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
시행일시 747∼751년 사이

발해국 제3대 문왕(文王)대흠무(大欽茂)가 747(문왕 11)∼751년 사이에 국초 이래 수도였던 돈화분지(敦化盆地)에서 이곳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천도해, 775년까지 발해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현재의 길림성(吉林省)화룡현(和龍縣) 북고성촌(北古城村) 남동쪽으로 보고 있다.

중경현덕부의 위치 비정은 정약용(丁若鏞)의 후르하(虎里河) 서북인 액돈산(額敦山)을 비롯해, 나단포러(那丹佛勤), 화전현(華甸縣)의 소밀성(蘇密城)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이 중 1915년 일본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주장한 길림성(吉林省)돈화(敦化)로 비정하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33년에서 1934년에 걸쳐 일본의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발굴해 발해의 도성 규모가 밝혀짐에 따라 중경현덕부의 돈화설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돈화분지의 여러 산성이나 소밀성은 규모가 너무 작아 발해왕국의 수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1934년부터 상경용천부와 같은 규모의 도성 유지(遺址)를 찾으면서 두만강 북안에서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해란하(海蘭河) 기슭의 화룡현(和龍縣)서고성자(西古城子)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서고성자는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등의 일본인들에 의해 1937년, 1943년, 1945년에 각각 발굴되었다.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등은 발해의 중경현덕부임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였으며, 1942년 사이토 진베이(齋藤甚兵衛)가 조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1980년대 말 화룡현 서고성자 부근에서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와 완전한 석각 묘지(墓誌)가 출토되어 이 서고성자가 발해의 중경현덕부였다는 사실이 확실시되었다. 또한 이 성의 평면구조가 발해 도성이었던 상경성(上京城)이나 팔련성(八連城)과 거의 같다는 점과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로도 고고학적으로 이 성이 서경성(西京城)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서고성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은 장방형이며 동서 길이가 600m, 남북 길이가 720m이다. 내성은 외성 중간에서 북쪽에 치우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 길이는 310m, 동서는 190m이다. 내성에는 5개의 궁지(宮址)가 있고 3개의 궁지는 남북 중추선에 한 줄로 배열되어 있다. 최근에는 사이토가 1942년 무렵 입수했던 항공사진이 확인됨으로써 서고성지 및 그 주변의 하남둔 고성(河南屯 古城)과 인근 고분군들의 당시 모습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중경현덕부의 소속 주(州)로는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등 6주가 있었으며, 현주의 포(布), 노주의 도(稻), 그리고 철주의 속현(屬縣)인 위성의 철(鐵)은 발해의 기간산업으로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

[의의와 평가]

문왕이 발해의 건국지인 ‘구국(舊國)’에서 중경현덕부로 천도한 것은 이 지역의 철을 비롯한 자원 개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경현덕부는 무도평원과 연길의 조양천평원 모두 관개에 편리하여 농업발전에 적합한 지역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및 신라와의 외교교섭을 펼치는 데 있어서도 보완이 되는 곳이었다. 이러한 입지와 위상 때문에 중경현덕부는 상경용천부와 더불어 발해의 중심 수도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신당서(新唐書)』
「발해 5경의 성격과 기능」(한규철, 『발해5경과 영역 변천』,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발해(渤海)의 강역과 오경(五京)의 위치」(정영진, 『한국사론』34, 국사편찬위원회, 2002)
「만주의 발해·부여 유적 답사 보고」(송기호, 『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발해연구(渤海硏究)의 회고(回顧)와 국사(國史)」(이룡범, 『한국사상(韓國思想)』7, 1964)
「渤海貞孝公主墓發掘淸理簡報」(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 『社會科學戰線』1982年 第1期)
「唐代渤海貞惠公主墓志和貞孝公主墓志的比較硏究」(王承禮, 『社會科學戰線』1982年 第1期)
「間島省海蘭平野の渤海遺蹟」(齋藤優, 『考古學雜誌』40-1, 1954)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洋學報』36-4, 1954)
「渤海中京考」(鳥山喜一, 『考古學雜誌』24-1, 1934)
「渤海考」(津田左右吉,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渤海國의 疆域」(松井等, 『滿洲歷史地理』1,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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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盧州] 
집필자 송기호

발해의 5경 15부 62주 가운데 하나이다.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하며, ‘삼로군(杉盧郡)’이라고도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하여 중국 길림성(吉林省)화전현(樺田縣) 경내로 보거나, 또는 길림성 연길현(延吉縣)용정(龍井)으로 보고 있다.

한편, 노주를 중경현덕부의 수주(首州)로 봄으로써 길림성 화룡현(和龍縣)서고성자(西古城子)에 비정하기도 한다. 산양(山陽)·삼로(杉盧)·한양(漢陽)·백암(白巖)·상암(霜巖)의 5개 속현이 있었으며, 삼로현이 수현(首縣)이다.

이 곳의 특산물로 쌀이 유명했는데, 이는 해란강(海蘭江)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서 경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쌀이 수도(水稻)인지 한도(旱稻)인지에 대하여는 정설이 없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고대(古代)의 만주관계(滿洲關係)』(이용범, 춘추문고 20, 1976)
『渤海簡史』(王承禮, 黑龍江人民出版社, 1984)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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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 [顯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新唐書)』에 기재되어 있는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하였다. 한편, 『신당서(新唐書)』 지리지에 실려 있는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는 천보(天寶, 742∼755)중에 이곳으로 도읍을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다음의 두가지 문제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첫째, 현주가 중경현덕부의 수주(首州)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신당서(新唐書)』 지리지에는 노주(盧州)를 현주의 앞에 두었으나 가탐의 『도리기(道里記)』를 살펴보면 현주가 수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하여, 일부에서는 현주는 수주가 아니며, 따라서 그 위치도 길림성(吉林省)화룡현(和龍縣)서고성자(西古城子)로부터 약 7㎞ 서쪽에 있는 안도현(安圖縣) 대전자토성(大甸子土城)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현주를 수주로 인정하는 경우, 즉 중경현덕부가 발해의 첫 도읍지였던 ‘구국(舊國)’이었느냐의 여부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혜공주묘비(貞惠公主墓碑)의 발견을 계기로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오동성(敖東城)을 주장하는 설과 중경현덕부가 첫 도읍지였음을 주장하는 설이 대립되어 있다.

현주 아래에 금덕(金德)·상락(常樂)·영풍(永豊)·계산(雞山)·장녕(長寧)의 5개 속현이 있었으며, 금덕현이 수현(首縣)이었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삼베[麻布]가 유명한데, 발해시대에 배구(裵璆)를 후당(後唐)에 보내어 세포(細布)를 바치게 한 적이 있고, 또 세백포(細白布)로써 거란과 교역한 적도 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
『渤海簡史』(王承禮, 黑龍江人民出版社, 1984)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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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주 [鐵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된 62주(州) 중의 하나이다.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하며, 철주라는 명칭은 수현(首縣)인 위성현(位城縣)이 철의 산지로 유명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위치에 대해서는 철의 산지라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대체로 두만강 하류의 오늘날 함경북도 무산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현인 위성현을 비롯하여 하단(河端)·창산(蒼山)·용진(龍珍)의 4개 속현이 있었다.
위성현은 철리부(鐵利府)와 더불어 발해의 주요한 철의 생산지였으며, 실제로 돈화(敦化)·화룡(和龍)·영안(寧安)·동녕(東寧) 등의 발해유적지와 고분들에서 다량의 철기가 발견되고 있어 발해에 야철(冶鐵)기술이 상당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
『渤海簡史』(王承禮, 黑龍江人民出版社, 1984)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174



탕주 [湯州]
집필자 송기호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한다. 그 위치는 현재의 천보산록(天寶山麓)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속현(屬縣)으로는 영봉(靈峰)·상풍(常豊)·백석(白石)·균곡(均谷)·가리(嘉利)의 5개현이 있었으며, 영봉현이 수현(首縣)이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856



영주 [榮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新唐書)』에 기재된 발해의 62주(州) 중의 하나이다. 『요사(遼史)』지리지에는 숭주(崇州)로 기록되어 있다.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한다.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길림성(吉林省)연길(延吉)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숭산(崇山)·위수(潙水)·녹성(綠城)의 3개 속현이 있었으며, 숭산현이 수현(首縣)이었음이 고증되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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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주 [興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되어 있는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한다. 위치는 미상이다. 성길(盛吉)·산산(蒜山)·철산(鐵山)의 3개 속현(屬縣)이 있었으며, 성길현이 수현(首縣)이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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