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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마한 왕 직계 왕족…부흥운동 상징적 존재”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 <8> 김알지

기사입력 2020. 02. 24   16:47 최종수정 2020. 02. 24  16:49


신라 역사를 반 이상 지배한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금궤 속에서 태어났다는 계림. 천년 세월을 이어온 신령한 숲이다. 필자 제공


천년 왕국 신라는 총 56명의 왕이 992년(B.C. 57∼A.D. 935) 동안 통치했다. 박(10명)·석(8명)·김(38명)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이어가며 나라를 유지했다. 시조 박혁거세거서간∼8대 아달라이사금(4대 탈해이사금 제외)까지 240년은 박씨 왕, 9대 벌휴이사금∼16대 홀해이사금(13대 미추이사금 제외)까지 172년은 석씨 왕, 17대 내물이사금∼52대 효공왕까지 556년은 김씨 왕이었다. 53대 신덕왕∼55대 경애왕까지 15년은 다시 박씨 왕, 마지막 경순왕(9년)은 견훤이 옹립한 김씨였다.


신라 전성기는 모두 김씨 왕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신라 역사를 절반 넘게 지배한 경주 김씨 시조는 김알지(金閼智·65∼?)다. 그는 4대 탈해이사금(재위 57∼80·이하 탈해왕) 9년(65·을축) 경주 계림의 금궤 속에서 나와 성을 김씨, 이름은 알지라고 탈해왕이 지어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기록이다.


‘탈해왕이 계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호공(왜국에서 망명온 신라 대보)을 보내 알아보니 금빛 상자 안에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이 아이는 하늘이 나에게 준 아들이 아니겠는가”라며 궁궐로 데려와 양육했다. 김알지가 성장하자 탈해왕이 대보로 삼고(삼국사기), 또는 태자로 책봉했다(삼국유사).’


두 사서는 달리 기술하고 있다. 재상 격인 대보와 왕위에 오를 태자 사이에는 천양지차의 간극이 존재한다. 두 자리 모두 최고의 권좌라는 공통점이 있다. 도대체 금궤에서 나온 김알지가 어떤 신분이었기에 당시 신라 조정에서 이토록 극진한 예우를 했을까. 이런 관점에서 김알지 실체를 모르고는 비밀스러운 신라 역사의 빗장이 열리지 않는다.


한반도에 신라·고구려·백제·가야의 4국 시대가 열리기 전, 이 땅에는 마한·진한·변한의 3국이 터를 잡고 오래전부터 살아왔다. 삼한 모두 부족·성읍 국가 연맹체를 이뤄 왕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삼한 중 강대국은 마한이었다. 마한 왕이 마한 사람으로 진한 왕을 임명했고 변한은 마한에 조공을 바치며 군신지국 사이를 견지했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부족 질서가 먼저 붕괴된 건 진한에서부터였다. 중국 전국칠웅(B.C. 386년부터 호칭) 중 한 국가였던 연나라의 망명객과 위만조선(B.C. 194∼B.C. 108)에 멸망한 기자조선 유민들이 대거 진한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들 북방 민족들은 점차 세력을 확충해 진한 토착민을 누르고 신라를 건국(B.C. 57)했다. 그 수장이 바로 박혁거세거서간이다.


마한에도 변고가 일어났다. 아시아 동북부(만주)에서 고구려를 개국(B.C. 37)한 고주몽(동명성왕)의 서자 온조가 서해를 건너 마한으로 상륙했다. 마한 왕에게 의탁할 곳을 간청해 정착지를 내줬더니 급속히 세력을 키워 백제를 건국(B.C. 18)한 것이다. 마한과 백제 사이에는 영토 쟁탈 전쟁이 계속됐다. 변한이라고 무고할 리 없었다. 알에서 태어난 김수로가 6개 부족을 결집해 금관가야를 건국(A.D. 42)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99년 사이에 전개된 한민족 4개국의 성립 과정이다.


마한은 백제에 멸망당했다. 도래인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의 망국한은 하늘을 찔렀다. 마한 왕족 일부는 고구려로 망명해 그곳에서 귀족 대우를 받으며 여생을 마쳤다. 또 다른 왕족은 마한의 맹소 장군이 이끄는 부흥군의 망국 왕이 돼 복위를 고대했다. 그러나 한 번 기울어진 국운이 다시 회복되진 않았다. 탈해왕 5년(61) 8월 맹소 장군이 백제군과의 복암성(충북 보은·옥천) 전투에서 참패했다. 함락 직전 맹소는 망국 왕과 같이 신라군에 투항하며 성 일대를 송두리째 신라 영토로 귀속시켰다.


당시 신라 조정에는 진한시대 이미 정착한 마한 세력이 요직을 두루 맡고 있었다. 귀화인이었던 신라 내 마한 사람들에게는 구심점이 없었다. 이즈음 망국 왕이 귀순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알지가 계림 숲 금궤에서 나온 건 망국 왕 귀부(歸附) 후 4년 뒤의 일이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시기상의 일치다.


계림 안의 기이한 괴목. 필자 제공


우리나라 고대 역사서는 상당 부분이 은유와 상징으로 기술돼 있다. 오히려 중국 『수서』의 신라 왕실에 대한 기록이 훨씬 구체적이다. 『수서』는 당 태종 시절 위징이 편찬(630)한 수(581∼618)나라 역사서다.


‘신라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달아나 신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를 왕으로 다스리게 됐다.’


마한 멸망 후에도 주변 국가에서는 백제를 마한으로 불렀다는 사료가 많다. 당시 신라는 26대 진평왕(김씨)이 재위(579∼632)할 때도 당나라와 사신을 교환하는 등 밀접한 관계였다. 내왕하는 사신을 통해 신라 왕실 계보도 상세히 파악하고 있을 무렵이다.


사학계서도 김알지가 마한 왕의 직계 왕족으로 부흥운동의 상징적 존재였음을 인지하고 있다. 그의 귀부와 더불어 신라는 마한의 적통임을 내세우게 되었다. 김씨가 왕권을 장악한 뒤 마한의 고토 회복을 전제로 백제와 전쟁하는 대의명분이 되기도 했다.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 수행에 크나큰 동력으로 작용했다.


김알지는 탈해왕(석씨)의 조력으로 조정 세력권에 본격 진입했지만 박씨 왕실과 결합해 5대 왕 파사이사금(박씨)을 즉위시켰다. 석씨 왕족은 격노했다. 이후 신라 왕위는 12대까지 박씨 왕족이 이어갔고 13대 가서야 미추이사금(김씨)이 즉위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다시 14대 왕부터는 절치부심하던 석씨가 16대 홀해이사금까지 왕권을 차지했다.


임금은 부모·부부·형제·자매 사이에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절대 권좌의 자리다. 용상이 타 성씨로 교체되는 혼란 속에 얼마나 많은 신료들이 보복에 신음하고 목숨을 잃었겠는가. 이처럼 신라의 세 왕족은 왕권 쟁탈을 거듭하면서 사직을 이어왔다.


천년을 이어오는 역사의 행간에는 신라인들만의 비밀이 감춰져 있다. 바로 『화랑세기』를 통해 확인되는 자유분방한 성(性) 문화다. 여왕에게 3명의 남편이 허용되고, 친남매도 부부가 되는 근친혼 등 현대의 도덕으로는 용납 안 되는 풍속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서는 자연스러운 사회 관습이었다. 오히려 이런 제도가 사회 전체를 혈연 공동체로 묶어 국론을 통일시켰다는 것 또한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다.


김알지 후손들은 박·석씨보다 임금으로는 뒤늦게 등극했다. 그들은 영광과 좌절을 거듭하며 찬란한 문화 창조의 큰 족적을 남겼다. 계림 탄생 설화로 초기 역사를 풍미한 김알지였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행적이나 치적, 죽음에 관한 기록은 없다. ①김알지 ②세한 ③아도 ④수류 ⑤욱보 ⑥구도 ⑦미추로 이어지는 아들 계보가 사서에 전할 뿐이다. 7대 손이 13대 왕으로 즉위한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이다. 


<이규원 시인>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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