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91801.html?_fr=mt1

[단독] 전두환, 박정희 사망 일주일 만에 12·12 “확고한 결심”
등록 :2017-04-22 09:39 수정 :2017-04-22 10:18

[토요판] 커버스토리
독점 공개 <5공전사>



▶ <한겨레>가 9권 분량의 <5공전사>를 단독 입수했습니다. <5공전사>는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5공전사>는 박정희 사망 이후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가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며 만든 책입니다. 신군부가 편찬한 이 책은 신군부의 왜곡된 시각을 반영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밝힌 사료입니다. ‘승리자’에서 ‘역사의 죄인’으로 전락한 이후 그들이 해온 거짓말들을 그들의 말로 입증할 증거이기도 합니다. 책의 주인공은 전두환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회고록 정치’에 나선 전두환의 거짓말을 전두환의 책 <5공전사>로 진실 규명합니다.

“인마, 쏘지마! 네 아버지가 죽는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응접실에서 정승화 총장을 인질로 잡고 있던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부) 허삼수 대령이 소리쳤다. 공관 2층에서 한 청년이 38구경 권총을 가지고 내려오던 중이었다. 건물 밖에서 불 켜진 응접실을 주시하고 있던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박아무개 상사가 엠(M)16 소총으로 유리창을 박살냈다. 그리고 안으로 뛰어들어 총장 아들에게 총을 겨눴다. 청년은 2층으로 도주했다. “손들어! 빨리 나가자!” 총장에게 총을 겨눈 박 상사의 고함이 밤의 정적을 깼다.

<한겨레>가 단독 입수한 <제5공화국전(前)사>(이하 <5공전사>)엔 10·26과 12·12 및 5·17 쿠데타, 5·18과 관련한 긴박한 순간들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5공전사>는 국내 중견학자 8명이 참여해 당시 쿠데타 직간접 관련자 300여 명을 인터뷰하고 펴낸 책이다. 신군부의 시각으로 쓴 ‘승리의 기록’엔 거짓이 적지 않다. 쿠데타를 미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무용담 속엔 ‘진실’이 숨어 있다.


1979년 12월12일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왼쪽에서 다섯째)·노태우(넷째) 등 신군부 주축 세력은 이튿날 보안사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5공전사>

“12월12일 생일집 잔치에 오라”

정승화 참모총장 강제연행은 12·12 쿠데타의 서막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10·26사건)라는 돌발사태가 발생한 뒤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정 총장은 10·26 당시 현장 가까이에 있었다는 ‘약점’이 있었다. 김재규의 초대를 받아 궁정동 안가 인근에서 중정 간부와 저녁식사 중이었기 때문이다. 합수본부는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정 총장을 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전두환은 11월6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군이나 외부의 개입은 없었다”고 발표했다. 정 총장의 10·26 관련 혐의를 부인한 것이다.

■ 전두환의 ‘정승화 제거’ 사전 계획 

하지만 <5공전사>를 보면, 전두환은 이미 11월 초에 정 총장의 ‘제거’를 결심한다. 그동안 11월 중순 이후부터 12월 초 사이로 알려진 것과 다른 대목이다. <5공전사>엔 “노태우 장군에 의하면 (10·26)사건의 수사를 완결하기 위하여 정 총장을 수사해야겠다는 합수본부장 전 장군의 결심이 이미 11월 초에 확고히 섰으며 다만 적절한 시기만 기다려 온 것”이라고 돼 있다. 전두환은 “11월 중순부터 계획에 포함된 요원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 내밀히 임무를 부여하고 자체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기 시작했다”고 나와 있다. <5공전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치밀한 연행계획이 없이는 일의 성사는 어려운 것이었다”며 ‘사전 준비설’을 시인한다. 전두환은 보좌관 허화평 대령, 합수본부 조정통제국장 허삼수 대령,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 그리고 평소 가까웠던 수도경비사령부 30단장 장세동 대령, 33단장 김진영 대령과 정 총장 문제를 논의했다. 이 책엔 “(정승화 총장 연행의) 전체 계획을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이 조정, 통제하여 전 장군께 보고드리는 형식을 취했다”고 돼 있다.


신군부는 <5공전사>에서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연행 작전을 그림으로 자세히 묘사했다. <5공전사> ※이미지를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정 총장 강제연행은 ‘하극상 반란’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통령의 사전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것은 불법이다. <5공전사>는 합수본부 허삼수 대령 등이 저녁 7시께 총장 공관에 도착한 뒤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그날 참모총장의 응접실을 방문한 육군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이 인사 뒤 본론을 꺼냈다.

“(10·26사건을 조사하던 중) 김재규와 총장님 사이에 돈이 거래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정 총장은 “그런 일 없다고 했지 않아, 그런 일 없어!”라고 단언했다. “법적인 증빙자료를 얻기 위하여 온 것이니까 총장님의 육성으로 말씀을 녹음했으면 좋겠습니다.” 정 총장은 “그러면 하지 뭐”라고 했다. “저희들이 아직 녹음 준비를 못 해왔기 때문에 저희들이 준비한 곳으로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에 정 총장은 ‘너희들 어디서 왔나?’라고 언성을 높였다. 허 대령이 “저희들은 대통령 각하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거짓말이었다. 허 대령 일당은 정 총장을 끌고 현관까지 나와 차에 태웠다. 그 와중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도착해 정 총장은 합수본부 수사팀에 넘겨졌다. 저녁 7시21분이었다. 강제연행에 걸린 시간은 17~18분에 불과했다.

1979년 10·26사건 수사 발표 때 정승화 혐의 없다고 밝힌 전두환, 실제로는 발표 전부터 ‘제거’ 준비
지금까지 알려져온 시점보다 빨라, 박정희 사망하자마자 쿠데타 계획
노태우 “전 장군의 결심 이미 11월초  확고히 섰으며 적기만 기다려 왔다” 허화평이 전체 계획 조정해 보고
‘거사일’을 12월12일로 잡은 것도 이튿날 국무회의에서 재가 노린 것

■ “30경비단 중견 장성 모임이 12·12의 발단” 

12·12 쿠데타 주역들 중엔 ‘하나회’ 출신들이 많았다. 1952년 입학한 정규 육사 11기들이 시작한 모임이 후배들로 이어지고 일부 선배 장교들이 후견인으로 참여하면서 파벌로 발전했다. 전두환은 하나회 후배 중에서도 특전부대 출신들을 포섭 1순위로 꼽았다. 전두환은 1960년 미국 포트베닝의 육군보병학교 특수전 교육기관에서 ‘레인저 코스’(유격훈련 과정)를 거친 뒤, 72년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지내는 등 특전부대 창설자로 꼽힌다. 전두환은 “12월12일 오후 6시30분 경복궁 안 수경사 30경비단장실로 오라”고 장성 9명을 초청한다. 이 모임은 그들 사이에 ‘생일집 잔치’라는 은어로 불렸다. <5공전사>는 “이 30단에서의 중견 장성들의 모임이 사실상 12·12사태의 발단이요, 성공의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오른쪽)이 1979년 10월26일 저녁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를 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두환은 은밀하게 ‘거사’ 참여자를 접촉했다. <5공전사>엔 “전 장군이 고도의 보안을 유지한 채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극히 제한된 수의 인물들에 한해 내밀한 접촉과 상의를 해갔다”고 소개하고 있다. 전두환은 육사 11기로 “생도 때부터 가장 막역한 친구의 하나”인 9사단장 노태우 소장과 가장 먼저 의기투합했다. 노태우는 12월6일 2박3일의 정기외박을 나가 전두환을 만나서 정 총장의 10·26 연루설 등 ‘항간의 여론’을 전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2월12일 오후 6시30분 30단에서 중진 장성들과 모여 정 총장에 대한 조사 문제와 필요성, 대통령께 건의할 문제를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5공전사>에서 확인되는 주요 장면들. 10·26 직후 전두환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제거’의 동기를 읽을 수 있는 대목, 노태우가 정승화에게 합참의장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총장 자리에서 끌어내려는 시도 등이 기록돼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5공전사>에서 확인되는 주요 장면들. 10·26 직후 전두환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제거’의 동기를 읽을 수 있는 대목, 노태우가 정승화에게 합참의장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총장 자리에서 끌어내려는 시도 등이 기록돼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전두환은 이어 20사단장 박준병 소장, 71훈련단장 백운택 준장,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 등의 의사를 물었다. 대부분 하나회 출신 동기·후배들이다. 제1군단장 황영시 중장은 노태우가 접촉했고,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과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에겐 전두환이 12일 당일 연락한다. 황영시는 “(전두환이) 사관학교 생도 시절의 구대장”이었다. 유학성은 “1961년 5·16 당시 최고회의에서 전 장군과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차규헌(육사 8기)은 전두환과 같은 1공수여단 출신이다. 이들 3명은 하나회의 후견인으로 꼽혔던 인물들이다. <5공전사>는 이들이 전두환과 어떤 인연으로 12·12에 참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장기오(육사 12기)도 전두환과 ‘특수부대’ 출신으로 인연이 깊다. 그는 “대위 때 전 장군과 함께 미국 포트베닝 보병학교 레인저(유격훈련) 과정을 이수했고, 전 장군이 제1공수여단장 때 그의 인사참모로 있었던” 인물이다. 장기오는 12월6일 저녁 7시에 사택(연희동) 지하 응접실에서 전두환과 만나 ‘초청’에 응한다. 최세창(육사 13기)도 “대위 때 전두환과 레인저 과정에 함께 유학했던 인연”이 있다. 전두환이 제1공수여단장이었을 때 부단장을 했다. 전두환은 12월9일 연희동으로 최세창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박희도(육사 12기)는 전두환에 이어 1공수여단장을 맡았다. 박희도는 12월9일 전두환을 만나 ‘깨알 지시’를 받는다. “12일 오후 6시까지 30단으로 오너라. (…) 30단에 올 때 속에는 군복을 입고 겉에는 사복을 입고 오너라.”


1980년 5·18 당시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붙잡힌 광주 시민들이 두 손이 묶인 채 엎드려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총장 내놓고 합참의장이라도 하십시오”

■ 이튿날 국무회의에 맞춰 ‘거사’ 

12월12일 경복궁 안 30경비단 단장실로 9명의 장성들이 속속 도착했다.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은 이들에게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정 총장 수사문제에 대한 보고와 승인을 얻으려 오후 6시40분경 최 대통령에게 갔으며, 재가가 날 것으로 기대하고 저녁 7시를 기해서 정 총장을 연행할 계획으로 우경윤과 허삼수 대령이 총장 공관으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전두환은 왜 ‘거사일’을 12월12일로 잡았을까? <5공전사>는 “12월13일은 국무회의가 열려 새로운 내각의 구성을 논의하게끔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 장군은 개각 전날 정 총장을 연행·조사하고 그 결과가 국무회의에 연결, 군의 인사에 반영된다면 10·26사건 수사는 수사대로 완결되고 육군참모총장의 자연스런 교체가 가능하여 군의 신뢰와 단결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전하고 있다. 전두환 세력은 12·12를 통해 군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노태우는 <5공전사>를 통해 “개각하기 전날 정 총장을 모셔다가 혐의 사실을 밝히고 다음에 필요한 충고를 하려 했다. (…)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후배에게 총장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온당한 것 아닌가 건의하려 했다. 만약 정 총장이 그러한 제의에 응하면 우리가 논의하여 총장 대신 ‘합참의장이라도 하십시오’ 하려고 했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전두환은 12월12일 저녁 ‘반대파’ 장성들의 발을 묶어놓는다. 전두환은 12월12일 오후 6시30분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을 ‘연희동 만찬’에 초청했다. 우국일 보안사 준장이 초대 손님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장군들은 저녁 7시40분께 긴급전화를 받고 정 총장의 피습 사실을 알게 됐다. 참석한 장성들은 깜짝 놀라 즉각 마루로 나와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총장 전속부관이 ‘총장님을 구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우리 빨리 가서 총장님을 보호합시다’라고 했다. 3명의 장성들은 연회를 중지하고 부대로 돌아갔다.

‘만찬 초청자’ 전두환은 정작 이날 저녁 6시40분께 ‘계획대로’ 삼청동 총리 공관으로 갔다. 최규하 대통령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지 7일째 되던 날이었다. 전두환은 최 대통령에게 정 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최 대통령은 “내가 군부의 일을 잘 모르니 국방장관을 통해 건의하는 절차를 밟으라”며 거절했다. 하지만 노재현 국방장관은 공관에 없었다. “정 총장의 공관에서 총격이 나자 불순분자의 습격인 줄로 오해하고… 즉시 피신했기 때문”이다. 최 대통령은 전두환의 건의를 받아들일 기미가 없었다. 저녁 7시였다. 전두환에겐 낭패였다. 전두환은 최 대통령이 의사를 바꿀 전망이 보이지 않자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30경비단 ‘지휘부’로 갔다.

황영시가 “우리 함께 대통령에게 갑시다”라며 ‘바람’을 잡았다. 이에 전두환·황영시·유학성·차규헌·백운택·박희도 등 6명은 삼청동 총리 공관으로 다시 가기로 했다. 저녁 8시30분이었다. 전두환은 최 대통령에게 재차 재가를 요청했다. 최 대통령은 또 미뤘다. 유학성이 나서 “각하, 이런 시기에 군이 자칫 잘못하면 혼란이 가중되고 전쟁을 자초하게 됩니다”라고 했다. 사실상의 ‘재가 협박’이었다. 하지만 최 대통령은 “이런 문제는 계통을 통해서 하겠소”라며 거절했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최 대통령과 전화 통화가 연결돼 총리 공관으로 가겠다고 했다.


1980년 8월6일 최규하 대통령이 육군대장으로 진급하는 전두환에게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 노태우, 총리 공관 경비대 장악 지시 

전두환 일행은 일단 상황 유지를 위해 보안사로 갔다. 이들은 “몇 대 안 되는 전화를 가지고 수경사 측 부대 동원을 억지하고 지원부대 동원의 조치를 취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5공전사>는 “지휘부에서 가장 책임이 크고 바쁜 사람은 역시 전두환 장군이었다. (…) 그는 사태가 어떻게 발전되든 그에 대한 전 책임을 져야만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이 문구는 1995년 12월 검찰에 구속된 전두환이 ‘반란(내란)죄 수괴’라는 죄목으로 유죄를 받는 상황을 암시한 셈이 됐다. 삼청동 총리 공관에 가지 않고 경복궁에 남은 노태우가 3공수여단장 최세창과 5공수여단장 장기오 장군에게 “빨리 자기 부대로 복귀해 부대 장악을 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5공전사>에 기록돼 있다. 총리 공관 경비대를 장악하게 한 것도 노태우의 지시에서 비롯됐다. 전방부대인 9사단의 사단장 노태우는 자신의 부대에도 ‘불법’ 출동 명령을 내렸다.

12·12 주도 세력들은 장태완을 달랬다. <5공전사>엔 유학성이 밤 9시40분께 수경사에 있던 장태완에 전화를 걸어 통화했던 내용을 세밀하게 전하고 있다. “나야, 그런데 오늘 일은 정 총장이 각하 시해사건의 관련 문제로 합수본부에서 합법적으로 조사하려다 일어난 것이니 그리 알아. 그러니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이리로 와.” 이에 장태완은 “거기(30경비단)는 나의 부대인데, 당신 왜 밤에 남의 부대에 와서 지랄이야.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요절내겠다”고 대꾸했다. 황영시와 차규헌이 ‘회유’했으나 장태완은 굽히지 않았다. “나는 죽기로 결심한 놈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 당신네들 그럴 수가 있어? 좋지 않아. 그러면 안 돼!”

한밤 시내에선 총격전이 벌어졌다. 육본 공식 지휘계통이 가동됐다. 제1·2한강교에 차량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박희도의 1공수여단은 차량으로 막힌 제1·2한강교를 피해 행주대교 쪽으로 우회해 서울로 진입했다. 1공수여단 병력은 총격전을 벌여 새벽 2시 국방부와 육본을 완전히 점령했다. 3공수여단도 장갑차와 트럭으로 서울에 진입했다. 9사단(중앙청)과 제2기갑사단, 5공수여단도 서울로 진입했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장태완에게 전화를 걸어 “가만히 있어! 시키는 대로 해. 절대 충돌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장관의 명령이라면 그대로 실시하겠습니다. (…) 포기하겠습니다.” 장태완은 부하 중령에 의해 체포됐다. 육본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은 총을 맞았다. 저항하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다쳤고 그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응사하다가 사망했다. 쿠데타에 성공한 정치군인들은 12월13일 보안사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12·12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이 9개월 만인 1980년 9월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자위권 발동 회의는 ‘발포 사후은폐’ 의혹

■ 최규하가 모호하게 처신한 이유 

<5공전사>엔 최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실을 안 뒤에도 “미온적인 조치를 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계원은 청와대 비서실장 방에 온 최규하 당시 총리에게 “각하께서 위독하십니다”라고 서두를 꺼냈다. “차지철과 김재규가 언쟁 끝에 총격전을 하다가 그만…” 하고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김재규의 잘못 쏜 총에 맞아 서거하셨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최규하는 긴급국무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

<5공전사>는 “대통령의 용태를 병원에서 확인하고, 관계장관들을 불러 사건의 진상규명과 범인 검거에 착수하게 하는 조치가 선행되어야 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적극적 조치를 기피함으로써 그의 맡은 바 직무를 유기한 셈이 됐다”는 것이다. <5공전사>의 이런 평가는 정승화 총장 강제연행-5·17 2차 쿠테타-5·18 유혈진압 등의 과정에서 우유부단하게 버티다가 그럴듯한 ‘명분’을 제시하면 체념한 듯 투항했던 최규하의 태도와도 겹친다.

최규하 대통령은 12월13일 새벽 전두환과 함께 온 국방장관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조사해야 한다고 말하자, “그렇게 하자”며 건의문에 서명했다. <5공전사>는 이 서명을 “12·12 사건의 종결”로 봤다. 신군부는 이 서명을 근거로 정 총장 연행을 합법화해 쿠데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5공전사>는 최 대통령이 건의서 서명 밑에 ‘새벽 5시10분’이라고 적었던 것을 싣지 않았다. 최규하는 자신이 정승화의 연행·조사를 사후 재가했다는 것을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12·12 쿠데타 이후 전두환 세력은 새로 등장한 ‘신군부’로 불렸다. 전두환은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했다. 중정 서리는 내각에 참여할 수 있다. <5공전사>엔 “최 대통령이 4월 초순경 전두환 장군을 청와대로 불러… 전 장군이 중정부장에 취임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대통령으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중정부장 취임을 권고받은 전 장군이 결단을 내리고 중앙정보부장 취임을 수락하기에 이르렀다”고 적었다. 5월에 접어들어 “계엄해제”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본격화됐다. 하지만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방안을 ‘시국수습방안’으로 잡았다. 5월17일 ‘전군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방안 등이 논의됐다. 중앙청 주변을 군 병력이 에워싼 채 열린 심야 국무회의에서 계엄 확대안만 의결됐다. 최 대통령은 밤 12시를 기해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신군부의 2차 쿠데타 서막이었다. 12·12 쿠데타 세력은 비상계엄 확대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전두환, 광주 자위권 발동 회의 참석, 전날 첫 발포 뒤 ‘사후은폐 조처’ 의혹
검찰이 <5공전사> 이 기록을 근거로 5·21 이후 살상 전체 내란살인죄 기소
항소심은 5·27 충정작전 살상만 인정 
전두환은 충정작전 수립 회의도 참석,  내란목적살인죄 적용에 중요 대목 
“공수여단서 300여명 특공요원 선발”
전두환 “무차별적 살상행위 없었고 발표명령 누명 벗었다” 왜곡·거짓말

■ ‘자위권 발동’ 결정 회의에 전두환 참석 

‘신군부의 실세’ 전두환이 광주 학살과 관련한 결정에 참석한 사실은 딱 한 군데 기록돼 있다. <5공전사>를 보면, 5월21일 국방부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광주에 출동한 군인들의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는 자리에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참석했다. 이 책엔 “(80년 5월)21일 2군사(령부)에서는 사령관 진종채 장군과 작전참모 김준봉 장군이 헬기편으로 육본으로 올라와 참모총장을 뵙고 이러한 현지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고 돼 있다. 이어 “건의를 들은 참모총장 이희성 장군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에게 직접 보고하자’고 하여 세 장군은 국방장관실로 갔다. 국방장관실에는 장관을 비롯하여 합참의장 류병현 장군,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 수경사령관 노태우 장군, 육사 교장 차규헌 장군,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술돼 있다.

이 회의는 전날인 5월20일 광주역에서 이미 발생한 첫 발포를 은폐하기 위한 사후 조처라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밤 10시30분 제16대대에 경계용 실탄 100여 발을 배분한 것을 시작으로 12·15대대에 실탄을 체계적으로 지급했다. 3공수여단은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된 시위대와의 충돌 과정에서 발포해 시민 4명을 사살했고, 2명이 다쳤다. 군 공식 지휘체계였던 2군사령부에서 밤 11시20분 ‘발포 금지, 실탄통제 지시’가 있었지만 묵살됐다. 3공수여단은 윤흥정 전투교육사령관이 총소리를 듣고 문의하자 ‘공포사격’이라고 발포 사실을 숨겼다. 이는 육본-2군-전교사-31사단-공수여단이라는 정식 지휘계통과 달리 당시 보안사-특전사-공수여단을 통해 지휘가 이뤄졌다는 의혹과 맞물려 있다. <5공전사>도 5월20일 발포 명령자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


1981년 7월13일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12·12 동지’ 노태우 육군대장 부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자위권 발동은 당시 계엄군들에게 사실상 발포 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12·12와 5·18 수사 당시 검찰은 ‘자위권 발동 관련 회의’를 언급한 <5공전사>의 내용을 근거로 전두환 등 피고인들의 내란목적살인죄 인정 범위를 ‘5월21일 이후 살상 행위’로 보고 기소했고, 1심에선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항소심에선 5월27일 광주재진입작전(상무충정작전) 때 살상 행위만 내란목적살인죄로 판단했다. 검찰은 당시 “<5공전사>는 보안사에서 사료로 남기겠다는 의도에서 관련자들과의 면담 결과와 각종 군 관련 서류 등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고, 피고인과 증인들의 진술은 사건 발생 후 15년 이상이 경과한 뒤 형사책임 유무에 대한 판단을 전제로 이뤄진 것임에 비춰 <제5공화국전사>의 전체적인 주요 기재 내용은 이 사건 관계자들의 진술보다 더 우월한 증명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의 기소 내용이 항소심에서 받아들여졌다면 피고인들에겐 훨씬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을 것이다.

5월25일 최규하 광주 방문도 전두환 작품

■ 전두환 등의 내란목적살인죄 정황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행도 보안사의 주도로 이뤄졌다. <5공전사>를 보면, 5월24일 오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주영복 국방장관 및 각군 참모총장들과 ‘광주사태 대책회의’를 한 뒤 국방부에서 오찬 중이었다. 합수본부 안전처장 정도영 장군은 “합수본부장 전두환 장군께 보고하기 위하여 국방부로 갔다”고 한다. 당시는 “계엄군이 상무충정작전, 즉 무력에 의한 (광주) 기습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5공전사>는 “정 장군이 합수본부장에게 ‘최 대통령의 광주 선무활동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건의를 하자 전 장군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라고 희색을 띠면서 들어가 식사를 빨리 마쳤다”고 적고 있다. 이 책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국방부 장관에게 최 대통령의 광주 선무활동을 건의”했고,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그길로 청와대로 직행, 최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 대통령은 다음날인 5월25일 오후 5시40분께 광주 전투교육사령부를 방문해 라디오를 통해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기록은 12·12 이후 군권을 장악했던 전두환이 사실상 권력실세라는 점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광주재진입작전(상무충정작전)은 5월25일 세워졌다. 계엄사령관 이희성 참모총장이 김재명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5공전사>엔 “국방장관 주영복은 1·2·3군사령관, 특전사령관, 보안사령관(전두환), 참모장 등을 소집해 육군 계획을 토의했다”고 적혀 있다. 5월25일 낮 12시15분 국방부 내 육군회관에서 작전계획을 최종 결정했다. 이 대목은 전두환·이희성·주영복·황영시·정호용에게 내란목적살인죄가 적용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국방장관은 다음날(5월26일) 총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5공전사>를 보면, 계엄사령관 이희성 참모총장은 “5월26일 오후 참모차장 황영시 장군으로 하여금 작전지침을 직접 휴대케 하여 극비리에 헬기편으로 전교사령관에게 전달했다”고 돼 있다.

■ “광주는 6·25 외 최대 사상자 낸 최악 사건” 

<5공전사>를 보면, 광주재진입작전(상무충정작전)은 “150명 내외로 추산되는 무장시위자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위해 각 공수여단으로부터 300여명의 특공요원을 선발해” 실시했다. 이 책엔 “전교사 탄약검사관 배승일 문관이 5월24일 저녁 도청 지하실로 잠입해 밤새껏 수류탄과 다이나마이트의 뇌관들(광주 시민군들이 도청 사수를 위해 설치)을 모두 분리했다”고 나와 있다. 작전을 개시한 것은 5월27일 새벽 3시 전후였다. <5공전사>는 “군·관·민 총 191명(군·경 27명, 민간인 164명)이 사망하고, 1250명이 부상당했으며, 2522명이 검거된, 해방 이래 6·25를 제외하고는 최대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사건이었다”고 기록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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