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2641.html

김근태 전기고문 기술자는 이근안, 한겨레가 첫 보도
[하니Only]  등록 : 20111230 15:04
   
≫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30일 타계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전기 고문한 이근안의 사진과 얼굴을 특종 보도한 한겨레신문 1988년 12월21일자 1면. 피디에프 화면 갈무리.

‘이름모를 전기고문 기술자, 경기도경 공안실장 이근안’
 
창간된 지 반년이 갓 지난 1988년 12월21일치 <한겨레신문> 1면 지면을 펼쳐본 독자들은 깜짝 놀랐다. 1985년 9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근태 민주주의청년연합(민청련) 의장에게 전기·물고문을 가한 고문기술자의 실체가 사진과 함께 처음으로 공개됐기 때문이다.

<한겨레>가 전두환 독재시대의 만행사실을 결정적으로 확인해 특종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30일 작고한 김근태 전 복지부 장관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겨레신문 민권사회부 기자로 치안본부를 출입하던 문학진 기자(현 통합민주당 의원)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과 접촉해서 ‘얼굴없는 고문기술자’에 대한 단서를 잡았다.

문 의원은 이근안 전 경감이 도피생활 11년 끝에 자수한 1997년 <한겨레21>과 한 인터뷰에서 “당시 얼굴없는 고문기술자를 밝혀내는 일은 고문 근절을 위해 가장 먼저해야 할 현안이었다”면서 “김근태씨를 통해 그가 경기도경에 근무하는 이아무개씨일 거라는 추측성 증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치안본부에 출입했기 때문에 경찰 파일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어렵사리 주소를 알아낸 뒤 후배기자를 통해 관할 동사무소에서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면서 “김근태씨에게 사진을 보여준 결과 그가 얼굴없는 고문기술자임을 확인하고 기사화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공안기관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을 때라 다른 언론들이 따라오지 않아 이슈화에 애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며칠 뒤 이씨가 종적을 감춤으로써 <한겨레> 보도가 사실임이 명확해지고 모든 언론이 이근안 사건을 다루기 시작했다.

검찰과 경찰은 전담반을 갖추고 이근안 사건 수사에 힘을 쏟는다고 발표했으나 그 뒤 그가 1997년 자수할 때까지 변변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1993~1994년 경찰청에 출입했던 기자도 관심을 가지고 경찰의 수사 진척 상황을 취재했으나 그때마다 “별다른 진척이 없다”의 답변만이 돌아왔다. 경찰 자수 뒤 그는 자신의 집 다락방에서 숨어지냈다고 주장했다.

문 의원은 “수사를 맡은 경찰도 지휘권을 가진 검찰도 모두 수수방관이었다”면서 “하는 수 없이 시민제보에 의존해 추적할 수 밖에 없었다. 한번은 부장의 지시를 어기고 제보 확인을 위해 부산까지 내려가 2박3일동안 잠복하는 바람에 벌로 일주일동안 계속 야근을 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30일 타계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전기 고문한 이근안의 사진과 얼굴을 특종 보도한 한겨레신문 1988년 12월21일자 1면 기사. 피디에프 화면 갈무리.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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