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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 645년 9월 말머리 돌려
<77>철군
2013. 09. 25   17:48 입력

수나라처럼 전선에서 고구려군에 연이어 패배 당군, 패전의 한 원인 제공한 설연타에 복수전
 
산서성 태원 근교에 있는 진사(晋寺).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병주(幷州)였던 이곳에 태종이 찾아와 당제국의 안녕을 빌었다. 그것을 비석에 새긴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필자제공

645년 9월 18일 당태종은 철수를 선언했다. 설연타 군대를 막아내기 위해 계필하력 등이 이끄는 당나라 휘하 돌궐 기마군단을 초원으로 먼저 보냈다. 연개소문의 공작 성공으로 전선은 고구려의 안시성에서 몽골리아로 옮겨갔다. 

9월 21일 태종은 병사들과 함께 고구려 쪽의 요수(遼水)를 건너 요택(遼澤)으로 들어섰다. 광활한 갈대의 바다는 이미 푸른빛을 잃었다. 해가 떨어지면서 폭풍 속에 눈이 내렸다. 너덜너덜해진 병사들의 여름 군복이 젖었고, 밤이 되어 한파가 덮쳤다. 아침이 됐을 때 얼어 죽은 병사의 시신이 지천으로 보였다. 당당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땀 냄새에 찌든 당태종의 갈색 전투복(戰袍)도 구멍이 나고 해져 있었다. 철수하는 군대 행색은 거지 떼였다. 새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신하들의 주청을 태종은 거부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군사들 옷은 대부분 해졌는데 내가 어찌 홀로 새 옷을 입는단 말인가.” 

태종의 마음이 서글퍼졌다. 어린 시절 의식 속에 잠재된 고구려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그도 고구려와의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소년 가운데 하나였다. 30년 전 고구려전쟁 패배 후 북방을 순행 중이던 수양제가 현재 산서성 대현에 위치한 안문군성에서 돌궐기마군단에게 포위됐다. 수양제가 위기를 벗어나면 고구려와 전쟁을 시작할 터라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구려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겠다는 격문을 띄웠다. 많은 사람이 약속을 믿고 그를 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19세의 이세민도 그곳에 나타났다. 

● 첫 패배의 스트레스 

전국적인 반란의 와중에 수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본 그는 동란 속에서 청춘을 보냈고,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천하의 당태종 역시 고구려에 패배했다. 이동 중 수레 안에서 당태종은 심하게 앓았다. 첫 패배의 살인적인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645년 10월 11일 당태종은 영주(營州)에 도착했고, 함께 고구려에서 철수한 이도종(李道宗),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 · 장검(張儉) 등을 내몽골지역으로 투입했다. 10월 21일 하북 무녕현의 동쪽 임유관 안쪽 길가에서 황제 부자가 상봉했다. 태자가 맞이한 것은 황제가 아니라 병든 노인이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645년) 12월 7일에 황상이 종기가 나는 병에 들어 가마를 탔다. 14일 병주(幷州:현 태원 부근)에 도착하니 태자가 황상을 위하여 종기를 입으로 빨았다.” 한방에서 종기는 화독(火毒)이 있을 때 발병한다고 한다. 종기 발생에는 여러 원인이 있으나 당태종의 경우 육체적 과로와 극단적 정신 피로에 의해 발생했던 것 같다. 

당태종은 임유관에서 병주로 곧장 이동했다. 젊은 시절 한때를 보낸 곳이었다. 아버지 당고조 이연은 수나라 말 그곳에서 인접한 태원의 유수(太原留守)였다. 태원은 북쪽으로 돌궐에 인접하고 남쪽은 장안·낙양과 연결되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616년께 이연은 거병을 염두에 두면서 지방의 유력자와 연계를 꾀해 장남 건성은 현 산서성 수제(水濟)인 하동(河東)으로 파견했고, 차남인 이세민은 진양으로 보내 영준하고 호방한 인물들과 교유하게 했다. 당나라 건국은 그렇게 시작됐다. 30년이 흐른 뒤 고구려에서 철수한 당태종이 태원 부근 그곳을 찾았다. 

● 설연타 절멸작전 

그곳에서 645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2월 2일까지 체류하면서 설연타 토벌전쟁을 지휘했다. 고구려 정벌을 방해한 설연타에 대한 철저한 보복이 이뤄질 터였다. 645년 12월 25일 설연타 다미가한의 침공은 저지됐다. 이어 이듬해인 646년 1월 8일 하주(夏州) 도독 교사망(喬師望)·집실사력이 설연타를 격파하고 2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6월 당 휘하의 돌궐계 부족 회흘(回紇)· 복골(僕骨)· 동라(同羅)가 설연타의 다미가한을 패배시켰다. 하지만 결정타는 날리지 못했다. 직후 집실사력·계필하력·설만철·장검이 유목민 기병을 이끌고 출동해 설연타를 공격했다. 설연타 군대가 혼란에 빠지자 회흘이 다미가한을 공격해 죽였다. 29일 태종이 장안에서 영주(靈州)로 향했다. 서쪽으로 달아났던 다미가한의 4촌 돌마지(?摩支) 휘하의 7만 명을 소탕하는 작전을 직접 지휘하고, 여기에 동원된 철륵 11개 부족을 정치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8월에 가서 설연타는 완전히 뿌리가 뽑혔다. 이로써 당은 외몽골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 고구려전쟁에 대한 토번의 관심-국익 위해 전쟁 장기화 등 촉각唐 내부에 방대한 첩보망 갖춰

1970년대 제작한 민족기록화에 묘사된 고구려 기병의 모습. 자료사진

고구려전쟁 결과와 여파에 대해 지극히 관심이 있었던 서방의 강국이 있었다. 646년 5월 고구려의 사죄사가 장안에 도착하여 미녀 2명을 바쳤을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번의 사자가 장안의 궁정에 나타났다. ‘구당서’ 토번전은 이렇게 전한다.

“성스러운 천자께서 사방을 평정하니 해와 달이 비치는 나라는 모두 신하가 되었지만, 고구려가 멀리 있음을 믿고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이에 천자께서 스스로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토벌하여 성을 무너뜨리고 진을 함몰시켜 이른 시간에 개선하였다. 폐하가 출행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귀국한다는 말을 들었다.” 

위의 기록에서 당의 패배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고구려전쟁의 전말에 대해 토번의 국왕 승쩬깐포는 훤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당시에 세계가 주목하는 전쟁이었고, 무엇보다 토번은 당 내부에 방대한 첩보망을 갖고 있었다.

‘자치통감’은 토번의 정보력을 이렇게 전한다. “신이 듣건대, … 토번은 모두 첩자(細作)를 풀어 중국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안다. … 병력의 강약과 물자비용의 다소를 어찌 서융(西戎 토번)에 하나하나 알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전쟁은 세계를 변모시킬 수 있었고, 토번의 운명도 바꿀 수 있었다. 641년 당태종은 황실의 딸 문성공주를 토번왕에게 시집보냈다. 고구려와 전쟁을 위해 서방에서 안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티벳고원의 패권을 놓고 히말라야 카일라스(수미산) 부근에 있는 양동국(洋同國)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했던 승쩬깐포도 중국과 안정이 필요했다. 

이후 당태종은 문화사절을 거듭 티벳고원으로 보냈다. 당의 발달된 문물과 과학기술이 토번에 유입되고 있었고, 그것은 토번의 시스템을 고도화시키는 자양분이 됐다. 

고구려가 빨리 굴복하면 토번의 장래도 어두워질 것이다. 전쟁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고구려가 당에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도 중요했다. 그럴수록 당의 전력은 동북방 요동에 묶일 것이고, 당은 서방 토번에 더 많은 혜택을 베풀 것이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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