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22522

혁명 열기 식자 복당한 의원들, 바른정당과 닮았다
바른정당 의원들의 탈당 선언... 1960년 자유당 탈당파 전철 밟나
17.05.03 20:27 l 최종 업데이트 17.05.03 20:27 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김예지(jeor23)

탈당 기자회견 참석한 황영철 의원 바른정당 의원 14명이 탈당과 함께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지지 및 자유한국당 입당을 밝혔다. 2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13명 의원(권성동, 김재경, 김성태, 김학용, 박성중, 박순자, 여상규, 이군현, 이진복, 장제원, 홍문표, 홍일표, 황영철)이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혔고,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정운천 의원은 3일 후 지역구인 전주에서 단독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황영철 의원(가운데).

탈당 기자회견 참석한 황영철 의원 바른정당 의원 14명이 탈당과 함께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지지 및 자유한국당 입당을 밝혔다. 2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13명 의원(권성동, 김재경, 김성태, 김학용, 박성중, 박순자, 여상규, 이군현, 이진복, 장제원, 홍문표, 홍일표, 황영철)이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혔고,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정운천 의원은 3일 후 지역구인 전주에서 단독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황영철 의원(가운데).
▲ 탈당 기자회견 참석한 황영철 의원 2일 오전 바른정당 의원들이 탈당과 함께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지지 및 자유한국당 입당을 밝혔다. ⓒ 권우성

촛불 정국 속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 세력을 비판하며, 자유한국당의 모체인 새누리당을 박차고 나온 바른정당 국회의원들. 이 중 13명이 지난 2일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지지와 자유한국당 입당을 선언하며 바른정당을 떠났다. 

그런데 13인 중 하나인 황영철 의원이 바른정당 탈당계 제출을 보류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그렇게 되면 이 숫자는 12명으로 줄어든다. 

바른정당 의원들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비판하면서 새누리당을 박차고 나왔다. 그런 사람들이 바른정당 대통령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다고 새누리당의 복제판 정당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다. 

박근혜·최순실이 죗값을 치른 것도 아니고, 그들에 대한 국민적 평가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최순실을 욕하면서 나온 그들이 그쪽으로 도로 들어가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 모순을 무릅써도 될 만큼 홍준표 후보가 매력적으로 보였던 걸까. 

3·15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 속에 확산된 1960년판 촛불혁명, 4·19 때도 흡사한 일이 있었다. 그해 4월 19일을 기점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빨간 신호가 켜지자 '까닥하면 죽는다'고 판단한 자유당 의원들이 탈당 행렬에 가세했다. 이승만의 하야 선언 전날인 4월 25일 특히 그랬다. 

욕하면서 떠나더니 선거 앞두고 복귀? 


▲  4·19 혁명.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은 전체 의석 232석 중 과반수인 125석을 획득했다. 제2당인 민주당은 79석이었다. 그런데 1960년 4월 하순의 집단탈당 사태로 자유당의 의석은 3분의 1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1960년 6월 15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재적의원 218명 중에서 자유당 의원은 36명에 불과했다. 최다 89명의 자유당 의원들이 4월 하순부터 당을 떠났던 것이다.  

자유당을 떠난 의원들은 두 부류로 갈렸다. 한쪽은 헌정동지회라는 국회 원내교섭단체를 결성했다. 그해 6월 15일 자 <경향신문> 등에 따르면, 헌정동지회 소속 의원은 41명에서 42명 선을 유지했다. 헌정동지회에 들어가지 않은 나머지 의원들은 무소속 신분을 유지했다. 이들은 무소속이지만 '자유당 탈당파'로 불리며 일정한 세를 과시했다.  

이렇게 4월 하순부터 자유당을 욕하며 떠난 의원 중 일부가, 2개월도 채 안 되는 6월 20일경부터 자유당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바른정당 일부 의원들과 똑같은 행보를 보였던 것이다. 그해 6월 22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무소속 신분을 유지하고 있던 이탈파 중에서 24명이 자유당에 복당 신청서를 제출했다. 26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헌정동지회 내에도 자유당 복귀를 저울질하는 의원들이 많았다. 

이때 자유당으로 복귀한 의원들의 숫자는 어쩌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자유당 안에는, 집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의원들을 감싸주려는 분위기가 강력했다. 지금의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은 바른정당 12명의 복당을 저지하려 애쓰고 있지만, 당시의 자유당 의원들은 복당파를 보호해주려고 했다. 그래서 복당파 의원들의 신상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복당파 의원들이 더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낭패'... 국민은 외면했다 


▲  4·19 혁명 당시의 국회의사당. 지금은 서울시 의회 건물이다. ⓒ 김종성

자유당 이탈파 의원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자유당을 버린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7월로 예정된 제5대 총선이 자유당에 불리할 것으로 예측됐기 때문이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로, 혁명 정국은 개헌 정국 및 총선 정국으로 전환됐다. 정치권은 제2의 이승만 독재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의원내각제 개헌을 관철시켰다. 이때가 1960년 6월 15일이다. 뒤이어 정치권은 7월 29일의 제5대 총선을 향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직후인 5월만 해도, 민주당과 혁신계 정당들과 무소속 후보들의 3파전 구도 속에 다음 총선이 치러질 것으로 예측됐었다. 혁신계는 진보 성향을 표출하는 군소 정당들이었다. 이 3파전 구도에 자유당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당 이탈파 의원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현명했노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각제 개헌이 이뤄진 6월 15일을 전후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지금 홍준표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것처럼, 자유당의 지지율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자유당이 7월 총선에서 선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또 민주당·혁신계·무소속의 3파전이 아니라 민주당·자유당·혁신계·무소속의 4파전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그해 6월 26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하원 격인 민의원과 상원 격인 참의원을 합해서 총 291명으로 늘어난 국회 의석 중에서 40~50석 정도가 자유당의 몫이 될 것으로 점쳐졌다. 125석을 획득한 1958년 총선 때만은 못해도, 적어도 제2당 지위는 차지할 것으로 전망됐던 것이다. 그러자 자유당 이탈파 중 24명이 자유당으로 돌아가고, 헌정동지회 내에서도 복당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다 죽어가던 자유당이 갑자기 소생 움직임을 보인 것은, 혁명 정국이 개헌 및 총선 정국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4월 혁명의 열기가 식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의 일부 세력은 이승만과 자유당을 응징하기보다는, 자유당과 손잡고 당내 경쟁자들을 견제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이랬으니 혁명의 열기는 한층 더 식을 수밖에 없었고, 자유당에 대한 법적 단죄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해 6월 15일의 제3차 개헌에서는 자유당에 대한 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자유당 처벌에 필요한 헌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은 그해 11월 29일의 제4차 개헌 때다. 이 개헌으로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과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 등이 제정될 수 있었다.

이렇게 1960년 5월부터 혁명의 열기가 식자, 국민적 단죄에 시달려야 할 자유당 출신들이 당당하게 개헌을 논의하고 총선을 준비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속에서 이들이 예전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기 시작했고, 이런 뻔뻔한 태도가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혁명 정국이 개헌·총선 정국으로 바뀌면서, 정치의 중심은 거리에서 의사당으로 옮겨졌다. 그러다 보니 혁명을 주도한 시민들이 정치 주도권을 잃고, 기존의 국회의원들이 주도권을 되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존 국회가 주도권을 회복하다 보니, 그 국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했던 자유당 및 자유당 이탈파의 입지가 유리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렇게 혁명 정신이 퇴색하고 자유당이 소생하는 흐름 속에서 자유당 이탈파 의원들이 친정으로 복귀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자유당으로 되돌아갔던 사람들은 결국 낭패를 보고 말았다. 7월 총선에서 자유당은 참의원 의석 58석 중에서 4석밖에 얻지 못했다. 헌정동지회는 1석도 얻지 못했다. 

민의원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민의원 의석 233석 중에서 자유당은 2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헌정동지회는 1석에 불과했다. 민·참 양원에서 자유당이 얻은 의석은 합계 6석이고 헌정동지회는 합계 1석이었다. 

자유당 복당파 의원들은 '자유당이 40~50석을 얻을 것'이라는 예측을 철석같이 믿고 복당을 감행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자유당을 떠날 때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혁명 정국이 개헌·총선 정국으로 바뀌면서 자유당과 그 이탈파의 입지가 일시적으로 개선되고, 이에 따라 유권자 표심 중 일부가 자유당 및 이탈파로 이동했다. 하지만, 막상 총선 당일에는 4·19 정신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지배했다. '자유당이고 헌정동지회고 간에 그들은 안 돼'라는 의식이 유권자들의 머리와 손을 지배했던 것이다.  

투표일이 다가오면서 유권자들은 '이 선거가 4월 혁명 때문에 열리는 선거'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거운동기간 중에는 자유당을 찍을 것처럼 보였던 유권자들이 막상 투표 당일에는 민주당이나 무소속에 표를 던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선거는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민의원에서만도, 민주당은 233석 중에서 171석을 획득했다. 무소속은 53석이었다. 

자유당으로 복귀한 의원들은 이중의 치욕을 맛봐야 했다. 7월 총선에서 자유당이라는 이유로 참패를 당해야 했음은 물론이고, 무너져가는 정당에서 탈출했다가 거기로 되돌아간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조롱까지 들어야 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땀만 빼고 욕만 먹었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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