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49444


"북한군 따윈 문제도 안 된다" 세계 최강 자만 빠진 미국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18] 국군, 38선에서 낙동강까지 밀리다

17.08.11 07:09 l 최종 업데이트 17.08.11 07:09 l 글: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1950. 7. 대전.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최초로 도착한 미군 스미스부대가 열차에서 내려 전선(오산)으로 떠나고 있다.ⓒ NARA


<손자병법>


<손자병법>은 고대 중국의 병법책이다. 그 원본은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춘추시대 오나라 합려를 섬기던 손무(孫武)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전해지는 <손자병법>은 조조가 원본을 요약하고 해석을 붙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 13편이다. 이 <손자병법>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최고의 병서(兵書)로 평가받고 있다.


일찍이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전쟁터에서 이 <손자병법>을 늘 지니고 다니면서 읽었다고 한다. 또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손자병법>을 보고, "내가 20년 전에 읽었더라면..." 하고 한탄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손자병법>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병법을 뛰어넘는 경세(經世)의 책으로, 인생 성공 열쇠가 담겨 있는 위편삼절과 같은 책이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은 채 5시간도 안 돼 개성을 그리고 사흘 만에 수도 서울마저 점령했다. 인민군은 서울에서 사흘간 머물면서 전황을 관망한 뒤 곧장 한강 도하작전을 감행해 7월 3일 국군의 한강방어선을 돌파했다.


그와 동시에 그날 수원과 인천도 점령했다. 인민군이 이들 두 도시에 진주했을 때 주민들은 모두 피란을 떠나 유령의 도시처럼 텅 비어 있었다. 국군은 한국전쟁 발발 후 전 지역에서 인민군에 제대로 대항치도 못한 채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날짜 미상. 미 해병대가 영일만(포항) 근교로 상륙하고 있다.ⓒ NARA


인민군-미군의 최초 교전 


한국전쟁 발발 후 도쿄에서 날아온 미 제24사단 예하 제21연대 제1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은 1950년 7월 1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C-54 수송기로 부산에 도착한 뒤,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전투에 투입됐다. 그는 전투에 앞서 큰소리를 쳤다. 


"북한군 따위는 문제도 안 된다. 우리 부대는 오늘 밤에 수원까지 진격하겠다."


그들은 오산 최초 교전에 앞서 인민군들이 전선에서 미군을 보기만 하면 지레 겁먹고 도망갈 것이라고 착각했다. 당시 미군은 세계에서 가장 악독한 독일군과 일본군을 물리쳐 자신들이 세계 최강이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스미스부대는 단 한 차례 전투에서 400명 병력 가운데 15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박격포 등 주요 공용화기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과 인민군의 첫 전투는 미군의 참패로 끝났다. 미군의 이런 졸전은 되레 인민군의 사기만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1950. 7. 16. 충남 공주.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금강교를 폭파하고 있다. ⓒ NARA


대전 전투


1950년 7월 20일, 호남과 영남으로 갈리는 교통의 요충도시 대전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인민군에 맥없이 무너졌다. 대전 전투에 참가한 미 제24사단 3900여 명 가운데 1100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으며, 대부분 군장비도 빼앗겼다. 더욱이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마저도 실종 후 인민군 포로가 됐다. 


인민군은 대전을 점령한 뒤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7월 말에 이르러 인민군은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와 제주도만 조금 남겨두고, 남한 전 지역의 약 90%를 점령했다.

1950. 7. 21. 미 전투기의 폭격으로 불타는 대전.ⓒ NARA


"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 이승만 대통령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점령할 수 있다." - 신성모 국방장관


한국전쟁 전, 이처럼 큰소리쳤던 대한민국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낙관과는 달리 국군은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한 달 남짓 만에 낙동강까지 밀렸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 첫째는 국군은 인민군에 견줘 군사력이 월등히 뒤질 뿐 아니라 무소불위의 전차는 단 한 대도 없었다는 점이요, 그 둘째는 그 무렵 국군은 건군 이래 최대 규모로 지휘관을 교체했다는 점이요, 그 셋째는 농번기로 많은 병력이 휴가 및 외출·외박 등으로 부대를 비웠을 뿐 아니라 전쟁 발발 전날 하필이면 육군 장교구락부 개관식 파티로 채병덕 참모총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2차, 3차 회식으로 즉각 대응치 못했다고 한다.

1950. 9. 북한군의 독전 벽보.ⓒ NARA


장개석의 한탄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국군이 그렇게 밀린 근본 원인은 <손자병법>의 기본을 몰랐기 때문이다. <손자병법> 모공(謀攻) 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저편의 사정을 알고 자기편의 사정을 다 잘 알고 있으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저편의 사정은 알지 못하고, 자기편의 사정만 알고 있으면 한 번은 이기고, 한번은 진다. 저편의 사정도 모르고 자기편의 사정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하다."(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者 一勝一敗 不知彼不己者 每戰必殆)


대통령을 비롯한 국군 수뇌부는 상대의 전력도 모르고, 자기 편의 전력도 모르는 우(愚)을 범했다. 그리고 미군도 상대를 모른 채 패배했다. 


장개석(장제스)은 모택동(마오쩌둥)의 공산군보다 10배나 강력한 자신들의 군대가 중국 본토에서 쫓겨난 뒤에야 패전 원인이 내부의 부정부패에 있었음을 알았다. 전쟁은 병력과 무기만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지한 것이다. 장개석은 그제야 일찍이 맹자가 설파한 "천시(天時)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는 가르침을 깨달았다. 


그는 "(국부군) 병사는 인민을 보호하고, 인민과 단합해야 하는 필요를 (절실히) 몰랐기 때문에 (병사들이) 인민들을 되는 대로 해치기까지 해 군대의 기율이 완전히 상실됐다"라고 한탄했지만, 회복의 때를 놓쳐버렸다(로이드 E. 이스트만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240쪽 참고).

1950. 8. 3. 경북 왜관. 미군 트럭이 왜관 철교를 마지막으로 통과하고 있다. 이후 이 철교는 폭파되었다.ⓒ NARA


조선의용군과 간도특설대 출신의 대결


나는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여러 문헌을 들추던 가운데 <조선의용군의 밀입국과 6.25전쟁>이라는 책을 읽게 됐다. 이 책의 저자 김중생(金中生) 선생은 독립운동가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의 손자로, 1999년 내게 중국대륙 항일유적지를 알뜰히 안내해주셨던 분이다. 


이분은 13세 때 조선의용군 제3지대 본부 통신병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인민군에 편입해 참전했다. 북한에서 인민군으로 7년간 복무한 뒤 다시 중국에 돌아가 가목사(佳木斯) 사범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이후 중학교 교원으로 복무한 뒤 한국에 영구 귀국해 삼성물산 중국담당 고문을 지냈다.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인생 역정을 살아왔다.

1999. 7.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를 앞두고 국립현충원 임정 묘역 이상룡 국무령 무덤 앞에서 고유인사를 올린 뒤 기념촬영(왼쪽부터 김중생 선생, 이항증 전 광복회경북지부장, 필자) ⓒ 박도


"6.25전쟁은 당시 38선 최전선에 포진한 인민군 7개 사단, 21개 보병연대가 탱크와 중포의 엄호 하에 대남 기습공격으로 시작된다. 21개 보병연대 중에서 47%인 10개 연대가 만주에서 건너 온 조선의용군 부대이다. 


이처럼 대남 공격의 제1진 병력에서 조선의용군 사단병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 (7개 사단 가운데) 제4사단장 이권무, 제5사단장 김창덕, 제6사단장 방호산, 제12사단장 전우 등은 전부 조선의용군 장군들이다." - 김중생 <조선의용군의 밀입국과 6.25전쟁> 173~174쪽 중에서


사단장 방호산(方虎山)은 만주사변 후 흑룡강성 밀산 지역에서 항일유격대로 활약한 분이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주공부대인 제6사단장으로 서울 침공에 앞장섰는데, 그와 마주한 국군 제1사단장은 백선엽으로 위만국(僞滿國, 괴뢰 만주국) 간도특설대 출신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기묘한 운명적 만남인가. 


당시 항일유격대원들은 위만군, 특히 간도특설대원들을 일제의 가장 악질 주구(走狗)로 여겼으며, '인간망종'이라 해 땅벌보다도 못하게 취급했다. 땅벌도 제 영역을 침범하면 상대를 침으로 공격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런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란 사람이 일제 침략군에 맞서기는커녕 어찌 그들의 사냥개가 된다는 말인가.

1950. 8. 10. 낙동강 유역의 한 마을이 미 전투기의 폭격으로 불타고 있다.ⓒ NARA


나는 이 대목을 보면서 한국전쟁 당시 수도권을 방어하던 국군 제1사단이 사흘 만에 서울을 내준 근본 원인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번 회 이야기는 손자병법으로 시작했으니 이로써 마무리한다.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상의 것은 아니다.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百戰百勝 非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也)


부디 남과 북의 지도자는 이 말을 명심하길 바란다. 아울러 분단 70년이 넘은 이 즈음, 한반도 분단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미국도 이제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로 인도주의에 입각해 휴전선 철조망을 평화적으로 걷는 데 앞장서주길 바란다. 그렇다면 미국은 세계인의 존경을 받게될 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도 망상에 그치지 않을 듯하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1950. 8. 17. 미군들이 낙동강 일대 마을을 수색하고 있다.ⓒ NARA

1950. 8. 20.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불타고 있다.ⓒ NARA

1950. 8. 20. 다부동전투에서 한 유엔군 병사가 피로에 지쳐 기관총도 팽개친 채 참호에서 자고 있다.ⓒ NARA

NARA 서고 소장 북한 측 노획물에서 찾은 독전 격려 선전 벽보.ⓒ NARA

1950. 7. 29. 경북 영덕. 국군이 전투가 없는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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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NAR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NAR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NAR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NAR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NAR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박도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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