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97835 

광개토태왕의 '굴욕'? 그는 왜 싸우지 않았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1 드라마 <광개토태왕>, 여섯 번째 이야기
11.07.18 12:17 ㅣ최종 업데이트 11.07.18 12:17 김종성 (qqqkim2000)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 ⓒ KBS

한민족 최대의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 중국인들의 기억 속에 '고구려 콤플렉스'를 진하게 새겨준 광개토태왕. 그런데 이런 광개토태왕도 중국에 조공을 했다. 중국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준 정복군주가 왜 '굴욕적'인 조공을 한 것일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광개토태왕은 영락 9년 1월(399.2.22~3.22)에 사절단을 파견해서 중국 왕조(선비족+한족)인 후연에 조공을 했다. 후연이란 나라는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고구려의 라이벌로 묘사되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후계자인 장수태왕 때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총 48회나 중국에 조공을 했다. 고구려, 아니 한민족의 전성시대인 광개토태왕·장수태왕 때도 한민족과 중국 사이에는 이처럼 조공이 있었다.
 
광개토태왕 시대마저도 중국에 조공을 했다면, 고구려가 강대국이었다는 우리의 지식은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혹시 국수주의적 역사해석에 사로잡혀 그의 시대를 과대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판단은 아직 성급하다. 조공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그 실체를 파악하면 강대국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을 했다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민법에 쌍무계약과 편무계약이란 것이 있다. 금전과 상품을 교환하는 매매는 가장 대표적인 쌍무계약이고, 대가 없이 금전·물건을 제공하는 증여는 가장 대표적인 편무계약이다. 한마디로,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관계가 존재하면 쌍무계약이고 그렇지 않으면 편무계약이다.
 
조공은 일종의 쌍무계약 같은 것이었다. 신하국이 상국에게 일방적으로 조공을 하는 게 아니라, 신하국이 조공을 하면 상국은 회사(回賜)라는 답례를 해야 했다. 물물교환 형식으로 조공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일본 학계에서는 조공 대신 조공'무역'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학자들이 많다.
 
조공이 무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매우 풍부하다. 예컨대,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따르면 성덕왕 30년 2월(731.3.13~4.10)에 신라가 금은과 우황 등을 조공하자, 양귀비의 남자로 유명한 당나라 헌종은 그에 대한 답례로 능채(綾綵) 500필과 백(帛) 2500필을 회사(回賜)했다. 능채나 '백'은 비단의 일종이다. 
 
'조공'도 일종의 무역이었다
 

▲ 당나라를 방문한 신라 사신. 당나라 태자 이현(654~684)의 무덤에서 나온 그림이다. 사진은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몽촌역사관의 벽면에 걸린 그림이다. ⓒ 김종성

장수태왕 때의 사례를 보면, 조공 물량의 증감에 따라 회사 물량도 증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그때(장수태왕 60년)부터 조공이 전보다 배로 오르자, 회사 역시 조금씩 올랐다"고 했다.
 
조공이 무역이었다는 점은 이후 시대의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컨대, 조선 태종 3년 4월 8일자(1403.4.28) <태종실록>에 따르면, 조선이 명나라에 말 1만 필을 조공하자 명나라에서는 비단 제품으로 답례했다. 많은 사람들은 조선이 명나라에 말을 그냥 바쳤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대가로 비단을 받았던 것이다.
 
이 같은 조공의 특성은 중국이 상국일 때만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예컨대, 한국이 상국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종 6년 12월 27일 자(1425.1.16) <세종실록>에 따르면, 예조판서 신상이 "여진족이 조공하러 올 때마다 종이를 많이 요구합니다"라고 말하자 "세종은 많이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는 여진족이 만주 특산품을 조공하면 조선은 종이 등을 지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공은 무역'이라는 측면 외에도, 조공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특성이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조공을 받는 쪽보다는 조공을 하는 쪽이 무역흑자를 보았다는 점이다. 상국은 신하국이 형식상으로나마 제후의 예를 갖추고 자국의 패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일정 정도의 무역적자를 감내해야 했다. 주의할 것은, 외국이 중국에게 제후의 예를 갖추었다고 하여 그 외국이 실제로도 제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조공무역의 손익 문제와 관련하여, 공자는 사서삼경의 하나인 <중용>에서 "보내는 것을 후히 하고, 오는 것을 박하게 하는 것은 제후들을 포용하는 길"(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이라고 말했다. 적게 받고 많이 베풂으로써 천자(황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 논리는 국내적 차원의 황제-제후 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적 차원의 상국-신하국 관계에도 적용되었다. 이런 논리에 따라 중국은 신하국과의 관계에서 무역적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상국 대접을 받는 조건으로 금전적 손실을 감수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생기는 무역적자는 민간무역이나 밀무역을 통해 충분히 보충되었다.
 
이렇게 조공이 신하국에게 유리하다 보니 신하국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자주 조공을 하려고 했다. 이를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가 이성계 집권 시기인 1397년에 발생한 조선-명나라 무역분쟁이다. 명나라는 3년에 1차례만 조공하라고 하고 조선은 1년에 3차례 조공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발생한 분쟁이다.
 
사실, 3년에 1차례 하는 것도 그리 적은 횟수는 아니었다. 명나라의 행정법인 <대명회전>에는 유구(오키나와)는 2년에 1차례, 안남(베트남)과 섬라(태국)는 3년에 1차례, 일본은 10년에 1차례 조공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런 예를 보면, 1년에 3차례나 조공하겠다는 조선의 요구는 상당히 지나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명나라의 무역적자가 한층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명나라는 조선에서 자주파 정도전이 제거되고 사대파 이방원이 집권하자, 서기 1400년에 그에 대한 '선물'로 '1년 3차례 조공'이라는 파격적 조건을 수용했다. 1534년부터는 '1년 4차례 조공'이 관철되었으니, 조선이 명나라에 얼마나 많은 무역적자를 안겨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여진족이나 대마도와의 관계에서는 조선이 상국이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무역에서는 조선이 적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조공, 바치는 나라에 경제적 이익을 안기는 시스템
 
조공이 신하국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활용한 또 다른 나라는 일본이었다. 명나라는 일본에게 10년에 한 번만 조공하라고 했지만, 일본은 어떤 때는 8년 만에 조공을 하는 바람에 명나라를 당혹게 만들기도 했다. 골치 아픈 일본에게 명나라가 내린 제재는 결국 무역관계 단절(1551년)이었다.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그로부터 41년 뒤인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비키라"며 임진왜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조공이란 것은 조공을 하는 나라에게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는 무역 시스템이었다. 신자유주의 하의 WTO(세계무역기구) 시스템과 비교할 때, 조공 시스템은 경제적 약자를 배려하는 측면을 일정 정도 띠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왕들은 열심히 중국에 조공을 하는 한편, 여진족·대마도의 조공은 가급적 적게 받고자 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이 후연에 조공을 한 것도 그런 취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무역흑자를 내기 위해 적성국 후연에 조공을 했던 것이다.
 
'아무리 흑자를 낸다고 해도, 조공을 하려면 신하의 예를 갖춰야 하지 않느냐? 아무래도 굴욕적인 형식을 피할 수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측면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공을 한다고 하여 반드시 국력이 약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광개토태왕이 후연에게 조공한 이유는...
 

▲ 경기도 구리시 경관광장에 있는 광개토태왕 동상. ⓒ 김종성

광개토태왕이 후연에게 조공을 한 것은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고구려 본기'만 놓고 보더라도, 태왕 때의 고구려는 후연과의 전쟁에서 3승 2패를 거두었다. 후연을 압도하는 상황 하에서 조공을 했던 것이다. 고려(상국)와 여진족(신하국)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군사적으로 우월한 나라가 신하국이 되어 조공을 하는 사례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군사적으로 우세하면서도 신하국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경제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국제무역에서는 좋은 상품을 많이 갖고 있는 나라가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으로 유리한 나라가 무역의 규칙을 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공을 받는 측에서는 자신들이 무역적자를 감내하는 대신 자신들이 정한 규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 규칙이란 것은 자국을 상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대방을 상국으로 인정한다고 하여 독립성이나 자주성이 침해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신하국은 무역흑자를 얻을 목적으로 상대방을 상국으로 인정했다. 신하국과 상국은 각각 실리와 명분을 나눠 가졌던 것이다. 
 
광개토태왕 역시 이런 판단에 따라 후연에 조공을 했다. 군사적으로는 후연을 능가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후연에 뒤지기 때문에, 그들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신하국의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장수태왕이 48회나 조공을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강대한 군사력이 있었다면 후연을 좀더 밀어붙여서 완전한 항복을 받아냈어야 하지 않는가?"라며 탄식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 미국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군사력이 있다고 하여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세계 최강 미국이 중동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거나 혹은 개입하고 있지만, 전쟁이 1차례 벌어질 때마다 미국이 10년씩 늙어가고 있지 않은가. 군사력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 역시 군사력만으로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외교형식상의 굴욕을 감내하면서 조공을 했던 것이다.
 
이 점은 광개토태왕이나 장수태왕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중국, 특히 한족 정권과 싸워서 한국이 패배한 적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한국의 역대 왕들은 무역흑자를 얻을 목적으로 중국을 상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식상으로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실질적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무역흑자를 보장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공을 했던 것이다.
 
조공무역에서 한국은 실리를 취하고 중국은 명분을 취했다. 어느 한쪽도 실리와 명분 양쪽을 다 취하지 못했으니, 어느 한쪽이 완벽하게 승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명분과 실리 중 어느 쪽을 취하는 것이 옳은지는 쉽게 판가름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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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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