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G679Xb

‘전쟁을 종식시킬 대안은 더 큰 전쟁을…’
(84)김춘추의 슬픈 귀환
2013. 11. 20   15:05 입력

귀국 중 고구려군에 발각… 부하 희생으로 기사회생
김춘추 “고구려ㆍ백제를 멸망시켜야 평화 온다” 판단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 시에 위치한 산동반도의 끝자락 성산(成山)곶. 김춘추 일행은 당나라를 방문한 후 이곳을 바라보며 서해를 건너 신라로 향했을 것이다. 필자제공

649년 3월 즈음으로 생각된다. 김춘추는 장안을 떠나 신라로 귀국할 배를 타기 위해 산동으로 향했다. 당에서 그의 활동은 두드러진 것이었고, 모든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 고구려 첩자들이 그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황해 바다는 전쟁의 긴장감이 감돌도 있었다. 2~3년 전부터 고구려 해안지대에 대한 당 수군의 국지적인 도발로 고구려의 곳곳은 전쟁터가 됐고, 전년 당태종이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선언해 놓은 터였다. 고구려는 모든 수군을 동원해 여기에 대처하고 있었다. 중국 현지의 고구려 고정첩자들이 산동의 항구에 정박한 당나라 전함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산동반도 서북단 래주(萊州) 항구에 도착한 김춘추는 전쟁이 임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금방 건조한 배들이 그곳에 속속 들어오고, 고구려와 전쟁준비로 항구는 북적대고 있었다. 승선한 김춘추는 일단 동쪽 등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노철산열도를 따라 곧장 북상하면 고구려 요동반도의 끝자락 비사성에 도착한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해전은 삼엄한 그 길을 따라 일어났었다.

고구려 수군이 깔려 있는 황해

등주에서 북상해 요동반도 남쪽해변을 따라가다 남하해 황해도로 내려가는 고구려 연안 항해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했다가는 곧바로 고구려 수군의 사냥감이 될 것이다. 김춘추 일행은 등주에서 산동반도 동쪽 끝자락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한반도의 돌출지점인 황해도로 향하는 횡단항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길조차 안심할 수 없었다. 산동반도 동쪽 끝에서 황해도 쪽에 도달할 때 백령도라는 지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령도 역시 고구려 수군들이 당수군의 침공에 대비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산동반도 동쪽 끝 어느 작은 항구 마을에 도착한 김춘추 일행은 그들을 태워다줄 순풍을 기다렸다. 항구 마을 산 위에서 바람을 감지하고 있던 항해사가 뛰어 내려왔고, 김춘추 일행은 급하게 승선했다. 바람을 놓치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다는 사지였다. 하지만 그 너머에 신라가 있었다.

배는 바람을 타고 동진했다. 땅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낮에는 해의 움직임을 보고 밤에는 별자리를 보고 계속 나아갔다. 멀리 백령도가 보였다. 그곳에서 이미 바람의 방향을 감지한 고구려 수군이 산동 쪽에서 배가 도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바다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력이 좋은 감시병이 백령도의 가장 높은 산 위에 올라가 서쪽의 바다를 눈이 빠지도록 응시하고 있었고, 배를 발견했을 것이다. 어떤 배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곧장 항구에 신호를 보냈고 고구려 수군이 바다를 향해 출동했으리라. ‘삼국사기’는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났다. 춘추를 따라간 온군해(溫君解)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다. 순라병이 그를 춘추로 여겨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해 군해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지옥에서 생겨난 꿈

고구려 수군은 김춘추와 그 일행을 실은 배를 발견하고 전율했으리라. 순라병들은 기다리던 신라의 거물을 태운 배를 향해 내달렸다. 평양에서 그를 보는 즉시 살해하라는 지침을 받은 상태였을 것이다. 고구려 수군은 배를 세우고 수색을 했다. 배 안에서 화려한 관복을 입은 자를 찾아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는 김춘추를 수행하던 온군해라는 자였다. 고구려 배가 다가오자 온군해는 김춘추와 옷을 바꿔 입고 희생됐던 것이다. 허름한 옷을 입은 김춘추는 배에 달려 있는 비상용 보트를 타고 도주했다. 고구려 수군들도 작은 배를 보았지만 목적한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애써 추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온군해의 숭고한 희생은 인정을 받았다.

비밀은 절명의 위기에 밝혀지는 법이다. 온군해는 왜 김춘추를 살리고 자발적인 죽음을 선택했을까? 이는 결코 충성심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온군해의 추증 관등이 ‘대아찬’인 것으로 보아 그는 진골 귀족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는 김춘추에게 동료 같은 부하였으리라.

‘삼국사기’ 태종무렬왕 즉위년 조에 김춘추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하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어려움에서 구제할 뜻이 있었다(幼有濟世志).” 김춘추는 철이 들면서 자신과 그 시대의 사람들이 전쟁이란 재앙을 뒤집어쓰고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땅, 그곳은 모든 것이 메말라 있었다. 사람들은 전쟁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모습이었고, 이미 그들에게 삶의 조건이 되고 일상생활이 되어 전쟁이란 불행에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신라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생존할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옥과 같은 현실 속에서 신라인들은 평화의 도래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으리라.

같은 꿈을 가진 자의 희생

김춘추 개인도 전쟁의 저주를 비껴가지 못했다. 642년 그이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 딸 고타소랑과 손자를 대야성의 참극에서 잃었고, 그 시신은 백제 수도 사비성 감옥 바닥에 묻혔다. 불행은 품고 있던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제세(濟世)의 의지가 행동으로 발현되게 했다. 딸을 잃은 그해 그는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 담판을 시도했고, 당이 고구려와 전쟁에 패배한 1년 후인 646년에 왜국으로 가서 왕과 유력자들을 만나 신라에 대한 적대성을 완화시켰으며, 649년 당태종을 만나 귀국하다 많은 부하와 동료를 잃었다.

그는 만성적인 전쟁으로부터 신라를 구해낼 꿈을 실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외국을 드나드는 행동가였다. 신라를 만성적으로 침공하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야 평화가 온다. 나당동맹의 체결만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더 큰 전쟁을 해야 했다. 그것만이 궁극적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잔인하지만 현실이었다.

김춘추는 그것을 실현할 유일한 인물이라 여겨졌고, 그의 리더십 또한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마음속에 같은 꿈을 품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는 신라의 미래였다. 온군해는 김춘추가 고구려 수군의 손에 피살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희망을 상실한 신라를 생각할 수도 없었으리라. 김춘추가 살아야 희망의 불씨가 남는다. 온군해의 마음에 심어진 꿈이 기꺼이 희생을 받아들이게 했고 김춘추를 살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백령도는 곡도(鵠島)라 했다. ‘삼국유사’ 거타지 조를 보면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양패(良貝)가 당나라 사신으로 갈 때 곡도에 배를 정박시켰다고 한다. 마침 풍랑이 일어나 섬에서 10일을 기다려야 했다.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양패는 꿈에서 본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호위 궁수 50명 가운데 하나인 거타지(居陀知)를 섬에 남겨 놓았다. 그러자 순풍이 불었고 배는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설화이지만 이는 신라와 중국 사이의 항해에서 백령도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한강하구에서 출발한 배는 황해도 해안을 바라보며 서북쪽으로 가다가 백령도에 일단 들렀다. 황해를 횡단해 산동반도로 곧장 가기 위해서는 백령도에 내려 바람의 방향을 봐야 했던 것이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