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7_0080_0010_0020


2) 대가야 세력권의 확립


삼국 및 가야 사이의 국제관계는 6세기에 접어들어서도 큰 변화는 없어서 고구려·백제는 계속하여 변경을 다투며, 백제·신라는 서로 충돌하지 않았으나 변경을 정비하는 정도의 암투는 있었다. 신라는 그런 속에서 지증왕대에 들어 州縣制(주현제)를 정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고, 한편으로는 波里(파리/원덕)·彌實(미실/흥해)·珍德(진덕)·骨火(골화/영천) 등 12城(성)을 쌓고 悉直州軍主(실직주군주)를 두는 등 삼척방면의 동해안로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한 변경 정비와 영역 확보에 주력하느라고 신라는 백제·가야와 다툴 수 없었다.


그러므로 대가야로서는 이 시기에 자기 세력을 정비하고 영역을 확보해 나갈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대가야의 세력권은 고령에서부터 서쪽으로 확산되어 합천·거창·함양 등을 거쳐 지리산 북록의 남원군 아영면 즉 阿莫山城(아막산성)까지 미치고 있었는데, 이는 고고학적으로 월산리 고분군과 건지리 고분군의 유적·유물성격이 고령 계통의 것임을 보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백제는 6세기 초 무령왕대에 南遷(남천)의 후유증을 거의 극복하고 남방경영을 서둘러서 지리산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백제의 남방경영과 대가야의 西進政策(서진정책)이 부딪쳐서 대가야와 백제는「己汶(기문)」을 놓고 영역을 다투게 되는데, 당시에 기문은 대가야에 속해 있었다. 이 사실은≪백제본기≫를 토대로 하여 개작된 듯한≪日本書紀≫소재의 사료에 보인다.718) 여기서의 기문은 가야 계통 국명의 하나로서≪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吉田連條에 上·中·下의 3기문이 나오고,≪梁職貢圖(양직공도)≫소재의 百濟旁小國(백제방소국) 중에 상기문이 나오며,≪삼국사기≫樂志(낙지)의 우륵 12곡명 중에 상·하의 奇物(기물)이 나온다. 기문은 상·하 또는 상·중·하로 나뉘는 것으로 보아 넓은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남원(옛 지명 古龍郡/고룡군/고밀?군) 및 임실(옛 지명 任實郡 居斯勿縣/임실군 거사물현)지방으로 비정된다.719)


그러므로 5세기 말 내지 6세기 초 무렵에 대가야는 서쪽으로의 영토 개척을 더욱 추구하여 이미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북도 남원·임실지방을 영유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륵 12곡 중에 이들의 지명과 같은 상기물·하기물의 두 곡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물 즉 기문은 상당 기간 대가야의 영유 아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륵 12곡은 대가야 왕정에서 특별한 의식 때 연주되던 궁정음악 및 연맹체 소속국들의 음악을 궁정악사인 우륵이 듣고 가야금곡으로 편곡한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가야의 의식 때 기문국이 사람을 보내 고유음악을 연주케 할 정도였다면, 그 취득 방식도 백제의 부진함에 실망한 기문국이 자진하여 신흥 대가야의 연맹체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6세기에 들어와 왕권의 안정을 회복한 백제는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측은 대가야가 기문을「약탈」하였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림으로써 침공의 명분을 만들고, 왜에 五經博士 段楊爾(오경박사 단양이)를 보내는 등 문화 전수를 통하여 국제여론을 유리하게 만든 다음 곧바로 반격하여 기문을 강압적으로 회복하였다. 6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남원 초촌리 고분군의 문화 성격은 백제의 지방지배력이 본격적으로 이 지역까지 침투해 왔음을 반영한다. 그 결과 가야와 백제는 소백산맥과 지리산을 자연적 경계로 삼게 되었다.


또한 백제는 그 사실을 국제사회에 공표함으로써 힘을 과시하고, 성공의 여세를 몰아 가야의 커다란 이권의 하나였을 왜와의 교역 항구인 滯沙(체사) 즉 帶沙津·多沙津(대사진/다사진/하동)을 빼앗으려고 시도하였다. 이 경우에도 백제는 무리하게 대가야를 자극하지는 않고, 자기의 우수한 물품을 미끼로 왜를 하동으로 유인하여 그 곳에 대한 대가야의 기존 독점권을 유린하려 한 것이다. 이에 왜는 백제의 문화에 경도되어 백제측에 동조하였던 듯하다.720) 즉 가야의 무역권과 백제의 무역권이 경쟁하게 되자, 왜는 보다 이익이 많아 보이는 백제와 연결코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대가야는 구태의연하게 왜의 한 세력에게 무역선을 보내 교역을 자청하였으나, 이미 백제가 사전 공작을 벌여 선수를 친 뒤라 효력을 보지 못하였다.


앞서 5세기 후반에 후기 가야연맹체를 형성시키고 그 맹주로 대두한 대가야는 얼마 후 그 여세를 몰아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임실지방까지 진출하여 일시적으로 성공하였으나, 6세기 초에 이르러 백제의 반격과 세련된 대처방안에 휘말려 실패하고 도리어 하동 방면까지 위협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국제관계의 힘의 원리에 시달리면서 대가야는 점차 자기 세력 자체내의 결속을 강화해 나가는 수성기로 돌입하게 된 듯하다.


그리하여 대가야는 팽창을 멈추고 주변과의 경계지역에 성을 쌓음으로써 자기 세력권을 안으로 정비해 나가게 된다. 즉 대가야는 子呑(자탄/진주)과 대사(하동)에 성을 쌓아 滿奚(만해/광양)에 이어지게 하고, 烽候(봉후/봉수)와 邸閣(저각)을 설치하여 백제 및 왜국에 대비하였다. 또한 爾列比(이열비/의령 부림)와 麻須比(마수비/창녕 영산)에 성을 쌓아 麻且奚(마차해/삼랑진)·推封(추봉/밀양)에까지 뻗치고, 사졸과 병기를 모아서 신라를 핍박하였다.721) 대가야의 축성 범위로 보아 후기 가야연맹 중에서도 대가야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세력권은 일단 소백산맥으로 서쪽 경계를 이루고, 동남쪽으로는 낙동강과 남강으로 경계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고령 계통 토기유물의 분포 범위와도 일치한다.


또한 대가야는 당시에 대내외적으로 상당한 무력을 행사하여 사방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그 영역을 확고히 지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좀더 좁혀서 생각한다면 가야연맹의 영역내에서 왜와 백제·신라 사이의 교역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대비를 한 것일 수도 있다. 이듬해 왜에 갔던 백제사신의 선박이 500명 정도의 수군을 태운 왜의 선박들을 거느리고 돌아오는 길에 沙都嶋(사도도/거제도)에 이르렀는데, 伴跛人(반파인) 즉 대가야가 한을 품고 사납게 군다는 말을 듣고는 근처에 상륙을 못하여, 백제사신은 신라를 통하여 상륙하였고 왜의 선단은 곧장 帶沙江(대사강/섬진강 하구)에 이르러 정박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가야는 그것도 용납하지 않고 6일만에 그들을 공격하여, 옷을 벗기고 가진 것을 빼앗고 천막을 모두 태웠으며, 왜선들은 달아나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汶慕羅(문모라/섬 이름, 미상)에 정박하였다.722)


多沙津(다사진) 즉 하동은 전통적으로 가야와 왜 사이의 교역항구였는데, 백제가 이를 빼앗아 왜와의 교역에 이용하려 한 것이고, 대가야는 이미 그 곳에 축성해 두고 지키고 있다가 저지하려 한 것이다. 왜의 선단은 지난번 기문을 둘러싼 백제·가야의 영역 다툼 이후로 백제의 우월성을 믿고 다사진에 와서 백제측의 교역 상대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이를 용납치 않는 대가야의 공격을 받아 도망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대가야는 왜에 대한 중개무역의 주도권을 백제에게 빼앗길지 모르는 우려감에서 군사력을 행사해서라도 하동지방의 이용을 억제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섬에 후퇴해 있던 왜인들은 그 다음 해에 결국 기문에까지 도착하였으며, 백제는 이들을 도성까지 불러들여 衣裳·斧鐵·帛布(의상,부철,백포) 등을 주어 후한 교역을 이루었다.723) 여기서 왜인 일행이 기문까지 어떻게 들어왔는 지는 불문하고, 그들이 일년 이상이나 기다렸다는 점이나 대가야의 방해를 무릅쓰고 통과하여 기문까지 도달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의 왜는 백제와의 교역에 대하여 집요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며, 백제는 그들을 우월한 교역물품으로 유인하는 여유있는 태세였다고 생각된다.


사건의 결과 대가야는 다사진 영유권 분쟁에서는 백제에게 이기고 하동을 지켜냈으나, 對倭貿易(대외무역) 경쟁에서는 결국 선진문물을 앞세운 백제에게 패배한 꼴이 되었다. 그 이후로 백제와 왜는 가야를 제쳐두고 빈번한 교역을 성립시켰을 것이므로 가야는 아직 내부체제도 정비하지 못한 중에 대외적인 고립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718) ≪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7년 6월.

719) 古龍의 발음은「komil」로 추정된다. 己汶의 위치에 대한 자세한 고증은 金泰植,<5세기 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78∼87쪽 참조.

720) ≪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7년 11월. 사료에서 왜가 己汶과 帶沙를 백제에게 주었다고 표현한 것은 그런 정도의 상황에 대한 왜곡일 것이다.

721) ≪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8년 3월.

722) ≪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9년 2월 및 4월.

723) ≪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10년 5월.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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