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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족벌 과감히 척결…웅진 백제시대 펼쳐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 <41> 백제 무령왕 ①

기사입력 2020. 10. 28 16:31 최종수정 2020. 10. 28   16:35


북위·양 등 활발한 사신 외교. 왜에는 선진문물 전파하기도.
탐라와 통교 섭라 영토 영입 

사후 공주 송산리 고분군 예장. 피장자 신분 밝혀진 유일한 능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무령왕릉. 백제 31명 임금 중 피장자가 밝혀진 유일한 능이다. 필자 제공


한반도 4국(백제·고구려·신라·가야)을 둘러싼 동아시아 국제 정세도 요동치기는 매일반이었다. 중원(중국)에서는 남·북조 분단 상황에서 소국들 간 영토 쟁탈전이 치열해 망국과 건국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북조의 강국 북위(386~534)와 남조의 강국 양(502~557)은 한반도 4국왕에게 경쟁적으로 관작을 수여하며 과도한 충성을 요구했다. 동북아(만주)의 거란(4세기~1125)과 물길(420~581·말갈의 전신)은 북방의 맹주 고구려와 수없는 접전을 벌였다. 때로는 고구려 사주를 받고 백제·신라를 침공해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왜(일본)에서도 번국 간 패권 싸움으로 소국들의 이합집산이 빈삭했고 왕위 교체 시마다 무고한 인명이 잔혹하게 희생됐다. 25대 무열왕(재위 489~507)이 26대 계체왕(재위 507~531)으로 교체되는 와중에는 수많은 왕족·신료들이 목숨을 잃었다. 백제 무령왕은 계체왕 즉위에 크게 기여했고 딸 수백향을 계체에게 출가시켜 황후로 삼게 했다. 수백향은 29대 흠명왕(재위 539~571)의 어머니다.


무령왕의 출생과 성장 과정은 참으로 기구했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24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술돼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동성왕이 왜에서 귀국해 즉위(479)할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고 22년 재위하다 훙거(501)할 때는 40대 중반이었다. 뒤를 이은 무령왕이 40세로 등극(501)해 22년 보위에 있다 62세에 붕(523)했다. 동성왕과 무령왕 나이 차이는 불과 4~5세에 불과한데 어찌 부자간일 수 있는가. 이 같은 사실(史實)은 1971년 7월 무령왕릉(충남 공주시 금성동) 발굴 시 출토된 지석(誌石·망자의 생몰 연대와 지위를 새긴 돌)을 통해 입증됐다. 백제 조정에서는 무령왕 죽음을 황제와 동격인 붕(崩)으로 지칭했다.


21대 개로왕(재위 455~475)에게는 문주(22대왕)·곤지의 두 동생이 있었다. 개로왕이 고구려·신라와의 전쟁 승리를 위해 왜에 원병을 요청하자 왜는 인질을 요구했다. 곤지가 인질로 출국 직전 왕의 진심을 확인하겠다며 형수와 동행을 요구했다. 개로왕은 만삭의 후궁을 보내며 도중에 출산하면 아이와 산모를 귀국시키라고 명했다. 왜의 축자국(북 큐슈지역) 부속 섬인 각라도에서 후궁이 왕자를 낳으니(462) 융이다. 이후 개로왕의 서(庶)왕자 융은 백제와 왜를 떠돌며 부평초 같은 신세로 성장기를 보냈다. 

무령왕릉 현실 입구. 내부 손괴 우려로 영구 폐쇄 중이다. 필자 제공


융을 안고 귀국한 후궁에게 개로왕은 싸늘했다. 왜의 곤지에게 후궁은 돌려보내고 융만 양육하려 했으나 융이 성장하며 어머니를 찾자 융도 곤지에게 맡겨 버렸다. 융의 숙부였던 곤지는 창졸간에 융의 양부가 됐다. 곤지는 자신의 다섯 아들과 융을 함께 키웠는데 둘째 아들 모대와 융 사이가 돈독했다. 모대는 융의 이부(異父) 형이자 사촌 형이었다.


백제 왕실에 역모가 발생해 23대 삼근왕이 재위(477~479) 2년 2개월 만에 살해당했다. 조정 대신들이 모대를 황급히 귀국시켜 즉위시키니 동성왕이다. 18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한 융도 왕을 따라 귀국했다. 동성왕은 초기의 선정과 주변국 간 등거리 외교술로 민생이 안정되자 자만해졌다. 사치·향락과 주지육림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자 웅진 토착 세력의 수장 백가(생몰년 미상)가 왕을 시해했다.


서기 501년 11월 융이 용상에 오르니 무령왕이다. 왕은 등극하자마자 가림성에서 항거 중인 백가를 추포해 참수한 뒤 백강(금강)에 수장시켰다. 당시 웅진에는 마한 귀족의 잔존 세력이 엄존해 한성 왕실·귀족과 자웅을 겨루는 상황이었다. 이후 무령왕은 조정 내 파벌·족벌을 과감히 척결하고 왕족 내 도전 세력을 분산시켜 왕권을 강화했다. 사학계에서는 무령왕이 백가 처단 이후 비로소 웅진 백제시대를 소신껏 펼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의 키가 8척(240㎝) 장신이었고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그를 따랐다’고 기록돼 있다. 왕은 재위 시 ‘사마왕’이란 호칭으로 회자됐다. 왕이 축자국 섬(島·일본어 시마)에서 출생해 사마(시마의 변형)라는 별칭으로 불린 것이다. 왕은 왜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백제 왕자의 위엄과 체통을 잃지 않았다. 왜 왕실과 조정에 백제 문화를 널리 선양하며 왜인들의 속성도 심도 있게 파악했다. 즉위 후 왜에서 파견(509)한 사신을 정중히 맞아 우호 관계를 증진시켰다. 답례로 오경(五經) 박사 단양이(513)와 고안무(516)를 파송해 백제의 선진 문물을 전파했다.


무령왕은 왜가 적대국을 대하는 전략·전술도 면밀히 보고 익혔다. 적국의 내침 첩보가 사전 입수되면 평소 강군 훈련으로 무장된 군사를 먼저 일으켜 기선을 제압했다. 군사력이 열세일 때는 우호 사절단을 미리 보내 침공 의도를 무력화시켰다. 이 같은 왜의 위장 전략에 말려 신라의 대마도 점령과 본토 침공 계획이 좌절된 바 있다. 왕 2년(502) 백제에 기근이 들고 역병이 창궐하자 고구려의 내침 기미가 사전 감지됐다. 왕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 국경을 선제공격하자 문자명왕이 철군했다.


고구려의 백제 침공은 무령왕 재위 기간 내 10여 차례나 자행됐다. 왕은 1차 접전에서 패하면 전열을 정비한 후 재차 공격을 가해 반드시 응징했다. 고목성·장령성 등 접적 지역 석성을 축조(507)해 적군 침입에 대비하고 왕실 보관미를 방출해 유민들을 구휼(510)했다. 가뭄·홍수가 겹쳐 백제 백성들이 신라로 월경(521)하자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난민을 회향시켰다.


왕은 고구려·신라·가야의 활발한 사신 외교에 자극받아 북위·양·왜에 사절단을 자주 파송했다. 왕 8년(508) 탐라(제주도)와 통교해 남방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신라와 밀접해진 가야를 압박했다. 섭라(섬진강 유역)를 백제 영토로 편입하는 과정에서는 고구려·신라·가야·왜와의 국가 이익이 충돌해 전쟁 일보 직전의 사면초가에 몰리기도 했다. 가야 영토였던 섭라의 강역 문제는 6세기 초 동아시아 각국 외교·무역의 첨예한 현안이었다. 전통적 우호 관계였던 백제와 가야가 적대국으로 등 돌리고 가야가 신라에 조공하며 신라에 합병되고 말았다.


무령(武寧)은 국태민안의 생전 업적과 무공을 기려 사후 조정에서 지어 올린 시호다. 왕은 승하한 지 2년 3개월 만에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群)에 정남향(자좌오향)으로 예장됐다. 1974년 고분군 배수 작업 중 우연히 출토된 무령왕릉 지석에서 놀라운 사실들이 확인됐다. 무령왕릉은 백제 31명의 임금 중 피장자 신분이 밝혀진 유일한 능이다. 고분군 주변에는 마한 귀족으로 추정되는 왕릉급 무덤들이 즐비하다.


6세기 초 백제 25대 무령왕 재위(501~523) 당시 변방국 정세는 수시로 급변했다. 고구려는 20대 장수왕이 훙서하고 21대 문자명왕(재위 491~519)이 즉위했으나 28년 만에 선어해 22대 안장왕(재위 519~531)이 용상에 올랐다. 신라는 21대 소지왕에 이어 22대 지증왕(재위 500~514)이 왕위를 승계한 뒤 15년 만에 등하하고 23대 법흥왕(재위 514~540)이 등극했다. 가야는 9대 겸지왕(재위 492~521) 안가 후 10대 구형왕(재위 521~532)이 보탑에 올랐다. 접경국의 잦은 왕권 교체는 자국 내 정정 불안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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