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53454

"북한 공격" 고집이 불러온 결과, '중국 참전'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22] '항미원조 지원군'을 불러들인 북진
17.08.26 11:57 l 최종 업데이트 17.08.26 11:58 l 글: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중국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고자 눈으로 덮인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 중국해방군화보사 / 눈빛출판사

"즉시 북진(北進)하라"

유엔군 총사령부는 서울을 수복한 다음날인 1950년 9월 29일, 모든 예하 작전부대에 일단 38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묵살한 채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를 경무대로 불렀다.

"어찌하여 북진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인가? 38선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가?"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고 한다. 이에 정 총장은 대답했다. 

"38선 때문입니다."
"38선이 어찌 되었다는 것인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것인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다는 것인가?"

정 총장은 이 대통령의 꾸짖음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저희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입니다. 유엔군과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저희들은 각하의 명령을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지니고 있습니다. 38선 돌파는 이제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각하의 명령만 내리신다면…."


1950. 9. 16. 부산 구포. 이승만 대통령이 임시훈련소에서 장병들에게 훈시하고 있다.ⓒ NARA

이 대통령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집어 정 육군참모총장에게 건넸다. 이 대통령은 군 수뇌부를 호출하기 전에 미리 써놓은 38선 돌파 명령서였다.

"이것은 나의 결심이오, 명령입니다."

그 종이에는 붓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北進)하라. 1950년 9월 30일 대통령 이승만'
- <정일권 회고록> 260~262 축약

이 명령에 따라 국군은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했다. 국군 제3사단 23연대가 강원도 동해안 양양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이 날은 나중에 국군의 날이 됐다.


1950. 10. 평양. 유엔군 차량이 평양에 입성하고 있다. 선도차에는 태극기과 성조기가 달려 있다. ⓒ NARA

저우언라이(周恩來)의 경고

당시 중국 외상 저우언라이(주은래, 周恩來)는 유엔군(당시 국군도 유엔군에 배속됨)의 10월 1일 38선 돌파를 긴급 보고받은 즉시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경우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이튿날 저우언라이는 베이징 주재 인도 대사를 불러 "만일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의용병 형태로 참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곧장 미국과 영국에 전달됐지만 무시당했다. 

10월 2일 맥아더는 미8군사령관 워커에게 '군사상 추적권은 승자(勝者)의 당연한 권리'라는 논리와 주장으로 유엔군의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이에 앞서 맥아더는 10월 1일에 북한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일성으로부터 별다른 반응이 없자 10월 9일에도 똑같은 요구를 했다. 이틀 후인 10월 11일, 김일성은 방송을 통해 "조국의 촌토를 피로서 사수하자"고 전 인민군에게 촉구함으로써 맥아더의 항복 요구를 일축했다.


1953. 11. 12. 북한의 김일성 주석(오른쪽)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주은래의 영접을 받고 있다(왼쪽 주은래).ⓒ NARA

그 무렵 북한은 물에 빠진 심정으로 소련과 중국에게 구원병을 간절히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낸 10월 2일자 전문에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승리할 경우, 갓 수립된 중국 공산당 정권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면서 직접 참전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스탈린은 미국과 직접 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지친 스탈린은 전쟁이 확대돼 소련이 미국과 직접 부딪히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철저한 국익 우선주의자요, 현실주의자였다.

유엔군은 인민군의 남진보다 더 빠르게 북진했다. 그해 10월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하고, 10월 17일에는 함흥과 흥남,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10월 26일에는 국군 제6사단이 압록강 초산에 이르는 등, 그해 10월 말에는 유엔군이 북한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다.


1950. 10. 24. 평남 진남포. 북한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국군과 유엔군을 환영하고 있다.ⓒ NARA


1950. 11. 21. 압록강 국경지대인 함남(현, 양강도) 혜산진. 두 유엔군과 병사가 강 건너 중국을 바라보고 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곳까지 북진했으나 곧 중국군의 참전으로 후퇴하였다.ⓒ NARA

'인간지옥'

유엔군과 함께 남한에서 올라간 많은 사회단체원들과 일부 국군의 약탈행위는 북한주민들의 반감을 샀다. 이들은 북한 주둔지에서 마치 점령군처럼 행세하며 주민들의 귀중품들을 강탈하기도 했다. 

"남한에서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던 학살극은 북한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남한 쪽 사찰보고에 따르면, 북한 정부는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1800명에 달하는 우파를 학살하였다. 내무부장관 조병옥은 원산지역 집단학살의 흔적을 목격한 뒤, 북한 지역을 '인간지옥'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도 미군과 국군에 의한 '인간지옥'을 주장했다.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미군과 국군의 북한 점령 40여 일 동안 평양에서 1만5000명, 황해도에서 12만 명 등, 모두 17만 여 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학살사건은 신천 학살사건이다. 이 학살사건은 피카소가 1951년에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통해 유명해졌다."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 1권 149~150쪽  


파블로 파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강원용 목사는 그의 저서 <빈들에서>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38선 이북의 주민들은 국군이 들어오자 공산치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쁨을 느끼면서도 공포에 떨고 있는 듯했다. 내가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은 남쪽에서 올라온 장사꾼들의 횡포였다.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국군이 있는 곳에는 일단의 장사꾼들이 따라붙어 마치 자기들이 점령군이나 되는 것처럼 칼만 안든 강도짓을 하고 다녔다. 

… 장사꾼들은 트럭을 동원해서 집집마다 마구 들어가서 쌀이나 돈이 될 만한 물건을 틀다시피 들어 내왔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헐값으로 값을 쳐서 이남의 화폐로 지불하는 시늉을 했다." - 강준만 <현대사산책 1950대편 1> 144~145쪽 재수록

또 다른 이는 국군이 북진한 곳곳에는 부녀자 겁탈 소문도 나돌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내가 전방 OO사단에서 소총소대장으로 근무했던 1970년, 그때까지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역전의 용사들이 현역에 더러 있었다.

부대 내 최고참인 한 주임상사는 한국전쟁 당시 정아무개 장군의 전령(공관병)이었는데, 수시로 자신에게 잠자리 파트너를 찾아오라고 해 그 일이 군생활 중 가장 힘들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정아무개 장군은 후일 정계에서도 요란한 추문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그 주임상사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지난 시절에는 군인이 가는 곳에는 풀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무성했다. 그동안 우리 국군은 쇄신을 거듭하여 적폐를 단절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국민의 군대' '국민의 사랑받는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 적폐와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할 것이다. 이점은 앞으로 우리 국군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1950. 10. 22. 평양. 평양시민들의 학살 현장. 가해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NARA


1950. 10. 24. 진남포. 한 북한 주민의 학살된 시신이 길에 널브러져 있다.ⓒ NARA


1950. 10. 10. 함흥. 유가족들이 학살된 시신을 늘어놓은 광장에서 울부짖고 있고 있다. ⓒ NARA

중국군의 참전

유엔군의 빠른 북상은 결과적으로 인민군의 남하와 똑같은 시행착오를 범했다. 유엔군의 북진은 결국 중국군의 참전을 불러왔다.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미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 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원래는 트루먼이 맥아더를 본국으로 불렀으나, 맥아더는 장시간 전장을 비울 수 없다면서 본국행을 사실상 거절했다. 이에 트루먼이 맥아더의 뜻을 존중해 둘은 웨이크 섬에서 만나게 됐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자신감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추수감사절인 11월 23일까지 북한군의 저항을 잠재울 것입니다. 한국에 파병된 미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트루먼은 반가우면서도 한편은 불안해 맥아더에게 물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치 않겠는가?"

"우리는 중국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공군이 없습니다. 만약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한다면 대량 살육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1950. 10. 15. 워싱턴 백악관에서 남태평양 Wake 섬에 도착한 트루먼 미 대통령 공항 활주로에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미 최고 무공훈장을 달아주고 있다.ⓒ 맥아더기념관

맥아더는 거만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날 맥아더의 장담은 곧 빗나갔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웨이크 회합이 있은 지 열흘 만에 중국군 10만 명은 '항미원조(抗美援朝)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압록강을 건너 대규모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그때부터 한국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실 중국은 한국전쟁 개전 이래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유엔군의 38선 돌파가 임박하자 미국에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다. 10월 9일 저우언라이는 북경방송을 통해 한국전쟁 개입을 은연 중에 시사했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적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하고 있다. 북조선의 불행을 이대로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 중국은 북조선을 원조하고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중국과 북조선은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의 관계다." 

하지만 중국의 경고에 맥아더는 콧방귀만 뀌었다. 오히려 이를 즐기는 듯했다. 중국은 그들의 경고가 계속 무시당하자 마침내 파병을 결정했다. 유엔군의 북진(北進)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개입을 불러왔다. 중국은 '보가위국'(保家衛國) '항미원조'(抗美援朝)로, 이는 "집안을 지킴과 아울러 나라를 보위하고 미국에 대항하는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이었다.


1950. 10. 베이징. 중국 북경대학교 학생들이 미군의 북진에 항의하는 군중집회를 열고 있다.ⓒ NARA

(* 다음 회는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 편입니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일부는 몹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에 이를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가 2004, 2005, 2007년 세 차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입수한 한국전쟁 사진 자료 및 포스터는 눈빛출판사에서 『한국전쟁 Ⅱ』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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