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60015

포로수용소 안에서 벌어진 전쟁, 미군도 손을 들었다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28] 거제 포로수용소와 휴전 제의
17.09.17 11:31 l 최종 업데이트 17.09.17 11:31 l 글: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1951. 12. 27. 거제포로수용소 전경, 1950년 11월 27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한국전쟁 중 인민군 15만여 명, 중국군 2만여 명 최대 17만 3천여 명의 포로를 수용했던 곳이다. ⓒ NARA

나이 어린 인민군 포로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기획은 지난 6월 12일부터 오는 9월 21일까지 100일 동안 모두 30회로 연재하기로 편집부와 약속했다. 이제 이 연재는 종착역을 앞두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이 사진들을 입수한 이야기와 나이 어린 인민군 포로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한다.

2004년 1월 31일, 나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끈질기게 추적한 권중희 선생과 백범 암살 진상의 자그마한 언턱거리라도 찾아보고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갔다. 우리가 먼 그곳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열화와 같이 성금을 보내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미주동포들의 뜨거운 환영과 그분들의 자원봉사로 'Kim goo' 팀을 꾸려 '솔밭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으로 NARA에서 문서를 찾는 일을 시작했다.

영어에 매우 서툰 나는 'Kim goo' 팀의 C파트로 사진을 검색하면서 그 가운데 우리 현대사에 긴요할 장면들은 스캔했다. 그때 나를 도와주신 분은 재미동포 박유종 선생으로 그분은 임시정부 백암 박은식 대통령의 막내손자였다. 그분 때문에 이후로도 나는 1800여 컷의 사진을 입수할 수 있었다.   

2004년 2월 17일,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박 선생은 그곳 아키비스트(Archivist)로부터 막 전달받은 한 문서 상자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그런 다음 사진 뒷면의 영문 설명을 번역해 내게 들려줬다.

"가장 나이 어린 포로로 이름은 김해심, 통역은 이수경이라고 기록됐네요. 포로 심문관은 미8군 서전트(Sergent, 하사관)라고만 표기됐습니다."


950. 8. 18. 가장 나이 어린 북한 소년병 포로, 그의 이름은 김해심, 가운데 통역 이름은 이수경으로 표기돼 있었다.ⓒ NARA

나는 그 사진을 보자 인민군포로가 마치 내가 교단생활 초기 서울 오산중학교에서 가르쳤던 한 개구쟁이 제자처럼 보였다. 또한 어린 시절 고향(경북 구미)의 가축병원 김아무개 수의사 조수가 떠올랐다. 

그 조수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평안도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인민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는 다부동전선에서 한 여군 간호사의 꼬임에 탈출한 뒤 유엔군에게 체포됐다. 그는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가 그 여자를 만나고자 반공포로로 석방돼 당시 그 여자와 첫 정을 나눈 구미에 정착했다.


2005. 7. 22. 백두산 가는 도중, 밀영사무소 처마 밑에서 소나기를 피하다가 만난 오영재 시인(왼쪽)과 필자.ⓒ 박도

후일 나는 그 사진과 김아무개를 연관시켜 장편소설 <약속>을 펴낸 바 있다. 

또 내가 2005년 남북작가대회 당시 백두산 가는 길에 만났던 오영재 시인도 한국전쟁 당시 16세로 전남 강진중학교에 다니다가 의용군으로 입대했는데 그날까지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긴 한 숨을 내쉬었다.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 세월아, 가지 말라 / 통일되어 /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도 /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 이 가슴이 아픈데 / 통일되어 /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 나에게 다오 / 내 어머니 몫까지 /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 북한의 계관시인 고 오영재 '아, 나의 어머니'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1951년 2월 초, 부산포로수용소는 포로들에게 갑자기 소지품을 지참케 한 뒤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이들 포로는 곧 부산부두에 정박한 상륙작전용 수송선(LST)에 실렸다. 그러자 포로들 사이에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수송선이 부산부두를 떠나 그대로 제3국인 일본으로 간다고 좋아하는 포로도 있었고, 태평양 깊은 바다에 그대로 쓸어버릴 거라고 공포에 떠는 포로도 있었다.

그 수송선이 부산항을 출항해 얼마를 항해한 뒤 곧 닻을 내렸다. 포로들은 갑판에서 뭍에 갓을 쓴 노인이 보고, 비로소 거기도 한국 땅인 줄 알고 그제야 안도하기도, 실망하기도 했다. 그곳은 부산에서 그리 멀지 않는 거제도였다.


1951. 4. 유엔군 측 기간병들이 중국군 포로를 조사하고 있다.ⓒ NARA


1951. 4. 국군 헌병들이 중국군 포로들을 포로수용소로 이송시키고자 포로수집소 앞에 집결시키고 있다.ⓒ NARA

유엔군이 거제도에 새로 포로수용소를 지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전장(戰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대도시 부산에 14만 명 가까운 포로가 수용돼 있다는 사실에 대한 우려였다. 그 둘째는 유엔군의 병력이 적과 싸우기도 모자라는데 막대한 병력을 포로 경비와 관리에 쓰고 있는 사실에 대한 고육책이었다. 그 셋째는 10만 명이 넘는 포로들의 폭동이나 탈출에 대한 사전에 예방 조치였다.

만일 10만이 넘는 부산포로수용소 포로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킨다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것으로 여겼다. 그밖에도 거제도는 육지에서 거리가 가깝다는 이점도 크게 작용했다. 아무튼 거제포로수용소는 부산 포로수용소보다 경비하기도 쉽고, 포로수용소 관리비도 적게 든다는 이점이 있어 그곳에 세워지게 됐다.

1950년 11월부터 유엔군은 거제도 고현동, 수월동 등지에 포로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는 대부분 포로들이 지었다. 먼저 거제도에 도착한 포로들은 수용소 울타리 철조망 설치작업부터 했다.

그런 다음 불도저로 부지 정지작업을 한 뒤 감시 망루를 설치했다. 포로들은 그곳에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천막을 쳤다. 잠깐 새 거제도는 온통 천막으로 뒤덮인 섬이 됐다. 초기 막사는 천막뿐이었으나, 곧 흙벽돌 영구 막사들도 들어섰다.


1952. 2. 8.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이 스탈린 초상과 인공기를 들고 철조망 안에서 시위하고 있다.ⓒ NARA

친공포로, 수용소 내 주도권을 잡다

유엔군은 거제포로수용소를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4개 구역과 28개 동(棟)으로 배치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7, 8, 9구역으로 배열했으며, 1개 단위 구역에는 6000명을 수용할 수 있게 터를 닦았다. 그런 뒤 유엔군은 부산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을 이송시키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말부터 시작한 포로 이송작업은 그해 6월 말에 끝났다. 그러자 거제 포로수용소 포로는 14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 거제 포로수용소가 문을 열자 친공 포로들은 부산 포로수용소 때와는 달리 곧장 주도권 장악에 나섰다. 그들은 수용소 내 주도권을 확실히 잡고자 반공 포로들에게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포로수용소 내에서 일대 살육전이 벌어졌다. 

그런 소요사태로 포로수용소 안은 미군도, 국군도 들어가지 못하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에서 인민재판까지 열어 반공포로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또한 수용소 내에 인공기가 게양되고, 적기가가 울러 퍼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1952. 3. 20.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이 내 건 유엔군 규탄 플래카드들.ⓒ NARA

유엔군은 이러한 사태를 반전시키고자 포로수용소에 전향한 반공청년단 포로들을 들여보냈다. 그러자 포로수용소 내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됐다. 해방동맹의 친공포로와 반공청년단의 반공포로들이었다. 이들 두 세력이 팽팽히 맞서면서 수용소 내에 인공기와 태극기가 밤낮으로 바뀌어 게양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연일 포로수용소 철조망 안에서 두 세력 간 전선을 방불케 하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친공포로들은 드럼통을 잘라 만든 칼로 반공포로를 살해한 뒤 시체의 각을 떠 맨홀이나 변소에 집어넣는 야만적인 살육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에 맞선 반공포로들의 친공포로에 대한 반격도 막상막하였다. 포로수용소 안에서도 또 다른 전투가 연일 계속됐다.


1951. 4. 중국군 포로들이 막사 밖에서 인원 점호를 받고 있다.ⓒ NARA

도드 피랍사건

1952년 5월 7일, 도드 준장은 제76구역 포로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포로수용소장 면담을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도드의 보좌관은 포로들의 과격한 행동을 우려한 나머지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도록 건의했다. 하지만 도드는 보좌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약속시간에 제76구역 출입구에서 직접 포로 대표들과 면담했다. 그런데 면담 도중 갑자기 포로들이 도드를 에워쌌다. 곧 포로들은 순식간에 도드를 납치해 포로수용소 안으로 끌고 갔다. 

당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이 사태를 긴급 보고받고, 즉각 도드를 해임시키고 콜슨 준장을 새 거제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했다. 친공포로들은 도드 감금에 성공하자 콜슨 신임 포로수용소장에게 도드 석방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그 요구조건은 포로수용소 내에서 유엔군 기간병들의 포로에 대한 야만적 행위 중지, 포로 자유송환 중지, 포로 강제분리 심사 금지, 포로 대표단 인정 등이었다. 콜슨 소장이 그들에게 포로 자유송환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요구조건을 다 들어줬다. 그러자 친공포로들은 도드를 풀어줬다. 도드가 감금된 지 3일 만이었다.


포로수용소 안에서 죽은 동료의 관을 포로수용소 밖 묘지로 운구하는 포로들. ⓒ NARA

도드가 석방되자 유엔군사령부는 그의 실책을 추궁했다. 그와 함께 사태 수습을 맡았던 콜슨도 너무 큰 양보를 하는 등, 포로수용소장으로 신중치 못한 처사라고 판단해 그 책임을 물었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즉각 콜슨도 해임하고, 그의 후임에 보트너 준장을 새 거제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했다. 그런 뒤 도드 납치진상조사단의 보고를 받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곧 도드와 콜슨 두 준장을 대령으로 강등하는 불명예 조치를 내렸다.

도드 석방요구 조건으로 의외의 수확을 얻은 친공포로들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그들은 수용소 내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김일성과 마오쩌둥 사진을 내거는가 하면, 포로수용소 곳곳에 미군을 모욕하는 플래카드를 걸었다. 그러자 신임 보트너는 이에 분개해 공수특전단을 포로수용소에 투입하는 강경책을 폈다. 

공수특전단은 탱크를 앞세우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 친공포로들이 게양한 인공기를 모두 내렸다. 그런 뒤 친공포로들을 500명 단위로 강제로 분산 수용해 그들의 조직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그들이 거부한 포로송환 심사도 받게 했다. 보트너 포로수용소장의 강경책 이후 포로수용소 내에서 인공기나 중국기가 게양되는 일은 차츰 사라졌다.


1953. 3. 20. 거제도 중국군 포로들이 철조망 안에서 따뜻한 봄볕을 즐기고 있다.ⓒ NARA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 정전(휴전) 회담

1951년 3월 이후 전선은 38선에서 거의 교착상태였다.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38선을 사이 두고 지루한 공방전을 거듭 펼쳤지만 피차 개전 초기와 같은 전선의 급격한 변동은 없었다. 그 무렵 전선은 서로 샅바를 거머쥔 채 상대의 허점만 노리는 씨름꾼의 형세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날 1951년 6월이었다.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그제야 비로소 단시일 내 상대편을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런데다가 장기간 전선은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교착되자 국제 외교가에서는 휴전(정전) 논의가 슬그머니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51. 9. 개성, 초기의 정전 회담장이었던 한 한옥 ‘내봉장(來鳳莊)’으로 일제강점기 때는 고급 요리점이었다. 이 장소는 그해 10월 24일까지 사용되다가 다음날부터 유엔군 측 요구로 판문점으로 옮겨졌다.ⓒ NARA

그 신호탄을 쏜 첫 주인공은 미소 간 사전 비밀 접촉 끝에 조율한 각본대로 주유엔 소련대사 말리크였다. 그는 유엔방송을 통해 '평화의 가치'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 인민은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종용하고, 교전국 간의 휴전(정전)협상 토의가 시작되기를 희망한다."

이 한 마디는 전쟁 당사자, 특히 미국에게는 대단히 반가운 이야기였다. 미국은 감히 청할 수는 없지만 간절히 바랐던 소원이었다. 당시 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전쟁에서 먼저 '휴전'이라는 말을 차마 먼저 꺼낼 수 없었다. 이게 다 체면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대외적으로 소련 측에서 이를 먼저 제의하자 미국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미국은 자신들의 본심을 숨긴 채 몽니를 부리며 겉으로는 말리크 소련대사의 체면을 살려주는 척, 의뭉스럽게 슬그머니 정전협상 테이블로 나갔다.


1952. 3. 20. 거제도, 중국군 포로수용소 정문.ⓒ NARA

(* 다음 회는 '정전(휴전)협정 조인' 편입니다. 이 연재는 30회로 끝날 예정입니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일부는 몹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를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1952. 3. 20. 거제도, 포로들이 청소한 오물을 버리려고 수용소 바깥 쓰레기장으로 가고 있다.ⓒ NARA


1952. 5. 거제포로수용소 기간병들이 포로들에게 몸에 이를 구충하고자 DDT를 살포하고 있다.ⓒ NARA


1952. 3. 20. 거제포로수용소. 한 포로감시병이 포로감시초소 기관총 앞에서 중국군 포로수용소를 경계하고 있다.ⓒ NARA

덧붙이는 글 | 필자는 <개화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이어 <미군정 3년사>를 곧(10월 중 예상) 출간할 예정입니다. 이 책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덮여진 미 군정 3년사와 공개되지 않은 비장의 사진도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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