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48524

진기로예 열사 능원의 진광화, 윤세주 열사
하북지역 항일 전사들을 찾아서(2)
17.08.07 13:29 l 최종 업데이트 17.08.07 15:11 l 박청용(yong3811)

중국은 빠르다. 만만디(慢慢的)가 아니다. 고속전철의 나라다.

스자좡에서 한딴까지 일반 기차로 2시간 안팎 걸리지만 고속전철은 시속 300km를 넘기는 속도로 40분 만에 주파했다. 한국이 고속전철을 먼저 도입했지만 중국은 어느새 독자적인 기술력을 발전시켜서 전 세계에 고속전철을 수출하고 있다. 

한국의 ktx가 최고 속도 305km인데 중국의 고속전철은 시속 350km 낼 수 있으나 안전 등의 이유로 시속 305km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베이징에서 상하이까지 1318km의 거리를 보통 열차로 12시간 인데 고속전철로는 5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2017년 10월부터는 시속 350km로 상향하여 베이징과 상하이를 4시간 정도면 주파할 수 있게 한다고 발표하였다.

중국 고속전철 중국은 이제 고속전철의 나라다.  전국을 고속전철로 연결하여 가고 있다.  고속전철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으로 서남아시아로, 동남아시아로 뻗어갈 계획이다.
▲ 중국 고속전철 중국은 이제 고속전철의 나라다. 전국을 고속전철로 연결하여 가고 있다. 고속전철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으로 서남아시아로, 동남아시아로 뻗어갈 계획이다. ⓒ 박청용

중국 고속철도는 참으로 빠르고 그 발전 속도가 대단하다. 우리가 4대강에 삽질하면서 국가 전략을 바로 세우지 못하는 사이에 중국은 고속전철과 항공, 우주산업 등 중요한 사업이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으로 순식간에 성장하면서 한국을 추월하였다. 중국이 철도강국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한딴동역에 도착했다. 

중국고속전철내부 중국 고속전철은 빠르기도 하지만 안락하고 쾌적하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1열에 3인과 2인 좌석으로 되어 있다. 휴대폰을 충전할 수 있도록 좌석 아래에 콘센트도 있었다.
▲ 중국고속전철내부 중국 고속전철은 빠르기도 하지만 안락하고 쾌적하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1열에 3인과 2인 좌석으로 되어 있다. 휴대폰을 충전할 수 있도록 좌석 아래에 콘센트도 있었다. ⓒ 박청용

한딴동역에서 진기로예열사능원(晋冀鲁豫烈士陵园)까지는 택시로 30분이 채 안 걸렸다. 진기로예는 중국의 중원지역을 가르키는 말로 진(晉)은 산서성(山西省), 기(冀)는 허베이성(河北省), 노(魯)는 산동성(山東省), 예(豫)는 허난성(河南省)을 뜻한다. 산시성과 산동성은 중국의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태항산에 의해서 동서로 나누어 진 것이다. 

허베이성과 허난성은 황하 강에 의해서 남북으로 나누어진 지역이다. 택시 번호판마다 기(冀)자가 붙어 있어서 이곳이 헤베이성임을 알 수 있었다. 진기로예 열사능원도 한딴시내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서 접근하기 좋았다. 열사들을 추모하는 공원이면서 사람들은 그늘에서 쉬기도 한다. 음악을 틀어 놓고 집단 체조도 하면서 운동도 한다.


▲ 진기로예 열사능원 진기로예 열사 능원은 공원의 역할도 한다. 넓은 대지 위에 나무와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휴식하며 집단체조도 하면 운동도 한다. ⓒ 박청용

진기로예(晋冀鲁豫) 열사능원에 묻힌 진광화, 윤세주 열사

이 공원에는 한국인 진광화, 윤세주 열사가 묻혀 있다. 이분들은 1942년 산서성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된 팔로군의 퇴로를 열기 위하여 조선의용군이 앞장을 섰는데 그때 전사한 분들이다. 진광화 열사의 묘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좌권 장군 묘소 옆에 석조와 시멘트로 단장된 노란색의 둥그런 묘소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진광화 열사 묘소 앞에는 붉은 별이 그려진 표시 아래에 陳光華同志墓(진광화동지묘)라고 한문으로 쓰인 묘비가 서 있었다. 이 분에 대해 모르는 분이 보면 중국사람인지 한국사람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옆에 한글로라도 한국인 진광화 열사라고 써 놓았으면 좋을 텐데  남의 나라 열사묘지에 묻히어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국 사람은 몇 사람이나 알고 찾아올까? 조선의용군이나 중국내의 항일운동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이 종종 찾아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묘소 앞에서 그분의 삶과 죽음을 추모하면서 잠시 묵념을 하였다.


▲ 진광화 동지 묘소 좌권 장군 묘소 옆에 한국인 진광화 동지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진광화 동지묘라고 한문으로 쓰여 있다. 돌과 시멘트로 지어진 견고한 묘소이다. ⓒ 박청용

묘소 옆에는 '조선혁명열사진광화동지묘지(朝鮮革命烈士陳光華同志墓誌)'라는 글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었다. 글을 쓴 것이 간자체가 아닌 번자체 한문으로 되어있고 중화민국 31년 10월 10일 세운 것으로 봐서 스먼촌 초장지에 세워졌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듯하였다. 

중화민국 31년이면 서기로는 1942년이다. 팔로군들은 1942년 당시만 해도 중화민국으로 부르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묘지석에는 진광화 열사에 대한 간단한 이력과 반일 활동, 전사에 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열사의 삶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는 묘지(墓誌)를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광화 혁명열사의 원명은 김창화이다.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평천리 사람이다. 1911년 태어났고 1931년 국내 중학교 졸업 후 반일의 열정을 갖고 중국에 유학하여 1937년 광주 중국국립 중산대학 교육계를 졸업했다. 한국국민당조선청년전위단과 중국청년항일 동맹에 참가했다. 193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8년 화북 태항산 항일근거지 중공 북방국 진기예구당부에서 중요 공작을 했다. 1941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창립하여 영도하고 1942년 5월 28일 태항산 반소탕전 중 산서성 화옥산(花玉山)자락에서 장렬하게 희생당했다. 진기로예 지역 군관민과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화북지대가 함께 열사의 공적을 추모하여 묘를 쌓고 비를 세워 기록하니 잊지 말지어다. 중화민국 31년 10월10일 세움."


▲ 진광화열사묘지(墓誌) 진광화 열사에 대한 이력과 삶과 죽음과 추모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묘지(墓誌)는 묘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다. 스먼촌 초장지의 묘지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한문은 간자체가 아니라 번자체이고 연호도 중화민국31년으로 쓰고 있다. ⓒ 박청용

번역이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일제시대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음과 열정을 다 다했던 대한 청년의 치열한 삶이 전해져 왔다. 빼앗긴 조국에 태어난 젊은이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진광화 열사는 시대적 정신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중학교 시절부터 일제에 항거하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활동을 했다. 

일제의 탄압에 못 견딘 젊은이는 묘지석에 기록된 것처럼 반일의 열정을 갖고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대학을 다니면서도 조선청년을 모으고 중국인들과 함께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인을 모아서 교육하고 중국 혁명가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되찾겠다고 동분서주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리고 몸이 수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용군에 들어가 불꽃같이 싸워나갔다. 

1942년 5월에 3만 명의 일제 정규군이 태항산에 근거지를 둔 팔로군을 포위공격을 했다. 일제의 소탕에 맞서 반소탕전을 벌이던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은 포위망 돌파 작전을 전개하고 작전은 성공했다. 이때 팽덕회, 등소평등 쟁쟁한 혁명 전사들과 비무장 대원들까지 탈출했다. 

조선의용군은 적을 유인하고 동지들을 살리느라고 진광화 동지는 31세에, 윤세주 동지는 42세의 나이로 태항산맥 자락에서 숨졌다. 이때 팔로군의 좌권 장군도 숨졌다. 반소탕전이 끝나고 중국인들 수천명이 모여서 좌권, 윤세주, 진광화 동지를 위해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르면서 태항산맥 연화산 자락에 묘지를 조성했다. 

중국인들이 감동하고 팔로군들이 인정한 조선의용군들이었다. 이들이 일제의 포위망을 뚫었기에 중국혁명가의 주요 지도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특히 등소평이 살아남아서 마오쩌둥 이후에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부강한 중국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의 발전된 중국을 있게 한 것은 함께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함께 피를 흘린 조선의용군들이 있음을 중국인들도 알 만한 사람들은 인정할 것이다. 

31세의 나이면 정말 아깝다. 42세의 윤세주도 너무나 아깝다. 이분들이 살아서 해방정국에 무장된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국에 들어왔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젊은 혁명 열사들을 생각하면서 아쉬움이 가득했다. 

윤세주 묘소를 찾아서

좌권 장군 묘소 옆에 있는 진광화 묘소는 쉽게 찾았는데 윤세주 열사의 묘소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 넒은 진기로예 열사능원을 땀 흘리면서 한 바퀴를 다 돌면서 꼼꼼히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일반 병사들이 묻힌 묘소들이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언어가 잘 안 통하니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난감했다.

땀을 뻘뻘 흘리었다. 배낭의 무게가 점점 조여 왔다. 처음에 들어왔던 남쪽 문이었는데 못보고 그냥 지나쳤는가 하면서 다시 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안 보였다. 온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다리의 힘도 풀리고 마음도 지쳤다. 포기할까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찾아볼 요량으로 남문으로 나왔다. 

남문 앞에서는 차와 오토바이와 자전거들이 싱싱 달리는 왕복 4차선 도로였다. 그런데 그 길 건너에 공원 같은 것이 또 하나 보였다. 공원이 크고 넓어서 진기로예 능원은 하나라고 생각한 것이 나의 착각이었다. 길 남쪽에 또 하나의 능원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길을 건너서 달려갔다. 사람들이 쉬고 있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니 묘지들이 나란히 정리 된 것이 보였다.


▲ 진기로예 남원묘역 진기로예 열사능원 길 건너 남쪽에 위치한 남원묘역이다. 항일전쟁에서 전사한 많은 일반병사들이 묻히어 있다. 윤세주 열사이 묘소도 이곳에 있다. ⓒ 박청용

묘지석을 하나씩 살피면서 쭉 지나갔다. 한문으로 새겨진 누군가의 한번뿐인 고귀한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세워진 묘지들을 훑으면서 지날 때에 문득 낯익은 한글 묘비명이 보였다. '석정 윤세주 열사' 드디어 찾았다. 3열 17번 묘소였다.  낮게 단장된 나무들 사이에 돌로 된 작은 묘소와 그 앞에 작은 돌 판에 새겨진 묘비명이 있었다. 

강한 햇볕은 내리 쪼이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지만 그 앞에 서서 머리를 숙였다. 여기 까지 왔다가 그냥 갈 뻔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열사의 묘소 앞으로 끌어당긴 무엇이 있었다. 내가 이분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이 분이 나를 기다린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묘소 앞에 잠시 묵념을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기억의 단편들이 떠올랐다. '김원봉', '윤세주', '의열단', '밀양', '영화 암살', '영화 밀정', 그랬다. 윤세주는 의열단원이었다. 여러 차례의 폭파와 암살 등 일제를 향한 직접 공격으로 일제를 벌벌 떨게 했던 의열단원의 창설 멤버이자 핵심요원이었다. 

김원봉과 윤세주는 밀양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같은 고향이면서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생각, 같은 뜻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떨래야 뗄 수 없는 동지였다. 이 분들은 뜻과 정신으로 산 사람들이다. 그 뜻을 이루고자 고향을 떠나 머나먼 중국 내륙까지 와서 치열한 싸움을 했다. 정의와 독립을 위해 자기의 삶을 그 불타오르는 시대적 과업에 던졌다. 그 시대에도 부패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독립군을 잡아서 영달하려는 밀정들마저 수두룩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누구는 역사에서 존경과 추앙으로 남고 누구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손가락질로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과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고 이미 지나간 시대이지만 이분들을 알고 묘소라도 찾아오는 것은 이 분들이 생각했던 정신과 이 분들이 이루고자 애썼던 의로운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석정 윤세주 열사'는 한글로 새겨졌지만 윤세주를 소개하는 글은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이름자라도 한글로 새겨 놓은 것이 고마웠다. 함께 항일 전쟁을 치루고 희생당한 한국인을 중국인들이 그만큼 존중해주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 윤세주 열사 묘소 많은 중국인 전사들 묘소와 함께 윤세주의 묘소가 돌로 조성되어 있고 그 앞에 작은 묘비가 놓여있다. 밀양 사람으로 만주에서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8년을 옥살이하고 중국 대륙애서 조선의용군으로 일제와 싸우다가 42세의 나이로 이곳에 잠들어 계시다. 한딴 진기로예 남쪽 능원 3열 17번에 위치해 있다. ⓒ 박청용

한자로 새겨진 묘비명을 번역하면 이렇다.  

"석정 윤세주 열사. 조선 경상남도 밀양 사람. 1901년 출생.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 혁명에 참가하고 이후 20여 년간 조선혁명 사업을 위하여 국내외에서 분투하였다. 중국 동북지역 관내에서 의열단을 창립하여 영도하였다. 1920년 적경에게 체포되어 8년 감옥생활을 한 후 출옥하였다. 1932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에 있는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을 하였고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립하였고, 1937년 중국 항전이 폭발할 때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중일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1년 7월 화북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부대를 이끌고 와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영도하고 중국과 함께 일본제국주의를 향한 작전에 힘썼다. 1942년 5월 28일 태항산 반소탕 작전 중 탄환에 맞아 선서편성 화옥산에서 사망했다. 그때 나이가 42세였다. 진기예구 주변의 각계는 열사의 업적을 흠모하며 고진광화 열사와 공동으로 묘를 건립하여 세우다. 중화민국 31년 10월 10일. 2003년 10월 중제(重制)"


▲ 윤세주 묘비명 윤세주의 묘비명에는 윤세주가 3.1운동에 참여하고 일제에 대항하고 의열단을 만들고 중국에서 활동하고 조선의용군으로 일제와 싸우다가 전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박청용

일제에 항거하다가 숨진 수많은 중국인 열사들과 함께 윤세주, 진광화 묘소와 좌군 장군의 기념관등을 살펴보고 택시를 이용하여 한딴 터미널로 갔다. 한딴 터미널은 진기로예 열사 능원에서 택시 기본요금 거리로 그리 멀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 인민영웅기념비 일제와 싸우다 전사한 수많은 영웅들을 기리는 비와 대형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이름 없는 무영용사들을 잊지 않고 추모하고 있다. ⓒ 박청용


▲ 좌권 장군 기념관 진기로예열사능원에 있는 좌권장군 기념관. 기념관을 지어서 장군을 잊지않고 추모하고 있다. 좌권 장군과 함께 동급의 위치와 업적을 이룬 분들이 한국인 진광화, 윤세주 열사인데 우리의 기억과 추모는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여 아쉽다. ⓒ 박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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