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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2012년, 다시 쓰는 정봉주 판결문 / 박용현
[한겨레] 등록 : 20120101 20:31  박용현 오피니언넷부장
   
“무결점의 경력 내세우는 후보라면, 이를 공격하는 정적이나 언론에 ‘파울!’이라고 외쳐선 안 된다”

정봉주는 즉각 석방돼야 한다. 그리고 정봉주는 무죄다.

두 명제를 굳이 나눈 것은 ‘석방’이 한겨울에 감옥에 던져진 정봉주 개인을 위해서나, 민주국가에서 제명될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품격을 위해서나 당장 필요한 조처이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결이 모두 옳다고 치더라도, 그를 감옥에 가두는 건 2010년대 국제사회에서 부끄러운 짓이다. 유엔과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미주기구(OAS) 등은 거짓이든 참이든 말로써 다른 사람을 비방·비난했다는 이유로, 민사소송이라면 몰라도, 형사처벌을 당하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용인될 수 없다고 밝혔다.

영국에 본부를 둔 표현의 자유 옹호단체 ‘제19조’(Article 19·세계인권선언 중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조항에서 이름을 따옴)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유럽에서 한 사람이라도 이런 식의 형사처벌을 받은 나라는 러시아·스페인·폴란드·벨라루스 네 나라뿐이다. 5명 이상이 처벌된 것으로 확인된 나라는 이집트, 이란, 시리아, 우즈베키스탄, 중국 등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각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과 거의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명단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격이 1980년대 김근태를 고문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던 때의 그것과 과연 얼마나 다르다고 해야 할까.

다음으로 정봉주의 ‘무죄’에 관한 이야기. 그가 한 말이 허위였다고 하더라도 과연 (감옥에 보내는 건 아니라도 어떤 형태로든)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답은 저 유명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1964년)일 것이다. 공직자 및 공공의 사안에 대한 비판은 잘못된 사실에 근거했더라도 매우 제한된 경우에만 규제해야 하며 그 기준은 ‘실제적 악의’(actual malice)라고 판시했는데, 이는 ‘허위의 사실이란 점을 분명히 알았거나, 허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인식하면서도’ 발언을 한 경우를 뜻한다. 단지 조사가 미진해서 사실을 정확히 모른 채 말한 것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나아가, 정봉주가 공격한 인물은 일반 공직자가 아닌 ‘선거 후보’였다는 특수성도 생각해볼 일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또다른 판결을 통해 선거 국면에서 표현의 자유가 지니는 특별한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국민의 종’을 뽑는 과정에서야말로 표현의 자유가 가장 완전하게, 또한 가장 시급하게 적용돼야 한다. … 선거에서 무결점의 경력을 내세우는 공직 후보라면, 이를 공격하는 정적이나 언론에 ‘파울!’이라고 외쳐선 안 된다.”(‘모니터 패트리엇 대 로이’ 판결, 1971년) 상식적으로 선거는 후보 검증이든 정책 검증이든 공방을 벌이고 주권자인 국민이 표로써 판정을 내리는 신성한 토론의 장이다. “제기된 의혹이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는지” 여부는 판사가 형사처벌을 내리기 위해 따질 문제가 아니라, 유권자들이 표를 던지기 위해 판단할 문제인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존 스튜어트 밀의 지혜에 가 닿는다. “진실은 허위와 부딪침으로써 오히려 더 분명하게 인식되고 더 생동감있게 모습을 드러낸다.”(<자유론>)

이제, 지금까지 한 이야기의 전제가 됐던 마지막 문제를 살필 차례다. ‘정봉주의 발언은 과연 거짓이었나?’ 비비케이에 대한 국민적 의혹은 끝나지 않았다. <나꼼수>에 쏟아지는 저 열광이 이를 입증한다. 의혹이 사실무근이라는 검찰·특검의 결론을 믿을지 여부 또한 유권자들의 정치적 판단 중 하나일 뿐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나쁜 정부를 일찌감치 예견하고, 수상한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면 다가오는 독재의 냄새를 알아차려야 한다”고 했다. 정봉주는 한 대통령 후보의 적격성에 대한 의문을 부지런히 제기함으로써 그가 당선됐을 때 우리 사회에 가져올지 모르는 위험을 경고했을 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허물어져 내리면서 그 우려가 현실이 됐음을 모두가 목도하는 지금, 그는 감옥에 갔다.

박용현 오피니언넷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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