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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섭라 편입 되레 신라의 삼국통일 빌미 돼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 <42> 백제 무령왕 ②

기사입력 2020. 11. 04   17:07 최종수정 2020. 11. 04   17:18


가야 강력 반발 전쟁 선포하고 적대관계 신라조차 긴급 파병. 고구려도 백제 여러차례 침공 

백제 문화 정수 보여준 무령왕릉, 피장자 신분·연대 등 지석 음각

학계 삼국사기 신중한 접근 계기 


충남 공주시 송산리고분군 안에 있는 왕릉급 분묘. 웅진 백제 왕족이나 토착 마한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필자 제공


예부터 섬진강 유역에는 부족 국가들이 난립해 대국이 소국을 병합하는 침략 전쟁이 빈번했다. 국가 위치가 전략적 요충지거나 교통 중심지일 경우에는 전화가 더욱 심했다. 섬진강 하류의 섭라(涉羅)국이 그러했다. 섭라는 가야 연맹 결성 이전부터 존재했던 소국이다. 사학계는 다사국(경남 하동)과 아라국(경남 함안)을 섭라로 비정하고 있다. 남해와 연결되는 섭라의 섬진강 하구가 항구로 자연스럽게 형성되며 교역·물동량이 넘쳐나는 국제도시가 됐다.


당시 한반도 안 국제 환경은 시시각각 변했다. 마한을 정복한 백제와 변한 소국을 6개 연맹으로 봉합한 가야는 섬진강을 국경으로 박빙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섭라는 고구려·신라는 물론 왜·중원(중국)의 북위·양 나라 등 동아시아 제국 간 국가 이익이 교차하는 무역 중심지였다. 이처럼 각국의 이해가 민감하게 상충하는 섭라를 백제 동성왕(24대, 재위 479~501)이 일방적으로 점령해 버렸다. 동성왕의 섭라 합병은 중원의 고토 회복에 대한 그의 야망과 한반도 맹주국 지위 탈환을 위한 팽창 정책의 일환이었다.


백제의 섭라 병탄은 국제 사회에 큰 파장을 초래했다. 가야 질지왕(8대·재위 451~492)은 고대로부터 섭라가 가야 영토였다며 전쟁을 선포했다. 고구려는 섭라 옥을 수입해 북위 왕에게 진상해 왔는데 앙숙 백제가 섭라를 강점해 조공 길이 막혔다. 장수왕(20대·재위 413~491)이 섭라의 백제 철수를 요구해도 불응하자 고구려군이 백제를 여러 차례 침공했다. 신라 소지왕(21대·재위 479~500)도 백제를 고립시키고자 그동안 적대시해 왔던 가야의 긴급 파병 요청을 윤허했다.


백척간두의 절박한 상황에서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이 등극했다. 왕은 동성왕을 시해한 역모의 수괴 백가를 참수해 금강에 수장한 뒤 조정 조직을 개편했다. 자연재해로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왕실 비축미를 분배해 성난 민심을 무마했다. 왕은 백제 영토가 적국으로 포위된 누란 위기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왜와 양나라에 밀사를 파견해 백제를 공격하는 주변국 간 공조를 교묘히 와해시켰다.


무령왕은 21대 개로왕의 서(庶)왕자로 백제 왕실과 엇갈린 운명 속에 왜의 축자국 각라도(島)에서 태어났다. 왜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왜 왕족·조정 대신들과 인맥을 다져 왜의 국내 사정에 정통했다. 왜 25대 무열왕의 잔학무도한 폭정으로 민심이 이반하자 무령왕이 왜 조정 안의 백제 도래인 세력을 규합해 26대 계체왕(재위 507~531) 즉위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계체왕은 은공을 잊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섭라의 백제 복속을 전폭 지지했다. 무령왕에게는 사면팔방의 위기 속에 천군만마였다.


섭라는 각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무역 도시였다. 국적이 다른 이국인들 사이 상권 다툼으로 절도·음모가 난무하고 이해 당사자 간 살상도 비일비재했다. 각국에서는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무관을 주둔시키며 섭라 실상을 정탐해 갔다. 백제는 자국 영토임을 내세워 병력을 상주시켰고 교역량이 월등한 왜도 군인을 파병했다. 무령왕은 이를 묵인했다. 가야 자력으로는 섭라의 통제가 불가능했다. 신라는 가야에 병력을 지원하고 조공을 종용했다. 영토를 백제에 침탈당한 가야는 신라 요구를 수용했다.


백제의 섭라 편입은 우리의 영토사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한반도 동남방의 소국 신라가 가야를 흡수 통일한 후 강대국 백제·고구려를 순차적으로 멸망시키는 빌미가 됐다. 1400여 년이 지난 후 일본은 이때부터 왜인들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며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중원의 산둥반도를 백제가 통치하고 무령왕이 출생한 왜의 축자국 조정에는 가야인들이 요직에 앉아 축자국을 좌지우지할 때다.


‘임나’라는 지명은 가야 연맹국 가운데 탁순국(경남 창원)이 미오야마국으로 불린 데서 비롯됐다. 백제 근초고왕 21년(366) 백제가 미오야마국과 통교하며 미오야마와 음이 흡사한 임나를 음차(音借)해 부르며 국명으로 고착된 것이다. 이후 섭라를 위시한 인근의 가야 연맹국까지 임나로 통틀어 불리게 됐다. 임나는 고어로 ‘님의 나라’다. ‘님(任)’은 주(主)·왕(王)을 지칭하며 ‘나(那)’는 평야·나라 등의 뜻으로 사용됐다는 국문학계의 해석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국보 162호).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이다. 필자 제공


1971년 7월 그해 여름은 유별나게 더웠다. 침수 방지를 위한 송산리고분군의 배수 작업 도중 무령왕릉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학계의 정밀 발굴 결과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108종(種) 2906점에 달했다. 국내는 물론 세계 고고학계도 놀랐다. 이 중 △금제관식(국보 제154호) △금제수식부이식(국보 제157호) △진묘수(국보 제162호) 등은 찬란한 백제 문화의 정수를 1446년 만에 드러냈다.


왕릉 연도 입구의 지석을 통해서 무령왕이 523년 5월 7일 62세로 붕어해 525년 8월 12일 안장됐음이 밝혀졌다. 왕비는 526년 12월 사망해 529년 2월 12일 안치된 사실도 지석에 음각돼 있었다. 삼국시대 임금 중 피장자 신분과 축조 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최초의 왕릉이다. 지석은 6세기 초 백제에 3년 상(喪)이 치러졌음을 방증하는 자료가 됐다.


출토 유물 중 왕과 왕비의 묘지 매지권(買地券)은 백제인들의 신에 대한 외경심과 종교적 심성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이어서 지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매지권은 묘지로 사용할 토지를 지신에게 매입한다는 내용을 돌에 새겨 놓은 것이다.


매지권에는 무령왕의 사망 연도가 각인돼 있어 『삼국사기』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사망 연도(523)와 재위 기간(22)의 환산을 통해 무령왕이 동성왕의 차남이란 『삼국사기』 기록이 전면 부인된 것이다. 이후 국내 사학계는 신라사 위주로 기술된 『삼국사기』에 신중히 접근하게 됐다.


공주 송산리고분군(사적 제13호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 5-1)은 22대 문주왕이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며 궁궐터를 잡은 공산성(사적 제12호 충남 공주시 금성동 53-51)과 가깝다. 동쪽 1~4호분과 서쪽의 5~6호분을 둘러보고 무령왕 능상에서 풍수 물형을 살피노라면 섬뜩한 동기(同氣)감응이 전율로 파고든다.


왕릉은 자좌오향으로 정남향이지만 좌청룡(남자·관직)이 능침을 환포하려다 용진처(龍盡處·들판이나 냇가)를 만나 왕릉 후미의 주맥을 놓쳐버렸다. 남자가 횡액을 당하는 혈장(穴場)이다. 무령왕을 이어 즉위한 태자(26대 성왕)는 신라군과의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서 노비 출신 신라 장수 도도에게 참수당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발원해 전북 임실-순창-남원-전남 곡성-경남 하동-전남 광양만에서 남해로 합류하는 강이다. 길이 212.3㎞, 유역 면적 4896.5㎢로 한반도에서 아홉 번째 긴 강이며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과 전라남도 구례군의 도 경계를 이룬다. 고려 32대 우왕 10년(1383) 왜구가 침범했을 때 두꺼비 수만 마리가 광양만 쪽으로 이동했다는 전설로 두꺼비 ‘섬(蟾)’ 자를 붙여 섬진강으로 불린다. 삼한(마한·변한·진한) 시대부터 마한·변한의 국경을 가르며 영토 전쟁이 잦았다.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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