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52518

국민 버린 이승만의 참을 수 없는 '뻔뻔함'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21] 서울 수복, 그리고 도강파-잔류파
17.08.23 10:15 l 최종 업데이트 17.08.23 10:15 l 글: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1948. 8. 15.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기념관


1950. 9. 29. 서울, 중앙청 로비에서 열린 서울 수복기념식에서 맥아더 장군이 기도하고 있다.(앞줄 왼쪽부터 버나네 아프리카 유엔대표, 무초 주한 미 대사, 맥아더 장군,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영부인, 신성모 국방장관).ⓒ NARA


1950. 9. 29. 서울. 서울수복 기념식에 참석코자 중앙청 현관 앞에 속속 도착하는 유엔군 고위층들.ⓒ NARA

돌변한 세상인심

국군과 유엔군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후 13일 만인 1950년 9월 28일, 마침내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후퇴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북상한 셈이다. 그동안 인민군 점령지에 나부끼던 인공기는 삽시간 태극기와 성조기, 또는 유엔기로 바뀌었다. 그와 함께 세상인심도 돌변했다. 

9월 29일 정오에 중앙청 로비에서 수도 '환도식'이 열렸다. 그러나 서울 수복의 감격은 잠시뿐, 대부분 시민들은 더 큰 환멸을 맛봤다. 전쟁이 터지자 빠른 정보로 피란 갔던 '도강파(渡江派, 한강을 건너 피란을 간 무리)'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했고, 정부 말만 믿고 서울에 남은 '잔류파(殘溜派, 서울에 그대로 남은 무리)' 서울시민들은 빨갱이, 불순분자, 부역자라는 의심을 받으면서 혹독한 검증에 시달렸다.


1950. 9. 서울, 유엔군들이 종로 한옥마을에서 인민군 잔당을 쫓고 있다. ⓒ NARA


1950. 9. 29. 서울. 서울 수복 후 군경 및 우익청년단체들이 완장을 차고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고 있다.ⓒ NARA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도강파'들은 서울시민들을 속이고 자기들만 도망치듯 서울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서울에 다시 돌아왔다면 으레 자기들이 몰래 도망간 것을 서울시민들에게 먼저 사과하는 게 마땅했다. 그런 뒤 인공치하에서 석 달간 지낸 서울시민들의 고통을 위로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사과 한 마디 없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서울에 남았던 잔류파들에 대한 서슬 퍼런 잣대를 들이대 닦달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수복의 기쁨보다 부역자 검거열풍에 가슴을 졸였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지시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51. 9. 20. 수풀 속에 숨어있던 한 인민군 병사가 총구 앞에서 짐승처럼 기어 나오면서 투항하고 있다.ⓒ NARA

이는 환란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요, 자괴심이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문리대 사학과 조교수로 서울에 남아 인공 치하를 겪었던 김성칠의 일기를 통해 전란 중 서울시민 생활상을 가늠해본다. 

인공기가 나부끼다

[1950년 6월 28일]
… 낮때쯤 하여 아이들을 앞세우고 돈암동을 떠나 집으로 향하였다. 거리에는 이미 붉은 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있고, 학교 깃대엔 말로만 듣던 인공국기(人共國旗)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되넘이고개(미아리고개)를 넘어서 동소문을 향하여 탱크며 자동차며 마차며 또 보병들이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들은 비록 억센 서북사투리를 쓰긴 하나 우리와 언어·풍속·혈통을 같이하는 동족이고 보매 어쩐지 적병이라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디 멀리 집 나갔던 형제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오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들이 상냥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적개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이건 내가 유독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이 적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어제 본 국군과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 저녁 무렵엔 이미 붉은 완장을 차고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어제까지 대한청년단의 감찰부 완장을 차고 자전거를 달리던 청년도 섞여 있었다. - 김성철 <역사 앞에서> 68~69쪽

[1950년 7월 1일]
… 학교는 이미 인민군이 들어와서 그 일부분을 쓰고 있고, 연구실에는 아직도 들지 아니하였으나 책은 내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인민군들은 생각보다 나이 어린 군인들이 많고, 또 일반으로 영양이 좋지 못한 얼굴들을 하고 있는 것이 의외였으나, 대체로 보아서 규율이 엄격하고 훈련이 철저한 것같이 보였다. 한말로 하면, 인민군에 대한 내 첫인상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내 첫인상을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산산이 부서질 사건이 돌발하였다. 

어제와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몇 분 새로 나오신 선생님들을 다하였을 뿐 어제와 같은 얼굴들이 모여 서로 조심성스레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병정 두 사람이 나타나서 따발총을 우리 가슴에 겨누고 손을 들라 한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당하는 변에 가슴이 덜컥 무너지는 것 같았으나 시키는 대로 두 손을 높이 쳐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손은 약간 떨리었다. 무서움보다도 치가 떨린 때문이었다. 그들은 패잔병처럼 손을 들고 서 있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이윽히 노려보고 나서 "이 중에 반동분자가 섞이어 있지 않소!"하였다. - 위의 책 77쪽


1950. 9. 27. 경인가도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유엔군의 서울 수복을 환영하고 있다.ⓒ NARA

또 한 개의 국기를 그리다

[1950년 7월 3일]
집마다 인민공화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혁명과 해방을 상징한다는 붉고 푸른 바탕 속에 붉은 별이 반짝이는 이 기폭이 얼마나 많은 우리나라 젊은이의 동경 표적이었던가, 또 증오의 과녁이었던가. 

… 나도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를 내어놓고 공화국 기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우리 집 대문간에 달기 위하여서다. 윗집 기가 혹시 격식에 틀리지 않았을까 해서 일부러 동회 앞에까지 가서 눈여겨보고 와서 그렸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서로 보고 멋없이 웃었다. 아침저녁으로 국기를 고쳐 그려야만 하는 우리 신세를 자조(自嘲)함에서였다. 

… 8.15 때 비로소 마음 놓고 태극기를 그리던 감격이 어제이련 듯 새롭건만 오늘은 울부짖는 포화(砲火) 아래서 또 한 개의 우리나라 국기를 그려야 하다니. - 위의 책 82쪽

10월 4일부터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부역자에 대한 검거를 개시해 11월 13일까지 5만여 명의 부역자를 검거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160여 명을 사형 집행했다. 당국에 인지된 부역자 수는 최종적으로 55만여 명으로 잔류 서울시민 절반 이상이었다. 

부역 혐의자에 대한 검거와 재판은 대부분 두렷한 증거도 없이 목격자의 구두 진술에 의존하거나 심증만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허다해, 사적인 원한 관계로 부역죄가 날조되거나 과장돼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도 속출했다.


1950. 9. 25. 유엔군들이 서울을 탈환하고자 한강 도강 작전을 펼치고 있다.ⓒ NARA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

당시 서울시민으로 인공치하를 산 소설가 박완서는 후일 여러 작품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이렇듯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에겐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일단은 부역의 혐의를 걸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마련이었다. 비록 그들이야말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정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순수한 양민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정상은 참작되지 않았다. 부역에 있어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결백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한강다리를 건너 피란을 갔다왔다는 게 제일이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반공주의자 내에서도 도강파라는 특권계급이 생겨났다." -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252~253쪽


1950. 9. 29. 서울. 유엔군의 전차가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있다.ⓒ NARA

서울 성북구 미아리 고개는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는 서울 최후 방어선이었지만, 9․28 수복 때는 북으로 쫓겨 가던 인민군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끌고 가면서 뒤처진 사람들을 학살한 곳이요, 수복 후에는 군경과 우익단체들이 좌익이나 부역혐의자들을 데려다가 처형했던 곳이다. 가히 '원한의 핏빛 골짜기'라 할 수 있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맬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 반야월 작사 이해연 작곡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중

(* 다음 회는 '북진' 편입니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돼 그 가운데 일부가 몹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를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1950. 9. 26. 유엔군들이 서울 수복을 하면서 인민군 및 공산 혐의자를 색출한 뒤 연행하고 있다. ⓒ NARA


1950. 9. 27. 서울. 미 해병대가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 서울 탈환을 상징하는 성조기를 올리고 있다.ⓒ NARA


1950. 9. 29. 서울. 서울수복 기념식에 맥아더 원수가 참석한다고 중앙청 주변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 NARA


1950. 9. 29. 서울. 유엔군의 수복 후에도 인민군 잔당 소탕작전으로 불길은 계속 치솟았다. ⓒ NARA


1950. 9. 28. 대구. 대구시민들이 유엔군의 서울 탈환 축하 집회를 열고 있다.ⓒ NARA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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