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6900


한 노(老)교수의 기획기사가 세계를 뒤흔들다

[기획-‘위안부’, 책임지지 않는 일본①] 위안부 연구의 선구자 윤정옥

문형구 기자 mmt@mediatoday.co.kr 2017년 05월 21일 일요일


편집자주 :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 피해자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일본 정부가 그 진실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지금도 진행중인 ‘범죄’입니다. 피해자들과 국민 대다수는 희생자에게 또다시 희생을 강요하는 2015년말 한일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분노했습니다. 이에 위안부 합의를 무효화하고 진정한 해결책을 찾는 일이 새 정부의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미디어오늘>은 총 10회에 거쳐 위안부 문제의 성격을 조명하고 ‘위안부 합의’의 문제점을 짚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창립멤버인 김혜원 선생은 1988년 초 일본 답사를 나선 이래 윤정옥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 김 교수가 쓴 ‘딸들의 아리랑’(2007, 허원미디어)엔 윤 교수가 위안부 문제에 몰입해 온 동기가 이렇게 나온다.


“하늘빛의 뚜렷한 기억 하나가 평생 나를 따라다닌 거야. 잊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더라고. 새파랗게 살아 있다가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잖아”


그 색의 강렬함이 지금도 자신의 가슴을 푸르게 물들일 것만 같다는 윤 교수의 기억은 1943년 초겨울에 찾아왔다. 일본인들은 이화여전 1학년생들을 본관 지하의 염색교실에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하늘색으로 빽빽하게 인쇄된 서약서에 양 엄지의 지장을 찍게 했다. 당시에도 ‘처녀공출’이라며 정신대 연행에 대한 공포는 있었으나, 누구도 무엇을 위해 끌려가는지를 알지는 못했다. 열일곱살이던 윤정옥은 학교를 자퇴했다. 가족들과 금강산 온정리까지 도피를 하고서야 위기는 지나갔다.

▲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 사진출처=이대학보


광복이 됐지만 ‘처녀공출’로 끌려갔던 여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 군속으로 끌려갔다가 살아온 보국대원들에게서 그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됐다. 열아홉의 윤정옥은 전기에 감전된 듯한 큰 충격에 빠졌다. 그 후 70년대 일본인 기자 ‘센다 가쿠오’의 <통곡! 위안부>라는 논문과 일본 오키나와에 남겨진 배봉기 할머니의 소식이 윤 교수를 위안부 문제로 뛰어들도록 다그쳤다.  


윤 교수가 피해자를 처음 만난 건 1980년 11월, 일본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배봉기 할머니였다. 그로부터 8년 후 그를 다시 찾았을 땐 위안부 피해의 후유증인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인터뷰를 가질 수 없었다. 김혜원 씨는 ‘딸들의 아리랑’에서 배봉기 할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풀어놓고 있다.  


“우리가 만나러 갔을 당시에는 오키나와섬의 수도인 나하시가 지급하는 생계보조비로 연명하면서 작고 허술한 아파트에 혼자 칩거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면담하려고 세번이나 그의 아파트를 찾아갔었다. 도무지 응답이 없던 그가 우리의 세번째 방문에는 현관문을 조금 열고 꺼질 듯한 음성으로 사정했다. 제발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와의 짧은 만남은 우리들에게 아픔과 분노만을 안겨주었다. 훅 불면 금방 쓰러져 버릴 듯이 흔들거리던 가냘픈 체구의 그는 집 근처의 종합병원에 가끔 가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두문불출한다고 했다”  


윤정옥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일본 오키나와와 훗카이도, 중국, 태국, 미얀마, 파푸아뉴기니 등지를 왕래했다. 10여년의 현지 취재와 자료수집에 근거해 윤 교수가 내놓은 사회고발은 하늘빛이 아니라 핏빛이었다. 1990년 1월 4일 당시 <한겨레신문>엔 이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기획기사의 첫 편이 등장했다. 


이 기사의 제목은 “집단투신한 절벽은 ‘자살의 명소’로”였고, 부제는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이하 정신대 취재기)였다. 윤정옥 교수가 연재를 시작하며 써내려간 필자의 말엔 동시대의 소녀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책임감이 무겁게 배여있다.  


“나는 부모님의 권고에 따라 학교를 자퇴해 정신대를 모면했지만 그 무렵 내 또래의 많은 처녀들이 일제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이 끔찍한 일이 자칫하면 21세기에까지 이어져, 제2차 세계대전조차 들은 적이 없는 세대에게로 옮겨갈 것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나는 이 일만은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역사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야 한다는 믿음에서 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정신대 취재기’는 한국 사회에 크게 4가지의 사실을 확인시켰다.


1. 일본제국은 이미 1910년 무렵부터 조선의 어린 여성(15세~20세)들을 유괴, 강제연행하여 성노예로 삼았다는 것. 이렇게 끌려간 많은 여성들이 혼자서, 혹은 집단적으로 자살을 하여 ‘다치마쓰 미사키’라는 절벽이 자살의 ‘명소’가 됐다는 것. 태평양전쟁 발발한 후인 1943년 일본은 강제연행한 조선의 여성들이 자살을 계속하자 이를 기사화하지 말라는 보도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2. 일본군이 조선 여성들을 본격적으로 끌고가기 시작한 것은 1937년부터다. 그리고 이는 군국주의·제국주의와 여성 멸시사상이 낳은 국가정책이며 동시에 조선 민족 쇠망책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일본 육군성은 조선인 소녀들을 위안부로 동원하며 “성전을 위해 대의친(조선민족을 가리킴)을 멸할 시책이다”라고 부기한 극비통첩을 했다.


3.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공장, 우물터를 가리지 않고 사냥을 하듯 여성들을 납치했고, 이렇게 끌려간 여성들은 하루 수십명의 군인으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4. 일본군은 패전뒤 명령에 의해 위안부들을 기관총, 폭파 등으로 집단사살했는데, 이는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감추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윤정옥 교수가 담아낸 생존 피해자들의 생생하고 처참한 증언들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시초가 됐다. 윤 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처음 고발한 것은 이미 1981년 한국일보(“끌려간 사람들 - 도공과 정신대를 찾아가는 길”)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하고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게 된 것은 정확히 10년이 지나서였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노동자 인권운동, 남북 통일운동을 지원하면서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실천해온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활동,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성장한 한국의 진보 여성운동단체 연대 등” 위안부 문제를 사회운동의 과제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토양이 먼저 필요했던 셈이다.(윤미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정대협 운동, <그들은 왜 일본군 ‘위안부’를 공격하는가>, 후마니타스)  


윤미향 정대협 공동대표는 “무엇보다 해방 후 피해자와 같은 세대인 여성연구자 윤정옥의 책임감이 중요한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한다. “윤정옥은 피해자 여성들과 달리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았다는 것에 늘 양심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 한겨레신문 1990년 1월4일자.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 취재기' 1편.사진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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