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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시간’이 새긴 트라우마…공포감에 평생 치과의자 못앉아
[한겨레] 임석규 기자  등록 : 20111230 21:12
   
파킨슨병 이어 뇌혈전 덮쳐 고통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말년에 파킨슨병에 시달렸다. 경직, 느림, 자세 불안정, 손떨림 등 그가 보인 모습들은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하지만 파킨슨병은 의학적으로는 원인 규명이 되지 않았다. 김 상임고문의 주변에선 고문 후유증이 원인일 것으로 추정한다.

고문의 악몽은 그에게 깊은 트라우마(상처)를 남겼다. 김 상임고문은 평생 치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치아에 문제가 생겨 치과에 가더라도 본인이 도저히 진료의자에 앉질 못하겠다며 뛰쳐나오기 일쑤였다. 치과의사의 ‘몸을 움직이면 안 된다’는 말이 ‘짐승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훗날 엠아르아이(MRI) 촬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딱딱한 철판에 누운 채 움직이지 말라는 주문은 그를 또다시 힘들게 했다. 촬영은 순탄치 않았다.

김 상임고문은 최근까지 파킨슨병 환자라는 걸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정계 은퇴를 입에 담아본 적 없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약점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난 10월께부터 또다른 병마가 그를 덮쳤다. 그는 잘 다니던 동네에서 길을 잃었고, 멀쩡히 길을 가다 주위에 “여기가 어디냐”고 묻기도 했다. 가족들은 그저 고문 후유증이라 여겼다. 해마다 가을이면 그는 앓아 누웠기 때문이다. 김 상임고문은 과거 고문을 받았던 계절이 올 때마다 힘들어 했고, 그게 가을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뒤늦게 11월 말에 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뇌정맥 혈전이 발견됐다.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하던 중 이번엔 뇌출혈이 생겼다. 경련과 발작에 시달렸다. 혈전과 출혈이라는 상반된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 치료가 힘들어졌다.

이 무렵 딸 병민씨의 결혼식이 있었다. 병민씨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아빠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땐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라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파킨슨병 투병 및 입원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

이후 김 상임고문은 2차 감염으로 폐렴에 걸려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또다른 감염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숨을 거둘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27일부터 그의 폐와 간, 신장 등 장기들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졌고, 29일엔 의료진이 가족들을 긴급히 불러 정오를 넘길 수 없다는 얘기를 전했다. 가족이 모였고, 독재에 맞서 싸우며 피와 눈물을 함께흘린 ‘동지’들이 모여 그와 마지막 ‘면회’를 했다. 이들이 인사를 나눈 것은 약물로 겨우 심장을 뛰게 하고, 목에 관을 삽입해 인공호흡기를 달아놓은 김근태의 모습이었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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