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media.daum.net/v/20180301211933097


천대받고 배고픈 조선 군대.. 차출 기피·탈영 속출

강구열 입력 2018.03.01. 21:19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주본·연구서 통해 본 '훈련도감'


최고권력자의 향배와 수도의 방위는 동서고금 국가위기를 가늠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국왕 선조가 중국으로의 망명을 안달하고, 한양이 불탔던 임진왜란은 그런 점에서 조선왕조가 개국 후 200년 만에 맞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1593년 10월,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훈련도감의 조직을 명령하고, 수도 한양 방위와 국왕 호위의 임무를 맡겼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던 것이다. 훈련도감은 조선 최정예 부대였다. 그렇다면 훈련도감의 실제 운영은 그만한 위상에 걸맞은 것이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훈련도감이 폐지된 1882년까지 30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훈국등록’의 역주본 1·2권과 함께 출간한 ‘인정사정, 조선 군대 생활사’, ‘조선 최정예 군대의 탄생’에서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시작과 직업군인인 부대원들에게 급료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한 훈련도감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다. 


훈련도감 군인들이 임금에게 올린 상언에는 그들이 겪는 갖가지 고충이 담겨 있다.


◆“명색이 왕족인데 군대에 갈 순 없다”


1676년 9월 전라도 흥덕의 이시발이라는 사람이 숙종에게 글을 올렸다. 대왕(大王)의 직계 8대 후손으로 명색이 왕족인데 “천한 상놈이나 가는” 훈련도감에 차출된 게 억울하니 면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시발의 주장은 조선사회에 만연했던 ‘병역기피’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특히 양반 지배층 사이에서 이런 정서가 강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양반은 군역의 의무를 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군역은 양인(良人)의 부담이 되어갔고, 왕족이나 공신의 후손은 군역 대상에서 빠져 이시발처럼 신분을 앞세워 면제를 요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피지배층에게도 훈련도감 차출은 빈곤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기피의 대상이었다. 훈련도감은 5000여명 수준으로 유지되었는데, 이는 당시 서울 인구의 10% 정도로 상당한 규모였다. 하지만 병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각종 혜택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모집했지만 여의치 않아 각 지방에 인원을 강제적으로 할당하는 ‘승호제’(陞戶制)를 실시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훈련도감의 구성원들은 직업군인으로 급료를 받거나 ‘보인’(保人·군역 대신 베나 쌀, 화폐 등을 바치는 사람)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급료는 깎이거나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잦았고 보인은 뺏기기도 했다. 1628년 3월 훈련도감 포수 전의원이라는 이는 “사또가 저에게 속한 보인을 군대에 차출해 지원받을 포목이 사라졌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1679년 10월에는 삭감된 월급을 정상화해 달라는 포수들의 요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훈련도감 차출을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최하층인 노비들이었다. 그들은 열악한 급료라도 안정적으로 지급될 수 있다는 점, 경우에 따라 신분상승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반겼다. 1691년 9월 박세만이 노비 출신인 부친이 50년 가까이 훈련도감에서 일하고도 다른 사람들은 받은 면천 조치 등의 혜택에서 제외되었다고 호소한 것은 이들이 기대한 것인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필요에 따라 발휘된 충성심, 인조와 훈련도감의 애증


이런 상황에서 평시라면 몰라도 급박한 위기의 순간에 군인이 반드시 발휘해야 할 충성심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재위 중 대규모 반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의 경험은 천대받고, 배고픈 군인들이 군주와 나라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 반란을 일으켰다. 파죽지세의 반란군은 한양으로 몰아쳤고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런데 피난길의 임금을 호위해야 할 훈련도감의 군인들은 식솔을 살리겠노라 도망가 버렸다. 이때의 탈영병이 900명이었다. 당시 훈련도감 군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탈영병 문제는 인조대의 문제만은 아니어서 훈련도감 창설 후 20년이 지난 1613년(광해군 5년)까지 탈영병이 1644명에 달했다. “훈련도감이 얼마나 엉성한 군대였는지를” 알 수 있는 수치였다.


사정이 더 급박했던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상대로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피난을 간 남한산성에서의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물자 부족이 극에 달하자 군인들은 “산성을 지킬 수 없다”며 시위를 벌였다. 훈련도감 군인이 다수 포함된 산성 수비대의 시위는 “인조가 항복을 서두르게 된 도화선”이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호위를 포기하고, 시위까지 벌였지만 인조는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릴 수 없었다. “훈련도감이 국왕의 권력과 직결되는 기구”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임금을 맞이하고, 호위했으며 때로는 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은 군대였지만 불만을 달래어 유지하는 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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