와 습의 땅을 모두 소유하게 되었고, 거란의 영토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 백단(白檀)에 미쳤으며, 서쪽으로 송막(松漠)을 넘었으며, 북쪽으로 황수(潢水)에 이르러 대개 5부가 모두 거란 판도에 들어왔다.5) 916년 황제로 등극한 이후에는 삭주, 신주 등 대북(代北)에서 하곡(河曲)에 이르는 지역, 음산(陰山)을 넘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였다. 921년에는 중원의 10여 성을 함락시키고, 한인들을 포로로 잡아 거란의 내지로 이주시켰다.

거란은 중원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 배후의 안전확보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서쪽의 당항등과 동쪽의 발해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아율아보기는 원정 때마다 배후의 허점을 걱정하였고, 이를 위해 배후세력과 일시적으로 연대하거나, 군사를 보내 무력행동을 펼치는 등 양동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당시 거란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발해였다. 거란은 서쪽변방에 대한 불안감으로 서방정벌을 마친 후에야 발해를 공격하고자 했다. 경략경로는 요컨대 서방 정벌, 동방(발해) 정벌, 중원 정벌의 순으로 계획적이고 치밀한 구상 속에 행해졌다.6)

2) 거란의 요동침략과 발해의 대응

거란은 발해정벌에 앞서 20여 년간의 노력 끝에 요동지역을 확보하여 발해침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908년 진동에 성을 축조하여 발해와 중원지방과의 연결을 차단하였다. 909년에는 아율아보기가 직접 요동지방을 방문하였고, 915년에는 압록강에서 낚시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7) 거란의 요동진출이 본격화되자 발해는 중원의 양(梁)과 연계를 모색하였고, 918년에는 거란과 화친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발해는 교류와 견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외교적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발해의 영토였던 요양성이 거란의 수중에 들어가고, 919년 2월에는 그곳에 옛성을 수리하여 한민(漢民)과 발해호(渤海戶)를 이주시키며 동평군(東平郡)이라는 거란의 행정구역으로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8) 이어 거란은 921년 12월에 단주와 순주의 주민을 동평군과 심주(瀋州)로 옮기고, 923년 3월에는 해(奚)를 복속하였다. 이에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자구책으로 고려 및 신라와 결원협정을 맺기도 하였다.

한편 거란은 924년 5월 계주의 주민을 요주로 옮기고 서방정벌을 다시 시작하였다. 발해는 이 틈을 기회로 삼아 종래의 소극적 자세가 아닌 적극적 행동을 개시하였다. 즉 거란의 통치권역인 요주를 공격하여 요주자사 장수실(張秀實)을 죽이고, 그곳에 있던 민들을 탈취하였다. 2개월 뒤 거란의 반격이 이어져 또다시 무력충돌이 일어났으나, 거란은 아무런 소득없이 퇴각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거란은 발해에 대한 전면침공을 감행하게 된다. 거란의 발해침공관련 서술은 이하 4장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주석

1) 송기호, 「발해 멸망기의 대외관계 - 거란, 후삼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한국사론 1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7, 50~52쪽
2) 한규철, 「발해와 유목왕조의 교류」, 『고구려발해연구』34, 2009, 31쪽.
3) 김재만, 『거란민족발달사의 연구』, 박사학위논문, 1974, 43쪽.
4) 송기호, 「발해 멸망기의 대외관계 - 거란, 후삼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한국사론 1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7, 73쪽.
5) 『遼史』 卷1, 太祖本紀上, 太祖5年 春正月, “丙申 上親征西部奚 奚阻險 叛服不常 數招諭弗聽 是役所向輒下遂分兵討東部奚 亦平之 於是盡有奚Ⱁ霫之地 東際海 南曁白檀 西踰松漠 北抵潢水 凡五部 咸入版籍”.
6) 金渭顯, 『遼金史硏究』, 裕豊出版社, 1985, 219~220쪽.
7) 『遼史』 卷1, 太祖本紀上, 太祖9年(915) 10月, “戊申 鉤魚于鴨淥江”.
8)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神策4年(919), 二月, “丙寅 修遼陽故城 以漢民Ⱁ渤海戶實之 改爲東平郡 置防禦使”. 태조가 발해를 정벌할 때 먼저 동평부를 격파하고 그 백성들을 이곳에 옮겨 살게 하였다는 지리지의 기사가 나타난다. 즉 요동지역을 먼저 확보한 후 발해침공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遼史』, 卷38, 志8, 地理志2, 東京道, 昌義縣, “太祖伐渤海 先破東平府 遷民實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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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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