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9D%84%ED%8C%8C%EC%86%8C
         http://mirror.enha.kr/wiki/%EC%9D%84%ED%8C%8C%EC%86%8C


을파소

을파소(乙巴素, ?~203년)는 고구려의 재상으로 고국천왕, 산상왕을 섬겼다. 유리왕 때 신하인 을소의 4세손이며, 입관 전에는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의 가난한 농부였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남아 있다.


생애

고국천왕 13년인 191년, 외척인 어비류(於畀留)와 좌가려(左可慮)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한 이후 이후 고국천왕이 4부에 영을 내려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그러자 4부에서는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고, 안류가 다시 유리왕 때 재상이었던 을소의 후손인 을파소를 천거하였다. 이에 왕은 그를 중외대부(中畏大夫)와 우태(于台)로 임명하였다. 

을파소는 이 관직이 자신이 뜻하는 바를 하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 “저로써는 감히 왕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폐하께서는 현명하고 어진 이를 가려내 높은 관직을 주어 대업을 이루소서”라 하니, 왕이 그 뜻을 알고 국상(國相, 재상)으로 임명했다. 기존 대신들과 외척들이 을파소를 경계하자 왕은 국상에게 복종치 않는 자는 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냈다.  

이후 을파소가 지극정성으로 국사에 임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내정이 안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고국천왕은 안류를 불러 을파소를 천거한 공을 치하하며 대사자(大使者)에 임명하였다.  

3년 뒤인 194년, 7월에 서리가 내려 백성들이 굶주렸다. 이에 왕은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한편, 관리들을 시켜 봄~가을의 기간동안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10월에 갚게 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을파소와 진대법의 관계가 분명히 나오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을파소가 진대법 실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고국천왕이 죽은 이후 산상왕 대에도 을파소는 국상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산상왕 7년인 203년, 왕이 아들을 얻지 못해 근심하자 을파소는 "하늘의 명은 헤아릴 수 없으니, 기다리십시요"라고 진언하였다. 그 해 8월 을파소가 죽자 많은 이가 슬퍼하였다. 국상직은 고우루(高優婁)가 계승하였다.


같이 보기


 

乙巴素

?~203

고구려 초기의 명재상.
안류의 천거로 고국천왕과 만났을 때 자신의 정사를 하기에 낮은 지위라 하자 재상으로 급 승격된다. 신하들이"웬 듣보잡을 재상 시키나효?"라며 반대하자 고국천왕은 "을파소 말 안 들으면 내게 개기는 걸로 간주하겠삼."이라 못을 박으며 을파소에 대한 전폭적 지지와 신임을 나타냈다.

가장 유명한 업적으로는 진대법을 시행한 것으로[1] 이는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들의 문제점을 알게 되어 착안한 법이다. 내용은 곡식이 부족해지는 봄에 구휼미를 풀어 가을에 약간의 이자와 함께 갚게 하는 것으로, 이는 한국의 역사에서 기록된 최초의 환곡제도에 해당한다. 이 법은 훗날 다른 왕조로 교체될 때까지도 계속 유지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고리대로 변질되어 버렸다.

산상왕 7년(203년) 8월에 사망했는데, 온 나라 백성이 슬피 통곡했다고 하니 백성으로부터도 존경받은 뛰어난 명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앙과 지방에 일이 없었다."라며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을파소 관련글
을파소 - 네이트  http://tadream.tistory.com/179
을파소 (乙巴素) - 위키, 엔하위키 미러  http://tadream.tistory.com/184
을파소 - 네이버  http://tadream.tistory.com/186
초야에 묻혀 있었던 재사 을파소 - 백두청년  http://tadream.tistory.com/244
'을파소'의 승부수 - 임동주  http://tadream.tistory.com/406
'안류'의 정치철학 - 임동주  http://tadream.tistory.com/407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