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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⑬] 정월대보름날 농사걱정

일요서울 승인 2015.09.25 10:50 호수 1117 54면 


- 명절에도 쉴 새 없이 일했던 책임감의 화신

- 이순신의 충성심과 약소국의 비애감 ‘절절’

경남 통영 <세병관> 


추석이다. 매일 뜨는 달이지만, 정월 대보름날과 8월 추석의 달만큼 우리 민족에게 의미있는 달은 없다. 《난중일기》에도 정월 대보름날과 추석 때의 일기가 있고, 달 이야기도 나온다.


▲ 1592년 1월 15일. 흐렸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새벽에 망궐례(望闕禮)를 했다.


1592년 1월 15일 일기다. 이날은 정월 대보름날이다. 이날 일기는 관료인 이순신이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의식을 했다는 기록만 있다. 그러나 일기에는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전통시대에는 누구나 대보름날에 꼭 행하는 풍속이 있다. 약밥을 먹고, 보름달 아래에서 다리밟기 놀이를 하고, 또 농사를 예측하는 일이다. 이순신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일기가 있다. 1596년 1월 15일 일기다.


▲ 1596년 1월 15일. 맑았고 따뜻했다. 밤 3시에 망궐례를 했다. 아침에 낙안 군수와 흥양 현감을 불러 같이 아침을 먹었다. 늦게 대청으로 나갔다. 제송공문을 써 나누어 보냈다. 그대로 항복한 왜인에게 술과 음식을 권했다. 낙안과 흥양의 전선(戰船), 군사용 도구 부속물, 활쏘는 군사와 노 젓는 군사들을 점검하고 검열했다. “낙안은 더 심하게 잘못되었다”고 했다. 이날 저녁, 달빛이 아주 밝았다. “풍년이 될 징조”라고 했다.


이 날 일기에서 항복한 일본군에게 술과 음식을 권한 것이 바로 약밥을 만들어 먹는 풍속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 달빛을 보고 풍년을 예측하는 모습도 나온다. 이순신은 일기에 대보름 풍속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일기에는 자세히 나온다. 약밥 풍속은 이순신과 같은 시대 인물인 오희문의 1597년 1월 15일 일기에 나온다. 


“오늘은 속절(俗節)이다. 시열의 어머니가 약밥을 만들어 보냈다. 가족들과 같이 먹었다. 오습독댁에서도 한 그릇을 보내왔다.”


이 약밥은 약식 혹은 약반이라고도 한다. 밥에다 꿀을 넣고 지은 밥이다. 정월 대보름이나 결혼식, 회갑연 등을 할 때 만들어 먹었다. 그 유래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신라 소지왕 10년(488년) 1월 15일, 까마귀가 물고 온 종이에 글이 쓰인 이상한 일이 있은 뒤부터 매년 찰밥을 지어 까마귀를 위한 제사를 하면서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조선 시대에 생겨난 풍속처럼 기록하고 있다.


즉 중종 때 학자인 서해의 부인 고성 이씨가 남편이 죽은 뒤 서울 약현(지금의 중림동 천주교회당 자리)에서 청주를 빚고 과자의 한 종류인 유밀과를 제조했는데 품질이 좋아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약현의 ‘약’자를 따서 그 집의 청주를 약주(藥酒), 유밀과로 만든 밥을 약식(藥食, 약밥), 유밀과로 만든 과자는 약과(藥果)라고 불렀다고 한 것이다.


대보름날의 풍속중의 하나가 다리밟기, 즉 답교놀이인데, 답교놀이가 기록된 일기도 있다. 박취문의 《부북일기》이다. 박취문이 함경도 국경지역에서 근무할 때인 1646년 1월 15일, 그는 여러 동료들과 함께 술을 갖고 기생을 거느리고 남문 밖으로 나가 답교놀이를 했다.


그런데 같은 군인이었던 이순신과 박취문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같은 대보름날이었지만, 이순신은 박취문과 그의 동료들과 달리 술을 마시고 기생과 함께 답교놀이를 가는 한가한 모습이 아니다. 1596년 정월 대보름날의 일기를 보면, 항복한 일본인을 위로하고, 자신의 업무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한가할 틈이 없는 이순신, 시도 때도 없이 일만하는 일벌레 이순신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는 이순신이 민족 최대의 위기 시기에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위기를 잊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이순신의 열정의 결과이다.


이순신 시대 사람들은 보름달의 어떤 모습을 보고 풍년이 될 징조라고 했을까? 이수광도 《지봉유설》에서, “정월 대보름날에 뜨는 달을 보고 그 해의 풍년여부를 점 친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달을 보고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방법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 시인 김려(1766~1822)의 기록이다. 그는 보름달의 생김새가 두터운지 얇은지, 높은지 낮은지를 살펴보아 예측한다고 했다. 즉 달이 두텁게 보이면 풍년, 얇게 보이면 흉년이고, 또 달이 높게 뜨면 산골 농사가 풍년이 되고, 낮게 뜨면 들판 농사가 풍년이 된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대보름날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래의 풍속을 좇아 술에 취해 여유를 부리기보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했고, 또 전쟁 중에 수없이 굶어죽었던 백성들을 기억하며 농사를 걱정하며 보냈다.


그런데 일기에 언급된 망궐례는 무엇일까. 망궐례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조선의 임금이 상국인 명나라 황제를 향해 절하는 의식으로 망궁례(望宮禮)라고 하기도 한다. 다른 하나, 즉 이순신이 했던 망궐례처럼 지방에 있는 수령들이 서울에 있는 임금에게 절하는 의식이다. 셋째는 서울에 있는 관리들이 궁궐에 들어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절하는 의식이다. 매월 1일과 15일, 설날과 동짓날, 왕과 왕비의 생일에 했다. 망궐례는 객사 안에 설치해 놓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가 새겨진 목패(木牌)를 향해 충성을 맹세하며 절하는 의식이다.


망궐례의 실제 모습은 유희춘의 1568년 1월 1일 일기에 나온다. “날이 새기 전에 관복을 갖춰 입고, 12번 절을 하고, 산호(山呼, 천세를 부르는 것)를 했다.” 천세를 불렀다는 것은 조선이 황제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만이 ‘만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제후격인 조선 임금은 ‘천세’를 들어야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임금에게 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고, 고종이 왕이 아닌 ‘황제’가 되면서부터다.


선조가 명나라 황제에게 망궐례를 한 기록도 《선조실록》에 나온다. 1593년 2월 10일, 선조는 여러 관리들을 거느리고 ‘궐패’가 설치된 신안관에 가서 두 번 절을 했다. 궐패는 명나라 황제를 상징하는 목패이다. 조선의 관리들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에 절했듯, 선조는 궐패에 절을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힘없는 나라는 늘 그렇게 강대국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고육지책이다. 지금의 우리의 국격은 어떤가? 추석 보름달을 바라보며 우리의 진정한 국격을 생각해볼 때다. 또 이순신이 항상 고심했듯,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들의 책임과 의무를 생각해볼 때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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