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iskc.d_0004

소자하 일대 고구려성

철배산성(鐵背山城)
오룡산성(五龍山城)
비아랍성(費阿拉城)
각이찰성(覺爾察城)
흑구산성(黑溝山城)


소자하 일대 고구려성 위치도

소자하(蘇子河)일대에는 길목 곳곳에 저명한 고구려산성이 남아 있다. 소자하의 강줄기를 따라 고구려의 주요 교통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소자하 연안로는 무순(撫順)을 지나 혼하(渾河)를 거슬러가다가 소자하를 만나, 남진하여 신빈(新賓)일대를 지나 환인(桓仁)일대로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이 길을 거슬러 현도군(玄菟郡)을 몰아간 고구려는 마침내 요동(遼東)을 확보하는 데 성공 할 수 있었다. 거꾸로 중국의 군대도 이 길을 따라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342년 전연군(前燕軍)의 침공으로 고구려는 왕도(王都)를 잃고 왕모(王母)를 포함 5만 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어야 하였다. 고구려의 참패는 침공군이 평탄하고 넓은 길로 올 것이라 오판하여 이 방면의 요격에 중점을 두었던 데 있었다. 침공로로 이용될 수 있는 또 다른 길에는 약간의 병력을 배치하는 데 그쳤다. 좁고 험한 길이어서 침공군이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평탄하고 넓은 길로 보내진 고구려 정예군은 맞딱뜨린 전연군을 섬멸할 수 있었지만, 정작 좁고 험한 길로 밀려든 전연군의 주력을 요격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여기에서 등장한 평탄하고 넓은 길은 ‘북도(北道)’라 하고, 좁고 험한 길은 ‘남도(南道)’라 불리었는데, 이 두 통로가 과연 어떤 길을 가리키는가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어떤 의견을 따르더라도 소자하 연안로가 배제되는 경우는 없다. 그만큼 이 길은 평탄하여 기록이 전하고 있는 북도의 분위기에 걸맞다. 무순의 신성(新城)을 비롯하여 이 통로 상에 남아 있는 고구려성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겠다.

먼저 철배산성(鐵背山城)이 혼하 중상류에서 소자하로 들어서는 진입로에 있으며, 소자하 연안의 요충지에는 오룡산성(五龍山城)이, 과거 제2현도군이 자리잡았던 영릉(永陵) 일대에는 비아랍성(費阿拉城)[구로성(舊老城)]을 비롯하여 영릉남고성(永陵南古城)과 각이찰성(覺爾察城)[온가요산성(溫家窯山城)]이 차례로 포진해 있다. 그리고 이 경로의 끝자락에 해당하면서 환인과 집안으로 들어가는 부이강(富爾江)연변에 흑구산성(黑溝山城)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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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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