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ismy.d_0003_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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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성 영안 상경성




중국 흑룡강성 영안 지역 
발해 상경용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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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흑룡강성 영안 지역(지도)은 발해의 주요 도시였던 5경 가운데 하나인 상경용천부가 있던 지역이다. 상경용천부는 발해 당시에는 상경성 또는 홀한성이라고도 불렀다. 제3대 문왕이 757년 처음으로 수도로 삼았고 이후 동경용원부로 잠시 수도를 이전했다가 성왕 때 다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발해 전시기를 걸쳐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수도로 있었으나, 발해 멸망 이후 유민들이 강제 이주당한 뒤부터는 폐허가 되어 청나라 때까지 방치되었다. 일제 강점기 발굴보고서 등에 동경성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동경용원부와 혼동하기가 쉬워 현재는 상경성으로 부른다. 1909년 이후 일본, 러시아, 북한 학자들이 여러 차례 발굴을 했고 1980년대 초부터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발굴을 지속하고 있다.

상경성 주변에는 삼릉둔 고분군, 대주둔 고분군, 홍준어장 고분군, 칠공교, 오공교, 행산 가마터 등 많은 발해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영안 상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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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5경 중의 하나인 상경용천부성 지도  이다.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에 있다. 발해의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755년 무렵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785년 무렵 다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천도하더니 제5대 성왕 대화여(大華璵)에 이르러 다시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 발해국이 망할 때까지의 수도였다. (관련글 : 동북아역사넷>상경(영안) )

『요사(遼史)』에는 ‘홀한성(忽汗城)’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상경용천부가 홀한하(忽汗河), 즉 지금의 목단강(牧丹江) 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되고, 동단국이라는 국가가 잠시 들어섰다가 그 뒤에는 폐허가 되었다. 성터와 왕궁터가 남아 있다. 

성터는 외성, 궁성, 황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성(外城)은 동서 4,650m, 남북 3,530m의 긴 네모꼴로서 높이 4m의 토성으로 두르고, 중앙 북방에 다시 황성(皇城: 內城)을 쌓았다. 성 밖에는 해자를 만들었고, 네 모퉁이에는 각루의 흔적도 남아 있다. 외성에는 모두 11개의 성문이 있었다.

궁성은 북쪽 중심에 긴 네모형으로 만들고, 전체 둘레는 3,986m이다. 각루와 해자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궁성 정문은 오봉루라고 하고 축대와 주춧돌이 남아 있다. 궁성 내부는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지며 제2궁전지 옆에 있는 팔보유리정이란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또한 어화원이라는 정원 터가 보존되어 있다.

황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연(連)한 일직선의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중심으로 좌경(左京)·우경(右京)으로 갈리고, 이것을 다시 여러 조방(條坊)으로 나누었다. 황성 안에는 궁전터가 여섯이 남아 있고, 그 가운데 하나에는 오늘날의 온돌시설을 하였음이 발견되었다. 석사자(石獅子), 보상화무늬(寶相華文)의 장전(長塼), 유리·기와·석등(石燈) 등은 발해의 독자적인 문화양식을 보여준다. 

외성 안에는 11개의 도로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의 방(坊)을 이루었다. 방의 전체 숫자는 81개 이상으로 추정되며, 4개의 방이 한 단위를 이루어 전(田)자 모양을 하였다. 여기에는 일반 주택뿐 아니라 시장과 절도 자리잡고 있었다. 사지는 성 안팎에서 10여 기가 발견되었고, 2호 사지(南大廟)에는 발해시대의 석등(石燈)과 석불(石佛)이 전해진다. 또 상경성 안에 있는 토대자촌(土台子村)(지도). 백묘자촌(白廟子村)(지도) 등에서 지금까지 4개의 사리함이 출토되었다.


영안 상경성 항공사진(ⓒ『육정산과 발해진』)


영안 상경성 제1궁전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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