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ocutnews.co.kr/news/4845058

산사람한테 쌀 한 줌 줬다고 빨갱이 낙인
2017-09-13 07:00 제주 CBS 김대휘, 문준영 기자 

[제주4·3수형인]③ 박내은 "남편도 죽고…4·3 다시 일어나면 목숨 끊겠다"

제주4·3(1947.3~1954.9)으로 제주도민 3만 여명이 죽고 민간인 2500여명이 군사재판을 받았다. 이들 수형인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거나 살아남은 자는 육체적·정신적 후유장애와 함께 억울한 삶을 살아왔다. 현재 신고된 수형 생존자는 33명. 이 가운데 18명이 지난 4월 19일 제주지방법원에 ‘4·3수형희생자 불법 군사재판 재심’을 청구했다. CBS 노컷뉴스는 이들 18명의 기구한 삶을 소개한다. 기사는 수형 생존자들의 삶을 이해하기 쉽도록 일부는 1인칭으로, 나머지는 인터뷰 형식을 취했다. 당시 나이는 수형인명부를 따랐다. [편집자 주]


박내은 할머니 (사진=문준영 기자)

“아직까지 남편 오태화가 어디서 죽었는지 모릅니다. 죽은 날도 몰라 음력 6월 24일 생일에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만약 다시 4·3사건이 일어난다면 제 스스로 목숨을 끓을 겁니다. 제 스스로….” 

서귀포시 표선면 박내은(91) 할머니는 1948년 10월 중순 표선면 가시리 인근 오름에 올라갔다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서귀포 지서로 옮겨진 박 할머니는 그곳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 ‘산사람’(무장대)에게 쌀 한줌 준 게 죄였다. 

“저는 표선면 가시리 중산간에 살았습니다. 당시 산 사람이 와서 쌀을 달라고 해서 쌀 한 되박과 돈 5원 준 죄 밖에 없어요. 안주면 산 사람에게 당하고, 아랫사람(군경)은 아랫사람대로 억압하고. 중간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당시 박씨의 나이 스물둘. 두 살배기 아이를 업고 경찰서에서 취조와 고문을 당한 박씨는 제주시 관덕정에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전주형무소로 옮겨진다.


추미애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999년 9월 15일 당시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견한 4.3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박내은 할머니(당시 이름 박춘옥)의 군법회의 판결 날짜는 1948년 12월 28일로 기록돼 있다. (사진=4.3수형인 명부, 문준영 기자)

국가기록원에 기록된 4·3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박씨의 군법회의 판결 날짜는 1948년 12월 28일로 기록돼 있다.  

본격적으로 4·3사건이 일어난 1948년 11월 중순부터 4개월 동안 토벌대는 중산간을 중심으로 강경진압작전을 전개한다. 이 기간 95%가 넘는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타 사라진다. 일명 초토화 작전이다. 박 할머니는 이때 산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혔다.  

“고문은 끔찍했습니다. 경찰이 허리띠 같은 고무빠따로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자기들도 때리기 버거웠는지 팔이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전기 고문을 해요. 엄지손가락에 전기선을 감아서. 죽었다 깨나는 겁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여 달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저에게 최고 악질이라고 합디다. 너 같은 여자 죽이는 거 파리하나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 말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4.3피해자들은 수시로 군부대와 경찰서, 우익단체 사무실에 끌려가 취조를 당했다. 보고서에는 경찰서에 구금돼 고문으로 허위사실을 고백한 사례가 수없이 기록돼 있다. 고춧가루 물이 든 주전자를 코로 넣거나 쇠좆매(소의 생식기를 말린 매)와 각목 등 도구를 이용한 폭행도 만연했다.

박 할머니는 관덕정에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아이와 함께 전주형무소로 옮겨진다. 박 할머니는 당시 어떻게 재판이 진행됐는지, 자신이 무슨 처벌을 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제주항에서 배타고 목포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게 아마 섣달 중간이었을 겁니다. 항에서 기차를 타고 전주형무소로 가는데 며칠 동안 먹이질 못해 아기가 다 죽어갔습니다. 죽은 줄 알고 아기 코에 손을 대고 숨 쉬는지 수시로 확인하며 감옥으로 갔습니다.” 

전주형무소에 도착하자 수감자들은 제주 사람들을 산송장이라며 손가락질 하기 바빴다. 박 할머니는 이들의 비아냥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교도관이 새끼가 무슨 잘못이냐며 죽을 가져다 줬습니다. 죽을 아기 입에 넣으니 똘깍똘각 하며 삼켜요. 그제야 아이가 눈을 떴습니다. 나중에는 안에서 죽만 먹으니 영양실조 걸려 밤만 되면 설사를 했어요. 그래도 애가 살더라고. 사람 명이 질긴 걸 그때 알았습니다.” 

박 할머니는 전주형무소에서 표선면 가시리 사람인 강선녀, 한신화 등 5명과 함께 살았다. 감방에 아이가 2명 더 있었는데 이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교도관들은 박 할머니의 아들이 아픈걸 알고 감방에서 키우도록 허락했다. 다른 수감자들은 징역이 끝난 뒤 고아원에 아이를 찾으러 가야했다.


박 할머니가 고문 당시 부러졌던 왼쪽 손목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문준영 기자)

박 할머니는 형무소 안에서 죄수복을 만들었다. 고문으로 손목뼈가 부서져 고통이 심해 매일 울며 미싱을 돌렸다. 아이는 작업대 밑에 두고 키웠다. 그렇게 10개월을 형무소에서 살았다. 

“징역살이를 끝내고 출소할 때 보관 중이던 옷을 교도관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교도소에서 받은 돈 몇 푼으로 배를 타고 제주에 왔습니다. 아이 업고 40㎞ 넘는 길을 걸어 가시리에 도착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죽고 없었습니다.” 

4.3은 남편을 앗아갔다. 그 누구도 남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죽었다는 소문만 동네에 퍼져 있었다. 박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박 할머니가 연습장에 적은 글이다. 종이에는 '당신 정말 내 사랑, 정말 별난 사랑, 모르나봐. 가지마라 내 청춘아.'라는 글이 적혀 있다. (사진=문준영 기자)

“속이 얼큰해요. 다시 생각하면 너무 얼큰해. 내가 아들한테도 4·3이야기를 안해요. 우리 친 아시(동생)는 자식들한테 4·3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저는 말 안합니다. 이렇게 살아온 내 삶이 창피해서. 생각하면 너무 야속하고 힘들어서. 넘어버린 일 말해도 필요가 없어서...” 

◇ 수형인 2530명, 살아남은 생존자 18명 재심청구

박 할머니처럼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한 옥고를 치르고 고통의 생을 보낸 18명의 수형생존자들이 재심을 청구하기 위해 지난 4월 19일 법원에 모였다.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와 생존자 18명은 이날 제주지방법원에 ‘4·3 수형 희생자 불법 군사재판 재심'을 청구했다. 

이들은 지난 1948~1949년 자행된 군법회의가 문명국가의 재판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절차조차 갖추지 않았고, 판결이 법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이었으며 ‘초사법적 처형’이었다고 재심 청구 이유를 밝혔다. 

강미경 4·3도민연대 조사연구원은 “군법회의는 일반재판과 달리 판결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일반 판결문에 따르면 살인 등 강력범죄에 징역 1년이 선고됐지만, 군법회의에서 내려진 내란죄는 1년형 이상은 기본이었고 무기징역을 비롯해 15년, 7년 등 중형이 잇따랐다”고 설명했다.  

국가기록원의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4·3당시 형무소로 옮겨진 수형인들은 2530명이다. 전문가들은 공식적인 기록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형무소에 수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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