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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이야기 - 해설 난중일기⑭] 인연(因緣)

일요서울 승인 2015.10.05 10:06 호수 1118 54면 


- 이광과 인연으로 ‘백수’에서 탈출하다

- 자신의 본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라


<통영 착량묘> 


인연(因緣)은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혹은 사물과의 관계, 어떤 일이 생겨난 이유, 불교에서 말하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직간접적인 원인이 그것이다. 일상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흔히 인연이라고 말하고, 인연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 흔히 이순신을 발탁한 사람, 이순신과 가장 특별한 인연을 맺은 사람을 서애 류성룡이라고 한다.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류성룡이 이순신을 발탁하기 이전에 크고 작은 인연을 통해 그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 있다. 이광(李洸, 1541~1607)이다.


이순신의 도약대 된 이광


이순신은 1587년, 함경도 녹둔도 둔전관이었을 때, 기습해온 여진족을 격퇴했지만 문책을 당해 그의 인생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해야 했다. 이순신은 1588년 1월, 여진족 부락 소탕 작전인 시전부락 공격 작전에 참전해 백의종군이 해제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복직되지 않았고, 아산으로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조정에서 특별 인재 선발 정책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임용되지 않았다.


이순신은 자신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질 때를 기다려야 했다. 함경도에서 내려온 지 1년만인 1589년 2월, 이순신에게 훗날 도약대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이순신을 불러 자신의 조방장(助防將, 군사 참모의 일종)으로 삼은 것이 시작이다. 그 기회를 탄 이순신은 그 후 승승장구했다.


그 후 이순신은 같은 11월, 임금의 호위 부대 장교인 선전관, 12월에는 전라도 정읍 현감(종6품), 1590년에는 평안도 고사리진 병마첨절사(종3품), 평안도 만포진 수군첨절제사(종3품), 1591년 2월에는 전라도 진도 군수(종4품), 전라도 가리포 수군첨절제사(종3품) 등의 관직을 임명받으며, 최종적으로는 전라좌수사(종3품)에 발탁되어 임진왜란을 대비할 수 있었다.


그 모두 이광의 이순신 발탁이 출발점이다. 이광과 이순신은 본래 같은 덕수 이씨로 친척관계다. 그러나 이광이 이순신을 발탁한 것은 사적 관계 때문이 아니다. 1583년 함경도에서 시작된 이광과 직간접적인 인연에서 검증된 이순신의 군사적 재능 때문이다. 1583년 이순신이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용의 군관, 건원보 건관이던 시기에 이광은 함경도 도사(都事), 1586년 이순신이 함경도 조산보 만호일 때, 이광은 함경도 길주 목사, 함경도 관찰사였다. 1588년 초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 작전 때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과 함경도 관찰사 이광이 함께 참전했다. 그러나 함경도에서 이광과 이순신은 실질적인 직속 상하관계가 아니다. 서로 거리를 두고 만나거나,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이광과 관계없이 이순신은 자신의 자리에서 여진족 기습에 따른 사형의 위기와 백의종군을 묵묵히 극복하면서 계급장도 없이 참전해 여진족을 토벌했다. 이순신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나 평가와 무관하게 항상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크고 작은 소중한 인연은 언제나 그렇게 만들어진다. 인품의 향내는 굳지 자랑하지 않아도 다른 이가 먼저 맡는다. 이순신의 능력과 인품의 향내를 경험했던 이광과의 인연이 결국 ‘백수 이순신’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낸 계기의 하나가 되었다.


‘요행과 만일’은 병법일 수 없어


《난중일기》에도 이순신과 이광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모습이 나온다.


▲ 1592년 1월 17일 [양력 2월 29일] 맑았다. 한겨울처럼 추웠다. 아침에 순찰사(이광)와 남원의 반자(半刺, 아전)가 있는 곳에 편지를 보냈다. 저녁에는 쇠사슬을 고정시킬 돌을 실어올 일로 선생원으로 배 4(척)을 보냈다. 김효성이 이끌고 갔다.


1월 17일의 일기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상관인 전라순찰사 이광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이다. 《난중일기》에 처음 등장하는 이광에 대한 일기이다. 그 후에도 1월 24일과 2월 10일, 4월 11일에도 각각 이광이 보낸 편지를 읽는 모습이 나온다. 특히 4월 12일 일기는 거북선 건조와 관련해 이순신과 이광이 협의를 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날 이광의 군관인 남한이 거북선에서 포를 쏘는 모습을 살펴보고 갔기 때문이다. 4월 12일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이기도 하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이광에게 1592년 7월 혹은 8월 초에 보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편지도 나온다. 1593년 3월 22일 이후에 기록된 여러 가지 메모 중 하나다.


▲ …사또께서 한 번의 실패를 탄식하고 근심하지 마시고, 잘못을 궁리하시어 완전한 회복할 계책을 신속히 *■히 다시 종묘사직을 되찾는다면 심히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이(李)와 백(白) 두 장수의 죽음은 모두 스스로 얻은 것입니다. 요행과 만일은 실로 병가(兵家)의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는 원문인 한문 미판독 글자)


이순신이 언급한 “이(李)와 백(白) 두 장수”는 1592년 6월 6일 용인전투에서 전사한 선봉장 이지시와 백광언으로 추정된다. 용인전투는 조선군 5만 명이 와키자카 야스하루(脅坂安治)가 지휘하는 1,600여 명의 일본군에 대패한 전투다. 이순신은 편지로 이광의 패전을 위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병법 원칙을 지키지 못해 패전한 것이니 향후에는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전쟁터에서 그 어떤 ‘요행’이나 ‘만일’이라는 가정을 하지 말고, 오직 철저한 준비와 치열한 노력만이 시작과 끝이라는 이순신의 평상시 생각을 단호히 보여주는 편지글이다. 우리의 삶에도 요행과 만일은 없다. 늘 미리 대비하는 자세만이 이순신처럼 승리하는 길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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